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젊은 날의 숲
김훈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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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해인가 김훈의 책으로 새해를 연 적이 있었다. 꽤 오래 전에 나왔던 그 책은 무척 어렵고 무거웠다. 한 권을 다 읽어내면서 숨이 가빴다. 그리고 그 해는 대체로 독서가 느리고 버거웠다. 그게 김훈 탓이라고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만 나는 꼭 김훈 탓 같았다. 그래서 새해 처음 잡는 책은 지나치게 무겁지 않은 책으로 고르려고 한다. 이 책은 12월 초에 한 번 잡았었다. 절반 쯤 읽다가 잠시 덮어두었다. 답답했기 때문이다. 칼의 노래를 읽고 나서 빗살무늬 토기의 추억을 읽었더니 두 주인공이 똑같이 이순신의 목소리를 냈다. 이순신으로 느끼게 되는 김훈의 목소리였다.   

공기가 무거워서 꽃잎은 축축했고, 가벼운 것의 예기를 뿜어내지 않았다. 꽃잎에 이슬을 매단 채 아침햇살을 받으면 패랭이꽃은 이파리 끝까지 긴장하면서, 쟁쟁쟁 소리가 날 듯한 기운을 뿜어내는데, 흐린 날 아침에 꽃은 긴장하지 않았다. -163쪽


이 책의 주인공은 29살의 처녀다. 하지만 모든 목소리가 여전히 중후한 김훈의 것으로 들린다. 그 불협화음과 부조화를 견디기 힘들었다. 이런 느낌은 그 동안도 줄곧 느껴왔지만 주인공의 연령대와 성격이 크게 차별화되지 않아서 지나갈 수 있었는데 이번에는 몹시 반감을 느끼고 말았다. 이번 주인공도 과묵한 편이고 제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는 인물이니 '성격' 자체야 뭐라고 할 수 없는 부분인데도 캐릭터에 대한 몰입이 현저히 떨어졌다. 인정하기 싫었지만, 김훈에 대한 맹목적인 사랑을 거둘 때가, 기어이 오고 만 것이다. 

김훈이라는 이름에서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은 문체와 문장이다. 그의 간결한 문체는 권위가 있어 보였고 근사한 무게감이 있었다. 그런데 오래 접하다 보니 이것도 지겨워진다. 작가 스스로도 매너리즘을 혹시 느끼지는 않는지 궁금하다.  

나는 어머니의 말에 대답할 수 없었다. 대답할 필요가 없고, 대답할 도리가 없는 말이었다. 대답을 할 수는 없었지만, 거기나 여기가 다 마찬가지라니, 어머니의 마음속에서 그 양쪽이 모두 다 위로받기를 나는 바랐지만, 거기나 여기가 다 마찬가지이므로 양쪽 모두가 더욱 쓸쓸해지는 것이나 아닌지를 생각하면서 나는 밥을 물에 말아서 넘겼다. -16쪽 

길고 긴 문장이었지만 내용은 하나다. 결국엔 문장의 구조만 바꿔놓은 동어 반복이다.  

거기서 북쪽으로 방향을 꺾자, 아득히 흐리고 빈 공간이 펼쳐졌다. 자동차가 단 한 번 우회전함으로써 그렇게 아무것도 들어서지 않은 막막한 세상이 전개될 수 있었다. 내가 면접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이 네거리에서 서울 쪽의 익숙한 일상을 향하여 좌회전할 때, 그때 내 앞에 전개되는 공간 또한 저렇게 아득할 수밖에 없겠지만, 익숙한 아득함은 익숙해서 아득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좌회전과 우회전은 별 차이 없을 터이지만, 나는 한 번의 우회전으로 낯선 아득함을 향하고 있었다. -55쪽 

앞에 찾아놓은 문장과 똑같은 기분을 느끼게 한다. 앞으로 나아갔으면 하는데 하나마나한 똑같은 말을 반복하면서 자꾸 멈칫거린다. 그게 숨이 막혔다. 여전히 범접하기 힘든 아우라를 뿜으며 멋진 문장을 곳곳에 배치하지만 이제는 그 문장들에 현혹되지가 않는다. 그보다는 이야기의 힘을 보고 싶었다. 그런데 이야기도 나를 끌어당기지 못했다.  1인칭 시점이 줄 수 있는 어떤 매력과 흡인력을 잘 살리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주인공 '나'의 아버지는 하급 공무원으로 임직 중에 무수한 비리를 저질러 재물을 축적한 것이 발각되어 구속되었다. 아버지는 자신이 상납한 상관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고 혼자 죄값을 치렀다. 엄마와 딸은 아버지를 견디기 힘들어 했고, 오욕을 느꼈다. 아버지가 원치 않기도 했지만 가족들은 옥바라지를 제대로 하지 않았다. 무책임해 보였고 비겁해 보였다. 엄마는 가석방된 아버지가 머물 아파트를 따로 구입했다. 이혼을 한 것은 아니지만 이혼과 별반 다르지 않은 거주형태였다. 아비는 옥에서 병을 얻어 나왔고, 어미는 간병인만 붙였다. 밤이 되면 잠이 오지 않는다고 멀리서 근무하는 딸에게 전화해서 징징대는 엄마였고, 그것을 진저리나게 싫어하지만 성질은 내지 않는 딸의 건조한 대꾸가 오래도록 이어진다. 이들의 행보는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까지도 별로 변하지 않는다. 무척,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런 가족들이 있을 수 있는 거지만 마주치자니 화가 났다.  

자폐아를 두고 있는 자신도 한때 자폐아였던 안요한 실장은 주인공 '나'처럼 생기가 없었다. 너무 정적이어서 그 고요함이 독자를 답답하게 만들었다. 군 제대를 앞두고 있던 김중위가 그나마 이 작품에서 유일하게 가장 역동적인 인물이었다. 그래봤자 군인이기 때문에 행동반경과 행동의 표정이 한정되어 있지만... 

주인공 '나'는 세밀화를 그리는 화가인데 그녀의 입을 빌려 수목원의 나무와 벌레와, 한국전쟁의 흔적으로 발견된 뼛조각 등을 집중해서 설명한다. 그것은 두 계절 동안 여행을 다니면서 그것들을 관찰한 김훈의 눈과 입의 투영이었다. 그 과정을 통해서 작가는 '내 젊은 날의 숲'을 열심히 말했겠지만, 내게는 잘 들리지 않았다. 들렸다 하더라도 별 의미가 없었다. '사랑'이나 '희망'같은 단어를 써보지 않았다는 작가. 그 부재와 결핍 때문이었을까. 독자가 읽는 내내 이리 답답하고 죽은 느낌이 들었던 것은...  

일신상조회의 조기는 빈소 맨 앞에 걸렸고 유흥업소 주인들이 보낸 조화가 그 옆으로 진열되었다. 최국장은 일신상조회가 걷어 모은 조의금 봉투를 누워 있는 어머니에게 전했고, 어머니는 돈봉투를 받아서 나에게 내밀었다. 아버지는 죽어서도 출소하지 못했고, 죽어서도 형을 면제받지 못하고 있었다.-328쪽 

죽어서도 출소하지 못하고 죽어서까지도 형을 면제받지 못하는 아버지의 죄업. 살아있는 인간이 모두 그렇게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잠시 생각했다. 그 연결 고리에 적을 두고 있는 우리들이기에 사랑이나 희망같은 단어는 언감생신인 것일까.  

작가에겐 스타일이 있는 것이고 추구하는 바가 있기 때문에 독자가 감놔라 배놔라 할 수는 없는 노릇. 이제 김훈과는 잠시 거리가 필요하다. 여전히 새 작품이 나오면 눈을 반짝이며 잠시 달뜬 기분을 느끼겠지만, 과도한 기대치로 괜히 실망을 갖지는 말아야겠다고 다독여 본다. 공무도하에 이어 이번 작품은 나에게는 좋은 궁합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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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철나무꾼 2010-12-31 04: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잠시 거리가 필요하다는 님의 말 수긍이 가는 걸요.

저는 김탁환도 그렇고 김훈도 그렇고...요즘 좀 우울했거든요.
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니...
그들은 묵묵히 그대로 있는데, 우리가 변한 것 같기도 해요~ㅠ.ㅠ

마노아 2010-12-31 10:22   좋아요 0 | URL
저는 최근에 파울로 코엘료와 이제 김훈까지, 애정 전선을 좀 점검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김탁확은 사실 예전에 버린..;;; ㅎㅎㅎ
김탁환도 나오면 궁금하긴 한데 읽고 나서 역시... 이렇게 되곤 하거든요.
젊은 피의 공급이 필요해요. 우리 우울해 하지 마요!(>_<)

후애(厚愛) 2010-12-31 09: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내년에 읽으려고요.
그러고보니 한국은 내년이 내일이군요.
해피 뉴 이어~~~ ^^

마노아 2010-12-31 10:23   좋아요 0 | URL
후애 님도 해피 뉴 이어~!
하루도 채 남지 않은 2010년이라니, 어쩐지 막 뭉클해요.^^

마녀고양이 2010-12-31 09: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리뷰입니다.

김훈님의 신작으로 벌써 리뷰를 여러개 읽었네요. 읽을수록
아... 이번 작품은 보지 말아야겠어 라고 생각되니.. ㅎㅎ.
답답하고 죽은 느낌이라... 이그.

마노아 2010-12-31 10:24   좋아요 0 | URL
그래도 평점들은 엄청 좋더라구요. 저도 뭐 별점은 네 개지만..^^;;
공무도하에서 주춤거렸던 것이 이번 작품으로 제동이 걸렸어요.
역시 좀 서로 거리를 둬야 애정이 회복될 것 같아요.^^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