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15 - 경종.영조실록 - 탕평의 깃발 아래 ㅣ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15
박시백 지음 / 휴머니스트 / 2010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조선의 임금들을 보면 자질은 좋아보이는데 왕이 되는 과정의 무리수 때문에 발목 잡혀 무척 아쉬움을 남기는 인물들이 있다. 전기에 세조가 그랬다면 후기에는 영조가 그렇다. 물론 그 길을 열어준 것은 아비 숙종의 책임이 참 크지만...
경종은 왕이 되기 전에 세자 시절만 30년을 보냈다. 어머니 장희빈이 아버지에 의해 죽고 나서의 시간은 그야말로 살얼음 판이었을 것이다. 아비도 신하들도 누구도 그의 편이 되어주지 않으니 조심에 또 조심을 하며 살았을 것이다. 그래야만 목숨을 보전할 수 있고, 그래야만 임금이 될 수 있었을 테니. 철저히 몸을 낮추고 속을 드러내지 않고 살아온 세월 끝에 그는 마침내 임금으로서의 정치력을 보일 때가 있었다. 임금을 능멸하던 노론 신하들을 갈아치우고 그 자리에 소론 인물들을 앉혔던 것이다. 그렇게 환국이 진행 되면 옥사는 바늘 뒤의 실처럼 꼭 따라오기 마련. 그러나 놀랍게도 그 와중에 연잉군(훗날의 영조)은 살아남는다. 전혀 가담하지 않고 이름만 거론되어도 죽어나가기 쉬웠던 역사 속에, 역안에 이름이 정확히 오르고도 살아남은 놀라운 경우다. 세제가 되는 과정도 무례했고 무엄하기 짝이 없었지만, 거기까지만 나아가고 멈췄으면 얼마나 좋을까 아쉬웠다. 대리청정까지 요구하지 않았더라면, 그렇게까지 욕심 부리지 말고 시간의 힘을 믿고 기다렸더라면 그는 정통성에 의한 부담을 덜어내고 좋은 임금이 되었을 것 같다. 의미 없는 바람이지만...
저자의 유머 감각이 이번에도 읽는 동안 잦은 즐거움을 선사했다. 지금 유행하고 있는 것들을 잘 섞어내는 게 박시백의 특징인데 그래서 시간이 한참 흐른 뒤에 읽게 된다면, 혹은 동시대의 유행어에 전혀 깜깜하다면 재미가 다소 감소할 것 같다. 내게 해당되지는 않지만.
'반사!'라든가, '이거슨 진리!', 영조의 뇌구조와 '탕평이라 쓰고 노론 정권이라 읽는다' 등이 심각한 읽기 중에 잠시 쉬어갈 짬을 준다. 세손을 바라보는 영조의 하트 뿅뿅 눈매도 저자의 센스를 잘 보여준다.
그래도 뇌구조를 보니 마음이 쓰라리다. 평생 눈물을 뿌리며 눈물의 정치를 보여준 영조의 양면성을 보는 것 같아서 말이다. 임금은 눈물조차도 정치적이건만 그의 지나친 눈물과 다혈질 성격 등이 함께 결합하면서 주변 사람을 참 힘들게 했다. 저런 성격은 그 비위를 잘 맞추는 사람과 그를 두려워하는 사람을 극과 극으로 갈라놓게 만들기 쉬우니 말이다. 화완옹주와 사도세자가 그런 경우가 아닐까 싶다. 한 뱃속에서 나왔음에도.
영조가 했던 일 중에서 가장 잘했던 일 중 하나인 균역법. 물론 이름 그대로 역을 균등하게 만들지는 못했어도 균등하게 만들기 위한 한 걸음을 내디딘 게 중요하다. 부족한 세금을 채우기 위한 이후 조치들에 대한 주변 인물들의 반응이 아찔하다. 저 반응들, 권리무한 책임 제로... 지금도 지나치게 자주 보는 행태들이 아닌가. 역시, 속이 쓰리다.
출간된지 한참 지나서 읽긴 했지만, 이 책 나올 때 평소보다 늦게 출간되었다고 생각했던 기억이 난다. 영조가 워낙 장수했고, 재위기간도 길었던지라 저자 분이 실록을 읽는 데에 시간이 더 걸렸다고 한다. 마땅히 그랬을 것이다. 박시백 고유의 시각으로 읽어내는 평가들이 기다려졌는데 경종이 죽을 때에 대해서는 별 얘기 안 한 게 다소 아쉽다. 그에 비해서 사도세자의 죽음에 대해서는 사건의 재구성이 흥미로웠다. 꽤 공감이 가는 편이었는데 그래도 노론 신하들의 역할을 너무 축소한 것 같았다. 영조와 신하들과 사도세자 식구들의 사전 공모에 의한 세자갈이라고 하기엔 신하들의 위험부담이 너무 큰 게 아닐까? 영조의 눈길이 세손에게 가 있는데 그가 세자의 아들이니. 사도세자의 아들들이 더 있기는 했어도 동궁을 또 갈아치울 결심을 미리 하고서 사도세자를 제거하는데에 동의했다고 보기도 무리니까. 또 세손이 왕이 되기까지의 험했던 과정을 생각했을 때도 노론 신하들의 역할을 너무 축소했지 싶다.
세자가 죽었기 때문에 세손이 뒤를 이은 것이 아니라, 세손이 뒤를 잇게 하기 위해서 세자를 제거했다고 보는 저자의 얘기가 가슴 아팠다. 꽤 재밌게 읽었던 '사도세자 암살 미스터리'에서 보면 자신은 이미 틀렸고 아들을 살려내기 위해서 중죄인의 이름으로 죽어가는 사도세자 이야기가 나온다. 문학적 상상력을 극적인 사건에 잘 대입한 경우다.
시리즈가 20권 계획이라고 알고 있는데 16권까지 나왔으니 80%가 진행된 셈이다. 아직도 몇 년은 더 걸려야 완간이겠지만 벌써부터 뻐근하고 뿌듯하다.
덧글) 21쪽에 경종의 재혼 왕비 서씨라고 나온다. 경종의 계비는 선의왕후 '어씨'다. 오타가 있고, 236쪽의 가계도에서 사도세자와 경빈 박씨 사이의 은전군이 누락된 게 다소 아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