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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 스완 - Black Swan
영화
평점 :
상영종료
며칠 전에 종영된 드라마 '드림 하이'에서 송삼동은 그런 얘기를 한다. 최고의 자리에 서는 것은 멋진 일이지만 그만큼 외로운 일일 거라고. 아마도 많은 사람이 동의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또 동의할 것이다. 그 외로움을 감수하고서라도 최고가 되고 싶다고...
여기, 그 최고의 자리에 서고 싶어하는 인물이 있다. 성실한 발레리나인 니나. 그녀는 하루종일 발레만 생각하고 발레 꿈을 꾸고, 발레를 중심으로 모든 것이 돌아간다. 동료들이 삼삼오오 모여 앉아 수다를 떨 때도 니나는 늘 혼자였다. 몸을 풀어주고 어떻게 하면 더 춤을 잘 출 것인지만 고민한다. 소심하고 순종적이고 착해보이는 니나는, 그래서 새로 올릴 무대 백조의 호수에서 '백조'의 역할엔 어울리지만 '흑조'의 역할을 함께 소화해내기는 무리로 보였다. 단장 역시 그런 사실을 알아차리고 니나를 배역에서 떨어뜨리지만 어느 순간 니나가 보인 배역에 대한 집착과 그로 인한 공격성에 흑조로서의 가능성을 기대하며 주인공 자리에 발탁한다.
니나는 신이 났다. 최고로 행복했다. 그 행복한 순간을 엄마와 함께 나눴다. 엄마 역시 발레리나였었고, 니나를 임신하면서 발레를 그만두기는 했지만 발레에 대한 열정은 아직 식지 않았다. 딸의 아침부터 저녁까지를 돌봐주고 몸 상태를 체크하고 힘이 들때 용기를 북돋아주는 그런 멋진 엄마였다.
주인공 자리를 거머쥐었지만 니나의 고민은 사라지지 않는다. 늘 순종적인 모습만을 보여왔던 니나로서는 거칠고 반항적인, 압도적인 카리스마를 뿜어내는 흑조의 연기가 나오질 않았던 것이다. 경험해 보지 못했고 상상해 보지 못했던 그 세계는 니나의 현실에서 지극히 멀었다.
왕년의 프리마돈나로서 이제는 은퇴의 길을 걷게 된 선배 베스의 모습은 니나를 더 불안하게 만든다. 한때 청춘스타의 대명사였던 위노나 라이더를 영화를 보는 동안은 알아보지 못했다. 뒤늦게 자막으로 확인한 뒤 그게 위노나였단 말인가! 충격 한 방. 위노나 라이더는 배역에 딱 어울리는 모습으로 분했다. 훌륭한 배우라면 자신을 통해서 퇴락한 스타의 이미지라도 제대로 보여줘야 했겠지. 그것이 현실처럼 아플지라도...
불안과 초조에 휩싸인 니나는 자꾸 제 몸에 상처를 낸다. 그리고는 그 상처가 자신에 의해서 발생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한다. 동료 릴리는 자유분방한 여자로 니나와는 정반대의 성격. 자신의 대타 배역을 맡고 있는 그녀가 제 자리를 빼앗아갈 것 같아 니나는 극도의 스트레스와 공포에 휩싸인다.
연출이 훌륭했던 것은 순간순간 니나에게 엄습해 오는 검은 그림자의 모습을 니나의 모습으로 투영했다는 것이다. 백조이면서 흑조의 역할을 동시에 감당해야 하는 니나에게 극복해야 할 또 다른 인물은 바로 자기 자신!
영화가 스릴러라는 것을 알고 보았지만, 이 영화는 스릴러라고만 부르기엔 부족하고, 거의 호러 수준의 공포감을 보여준다. 우아하고 아름답기만 하던 클래식 선율도 어느 순간 숨을 죄어오는 압박으로 변신하고 백조와 흑조의 완벽한 일체감을 보여준 나탈리 포트만의 신들린 연기도 관객에게 어마어마한 긴장감을 선사한다. 영화를 다 보고 일어설 때는 목이 뻣뻣해져 있을 정도로...
워낙에 왜소한 체구에 말라깽이긴 했지만 발레리나로 분하기 위해서 무지막지한 연습을 하지 않았을까 싶다. 대역을 쓰긴 쓴 것인가 싶을 만큼 발레 연기가 자연스러웠는데 내가 발끝으로 서 있다고 착각할 만큼 아찔함을 많이 느꼈다. 이 영화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도 거머쥐고 연기 인생의 큰 획을 그은 것은 분명해 보이는데 사실 조금 걱정스러웠다. 이렇게 강렬한 배역을 소화하고 나면 정신과 치료를 같이 받아줘야 하는 것은 아닐까 싶어서 말이다. 이은주가 죽었을 때 그녀가 맡았던 심상찮던 배역들에 대한 얘기가 많았었다. 알아서 잘 하겠지만, 이런 우려가 들만큼 작품의 배역이 흡인력 있고 그 이상으로 무서웠다.
이런 종류의 스트레스를 감당해 내고서 최고의 자리에 우뚝 서게 되는 걸 테지만, 혹 그로 인해 피폐해지는 영혼으로 천재들이 단명해 왔던 것은 아닐까 상상해봤다. 악마와 거래를 해서라도 성취하고 싶은 예술적 열망과 광기는 이해가 되기도 하지만 그 이상으로 무섭게 다가온다. 평범한 사람의 상식 선에서는 버거운 금단의 열매다.
영화 속에서 니나의 엄마가 참 인상적이었다. 처음에는 아주 따스하고 힘이 되어주는 엄마였었는데 어느 순간 그 엄마가 무섭게 보이기 시작했다. 엄마에게는 두 가지 마음이 존재하지 않았을까. 자신이 도달하지 못한 꿈의 경지에 딸이 대신 서주길 바라는 대리 심리와, 자신이 가지 못했던 그 정상의 자리에 딸이 서는 것에 대한 두려움 말이다.
권정생 선생님의 '한티재 하늘'에서 보면 아들을 낳지 못했던 엄마가 딸이 아들을 낳자 부럽다 못해 몹시 배아파 하는 장면이 나온다. 니나의 엄마는 나이를 먹고 아기를 가지면서 발레를 그만두었지만, 어쩌면 그걸 핑계삼아 자신의 한계를 감췄을지도 모르겠다. 너 때문에 내가 희생되었다. 너를 위해 나는 헌신해왔다!라는 주문으로 딸을 압박해오지 않았을까? 의도했든, 그렇지 않든 간에 말이다. 점점 망가져가는 니나를 걱정하는 마음도 진심이고, 니나가 무대에 서는 것을 막고 싶은 마음도 진심이 아니었을까. 배우의 이름은 모르겠지만 엄마 역을 맡은 분의 연기도 탁월하게 훌륭했다. 정말, 무서웠다.
단장 역을 맡은 뱅상 카셀도 훌륭했다. 모니카 벨루치가 겹쳐보이는 건 어쩔 수 없지만 주어진 배역의 얼굴에 딱 맞는 옷을 입었더랬다. 적당히 느끼하고, 탐욕스럽고, 그러나 사람 보는 눈은 정확한, 그래서 더 밉고 고약한 단장 역할 말이다.
나의 공주님 소리를 듣는 순간 힘이 빠졌다. 완벽을 재현해 보였고, 완벽함을 온 몸으로 느꼈지만 그래서 진정 행복해졌을지...
포스터도 훌륭하다. 강렬한 눈빛과 균열이 가버린 얼굴에서 쪼개진 니나의 영혼이 보인다. 백조와 흑조의 완벽한 일치. 나탈리 포트만, 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