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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성 소화 선집 ㅣ 문학동네 한국고전문학전집 9
김준형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8월
평점 :
좀처럼 만나기 힘든 재밌는 책이었다. 포복절도하는 그런 웃음과는 종류가 다르지만, 우리 조상들은 이런 이야기를 하며 웃음을 터뜨렸겠구나... 생각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제목에서 이미 알렸듯이 이 책은 조선 '후기' 성 소화 선집이다. 책장을 열면 일단 컬러풀한 춘화 몇장이 독자를 기다린다. 수위는 다소 낮지만(좀 더 높았다면 모두 랩핑되어 출간될 운명이었다 한다.) 준비 없이 맞닥뜨리면 움찔! 놀라게 될 가능성이 크다. 게다가 제목도 뜯어보면 발그레~ 해질 수 있으니 이런 때를 위해서 북커버가 필요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맨 껍데기 그대로 보길 바란다. 이제 이런 책을 본다고 부끄러워 하는 것 자체가 부끄러운 세상이 되어버렸으니. 게다가 표지가 제법 잘 빠졌다. 문학동네 문학전집의 디자인이 참 마음에 들었는데 고전문학전집도 비슷한 컨셉으로 간 듯하다. 내게는 좋은 선택이다.
이 책에는 모두 11권의 패설집에서 '성'에 관한 이야기만 추려서 담아냈다. 당연히 시대는 조선 후기의 작품들이다. 정확한 연대와 작가는 알지 못하는 경우가 많지만 대략적인 유추는 가능했다. 이야기들은 대체로 짧았고, 원문을 같이 실었으며 한자어의 해석을 각주로 달았다. 무려 650쪽이 넘는 긴 책이지만 읽는 데에 아주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 편이다. 각 잡고서 진중하게 읽을 게 아니라 편안하게 들춰보면서 쿡쿡쿡 웃으면 이 책에 딱 어울리는 반응이라 하겠다.
읽으면서 주로 '데카메론'을 떠올리게 했다. 흑사병과 같은 극단적인 배경도 없고, 한정된 공간에서 풀어내는 이야기도 아니건만, 권위 부리는 양반들과 속세에 관심없어 보이는 승려들을 조롱과 해학의 대상으로 삼은 탓일 게다. 수도사들이 승려로 대체된 그런 느낌이다. 귀족들이 양반으로 뒤바뀌고.
그런 이야기들이 당시 사람들에게 스트레스를 해소시켜주는 하나의 탈출구 역할을 해줬을 거라고 짐작하면 꽤 통쾌하기도 한데, 아무리 그렇다 하더라도 시대적인 한계 때문인지 여전히 권위의식이 넘치는 것은 쓴웃음을 짓게 했다. 이를 테면 양반 하나가 상놈을 괴롭혀서 그가 이야기에 빗대어 양반을 조롱한 것에 대해 패설집을 엮은 이의 촌평이 이렇다.
양반이라는 세력만 믿고 상놈을 농락하다가 이런 능욕을 당했으니 후회해도 할 수 없지. 다시 말해보자. 비록 복수심에서 나왔다고는 하지만 어찌 이다지도 억세고 모진가. 장비의 성난 모습을 가탁하여 마초에게 할 욕설을 곧바로 양반에게 퍼부었구나. 표독은 극에 달했고, 보복은 너무 심하구나. -135쪽
가재는 게편, 초록은 동색인 꼴이다. 본문에서 상민이 조롱하는 대목은 사실 그리 심하지도 않건만.
뿐아니라, 똑같이 책임이 있어도 여자 쪽에 좀 더 박하다는 느낌이다. 굳이 비유하자면 인현왕후와 장희빈의 싸움에서 가장 큰 책임이 있는 것은 숙종이건만 300년 이상을 '암탉'의 탓으로 돌리고도 굳이 바로잡지 않는 관행의 느낌 말이다. 다음 기록을 보자.
손은 그녀를 때렸고 발은 그녀를 찼고 양물은 그녀를 찔렀으니, 미워하려면 모두 미워하는 것이 옳다. 그런데 지금 이 여인은 그중 때리고 찬 것만을 미워하고, 자신을 찌른 것에는 오히려 기뻐했다. (...) 만약 찌르는 것이 은혜가 되어 그렇게 한 것이라면 바늘이나 송곳과 같은 것들도 은혜라 여기며 기뻐할 것인가? 손과 발로써 한 것은 미워했고, 양물로써 한 것은 사랑하였으니 이 여인의 애증의 편벽됨이 심하다고 하겠구나. -146쪽
바늘과 송곳에 비교하다니, 이제 가당키나 한가. 댁이야말로 그렇게 말할 수 있는지 꼬집어 주고 싶다. 흥!
<성수패설>에서 '욕됨을 무릅쓰고 색을 탐하다'에서는 상놈의 아내를 탐한 양반과, 그 양반에게 욕설을 퍼부은 자에 관한 재판이 나온다. 지아비가 있는 여인에게 입을 맞춘 것은 어떤 죄인지 대전통편에 쓰여 있지 않고, 양반을 모욕한 죄는 법전에 쓰여 있으니 세 차례 형장으로 때려 먼 곳으로 유배를 보내야 한단다. 결국 파렴치한 양반은 상놈의 목숨을 손아귀에 쥐고 자신의 욕정을 채운다. 이런 대목은 몹시 울컥하게 만드는 부분인데 당시의 사회상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대전통편은 18세기 말 정조 때에 편찬된 법전인데 비슷한 시기에 서양에서는 시민 혁명이 일어났다. 조선의 신분 해방은 그보다 한 세기를 더 기다려야 했다. 이 이야기가 조선 '후기'로 한정되어 있는 것을 고려할 때, 그보다 더 앞선 세대의 이야기라면 부조리와 불합리함은 더 심하지 않을까? 혹은 임진왜란 이전이라면 오히려 사회 분위기가 덜 경직되어 있을까? 역자의 바람대로 다른 세대의 이야기 묶음도 만나볼 수 있다면 좋겠다. 각자 다른 시대 분위기를 엿보고 싶다.
비슷한 시기에 떠돌던 많은 이야기들이 서로 다른 패설집에 섞여 들어가기 쉬웠기 때문에 비슷하거나 거의 똑같은 이야기도 꽤 자주 등장한다. 중국에서 전해진 이야기 몇 편은 이미 알고 있던 것도 있었다. 중국 배경의 그 이야기들을 내가 어느 책에서 읽었는지 도무지 생각이 나지 않지만.
영화 '음란서생'에서 인기 작가로 장안을 떠들썩하게 했던 인물은 양반이었다. 양반을 조롱거리로 삼았지만 이런 이야기들을 엮고 전파시킨 인물들 중에는 그들 지식인들도 상당수 있었을 것이다. 또 구한말에 엮여진 책들은 암울한 시대에 민중들의 애환을 달래줄 해우소의 역할로서 기꺼이 글재주를 쏟은 이들도 있었을 것이다. 오늘날의 우리들에게도 기꺼이 그런 작가들이 되어주는 이들이 있는 것처럼.
'고전문학전집'이란 타이틀은 자못 무겁기도 하고 어려울 것도 같은 느낌이지만 막상 접해 보면 몹시 대중적으로 쓰여졌다는 사실에 놀랄 것이다. 아직 '한중록'과 이 책 '조선 후기 성 소화 선집' 두 권밖에 만나지 못했지만, 다른 책들에 대한 기대도 크다. 깊어가는 가을에 고전과의 만남이라니, 제법 운치있지 않은가? 게다가 '성 소화 선집'이라니, 어쩐지 반항하는 기분도 들어 통쾌하기까지 하다. 은밀할 것 같은 이야기들, 시원스럽게 만나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