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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교
박범신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7월
평점 :
시인 이적요가 사랑에 빠졌다. 70 노시인을 격정으로 몰아버린 소녀는 열 일곱이었다. 그리고 시인의 필명은 적요寂寥였다.
적요寂寥
이름처럼 고요하게, 그리고 고아하게 살아온 삶이었다. 평생 시 외에는 잡문을 전혀 발표하지 않았고, 가정도 꾸리지 않았고, 젊어서는 독재정권에 저항하다가 10년간 옥고도 치렀던, 그래서 누구도 범접하기 힘든 하나의 성을 쌓아올린 시인 이적요, 그가 사랑에 빠졌다.
언뜻 롤리타가 떠오르기도 하고 괴테가 떠오르기도 하는데, 그저 단순히 사랑의 열병 이야기는 아니었다. 시작은 시인의 노트에서 출발한다. 시인은 죽음을 앞두고 있었고, 유서도 이미 써두었다. 시인은 자신의 인세 수입을 한은교에게 권리를 주었고, 밀봉해서 남기는 이 노트는 사후 일년 뒤 개봉할 것을 지시했다. 이 모든 일은 오랜 지인인 후배시인 Q변호가사 맡아서 해줄 것도 당부했다. 그는 명백히 한은교를 사랑했다고 얘기했고, 그리고 자식같던 관계의 후배 작가 서지우를 본인이 죽였다고 했다. 그러니 사후 1년 뒤에 공개할 시인의 노트는 은교를 만나 사랑하기까지, 그리고 서지우를 왜, 어떻게 죽였느냐에 대한 가감없는 기록을 담고 있었다. 믿지 못할 놀라운 이야기를 하면서 시인은 자신이 반성하지 않고 있다고 분명히 밝혔다. 회한도 없다고 했다. 시인의 마지막 말은 지극히 시적이었다.
눈이 내리고, 그리고 또 바람이 부는가. 소나무숲 그늘이 성에가 낀 창유리를 더듬고 있다.
관능적이다. -13쪽
관능적이다-라는 표현이, 이 작품의 성격을 잘 보여주는 좋은 단어가 될 터이다. 사람을 죽였다는 얘기를 하면서까지 시적 언어를 다듬은 시인의 행적과 생각을 읽어나가는 일은 그 자체로 관능적이었다.
Q변호사는 얼마나 충격을 받았을까. 사후 1년이 지나 기념사업을 시작하고 있는 마당에 접한 이 진실에 그는 정신이 혼미했을 것이다. 게다가, 은교에게는 또 다른 노트가 있었다. 시인보다 먼저 죽은 서지우 작가가 남긴 노트. 그렇게 두 개의 노트가 교차해서 지나가고 현재를 진행해 나가는 Q변호사의 이야기가 서술된다. 작품은 미스테리했고 은밀하게 관능적이었고, 그리고 서로를 파멸로 이끌어가는 인물들로 인해 서글펐다.
시인 이적요는 전략적인 인물이었다. 그가 평생 시만 고집한 것도, 독신으로 산 것도, 또한 필명을 '적요'라고 지은 것도 모두 그의 철저한 계산으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평생 오로지 시만 썼다는 게 무슨 자랑이 될 수 있단 말인가. 혼자 살았다는 게, 필명이 적요寂寥라는 게 무슨 카리스마인가. 그러나, 우리 풍토에서는 그런 것들이, 나의 시작詩作에 붙어 놀라운 성과를 확대 재생산해낼 수 있었다. 시인으로 살아남기를 꿈꾸었기 때문에, 내 시의 가치를 전략적으로 높은 곳에 올려놓고자 하는 나의 욕망은 부도덕하지 않다고 믿었으며, 그것이 편견으로 가득 찬 지식인 사회에 대한 통렬한 야유의 한 가지 방식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어쩌면 시인으로서의 내 성공에 대해, 그 무렵 자학적인 묘한 감정이 있었는지 모르겠다. 도대체 내 시가 그만한 존경과 흠모를 받아서 마땅한가. 내 시에 대한 대중의 존경과 흠모는 우리 사회의 미묘한 관습들을 재빨리 간파해서 반어적으로 부응함으로써 얻은 과도한 전리품은 아닌가.(...)내가 평생 구도하듯이 혼자 살았다는 것도, 잡문 한 번 쓰지 않았다는 사실도 물론 회자됐다. 나의 입장에서, 그런 평가들은 나의 전략에 머리 좋은 자들이 놀아난 결과에 불과했다. 나는 그래서 혼자 앉아 속으로 말하곤 했다.
"엿 먹어라!" – 142쪽
그런데 세상을 향해 엿 먹어라!라고 외쳤던 시인의 냉소는, 결국 시인 자신에게로 돌아왔다. 시인은 스스로가 위선자임을 알았고, 정직하지 못하다는 것도 알았다. 그 자신, 사실은 겁이 많은 인간임도... 알지 않았을까. 그런 시인의 곁에 아들같은 제자 서지우가 있었다. 학생 시절 시인을 스승으로 잠시 만났고, 갑작스레 문학도의 길을 걷고자 전공을 때려치웠던 그는, 애석하게도 문학적 재주가 부족했다. 가르쳐도 보고 달래도 보고 야단도 쳐보았지만, 기본적으로 밭이 부실해서 소출이 적었다. 본인에게 재주는 없건만 남의 재주는 알아볼 정도의 안목은 있던 것이 또 그를 불행하게 만들었다. 그는 스승 이적요를 존경했고 사랑했다. 그래서 그의 이름이 망가지는 게 싫었고, 그가 쌓아온 이미지가 무너지는 것도 참을 수 없었다. 자신에겐 환상과도 같은 시인이 어린 처녀 은교를 사랑하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다.
만약 서지우가 은교를 스승을 망칠 아이로 경계하지 않았더라면, 그러면서 동시에 은교를 탐내지 않았더라면, 그래서 스승의 자존감을 더럽히지 않았더라면, 오히려 이적요 시인의 사랑은 청춘을 향한 그리움과 동경 정도로 끝나지 않았을까. 서로가 서로를 아끼고 사랑했지만, 도리어 애증으로 갈무리한 스승과 제자는 파국을 향해 치달을 수밖에 없었다. 두 사람은 똑같이 잘못했고 똑같이 어리석었고, 똑같이 가여웠다. 그 사이에 있던 은교는, 그것을 알아차렸다. 동시에 사랑받았고, 동시에 두 사람을 우롱한 결과를 낳았지만, 동시에 두 사람의 사이를 질투했던 열일곱 그 아이 은교.
나이라는 것이 참 얄궂었다. 서지우는 스승의 반토막 나이로 상대적으로 젊은 자신을 과시했다. 늘 열등감에 파묻혔던 그로서는 내세울 수 있는 유일한 무기이기도 했다. 그런 서지우도 십대 은교에 비하면 아저씨에 불과했다. 인기와 명성을 얻었지만 스스로의 능력으로 인한 결과가 아님을 알고 있으니 불안하기만 했고, 뭐라도 좀 성취를 얻고 싶었지만 앞이 깜깜하니 도둑질을 하면서도 자기 합리화를 시킨다. 시인도 마찬가지였다. 모욕과 분노를 자양분 삼아 처절한 응징과 복수를 합리화한다. 벼랑끝으로 상대를 몰아갔지만, 밀쳐 떨어지는 그 발목에 자신의 발목도 함께 묶여 있음을 알지 못했다. 알았다 해도, 멈출 수 없었다. 그렇게 그들은 둘이 아니라 하나였다.
늙는 것은 용서할 수 없는 '범죄'가 아니다, 라고 나는 말했다. 노인은 '기형'이 아니다, 라고 나는 말했다. 따라서 노인의 욕망도 범죄가 아니고 기형도 아니다, 라고 또 나는 말했다. 노인은, 그냥 자연일 뿐이다. 젊은 너희가 가진 아름다움이 자연이듯이. 너희의 젊음이 너희의 노력에 의하여 얻어진 것이 아닌 것처럼,
노인의 주름도 노인의 과오에 의해 얻은 것이 아니다,
라고, 소리 없이 소리쳐, 나는 말했다. – 250쪽
작품 속에서 묘사된 여러 정황처럼, 늙었다는 것만으로 차별 받고 멸시를 받는 일이 많은 불공평한 세상이다. 나이로 우대 받는 일도 있다고 해서 상쇄될 성질의 서러움이 아니다. 갖고 싶은 것이 없었다면 허허 웃으며 넘어갈 수 있는 일도 욕심이 눈을 가리니 노여움이 커진다. 헌데, 찬란하게 빛나는 젊음에 대한 열망과 도전, 사랑에 대한 갈망 없이 '계획했던' 시인의 인생을 마무리 했더라면, 시인은 더 행복했을까? 물론 더 나빠졌을 것 같지는 않다. 하지만 그리 되면 그는 자신이 엿먹이고 있다고 믿었던 세상이 자신에게 부메랑이 되어 돌아오는 것을 몰랐을지도 모른다. 정작 통렬하게 비판받아야 할 대상이 본임임을 인정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 건 시가 아니라는 걸 말이다.
가장 초라해진 것은 은교라고 생각한다. 어리다는 것, 반짝반짝 빛나고 있음을 스스로도 알고 있고 그것을 이용할 줄도 알았던 그 소녀. 마음 가는대로 당기기엔 인생이란 불놀이가 지나치게 위험하다는 것을, 이제 온몸에 각인하며 살아야 할 테니 말이다. 그런 제멋대로 은교도 지켜야 할 이름에 대해서 행동으로 움직였다는 것은 일종의 면죄부로 읽혀진다. 사랑에도, 젊음에도 책임이 따른다는 무서운 사실을 동시에 확인하면서...
작가는 이 작품을 한 달 반 만에 미친 듯이 써내려갔다고 한다. 그것도 밤에만 썼으니 독자도 밤에만 읽으라고 당부한다. 밤에만 읽기에는 지나치게 관능적인 이 소설을, 나는 낮밤 구분하지 않고 몰아쳐서 읽었다. 볕을 염두에 두고 읽기엔 이야기의 흡인력이 너무 강렬했다. 동반자살이라도 하듯 끝을 향해 달려나가는 욕망의 주인공들은 위태롭기 그지 없었지만, 어쩔 수 없이 자연스러운 인간 군상임을 부인할 수 없는 노릇이다. 소설 속에 세상이 보이고 인간이 보이니, 소설가는 참으로 위대하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