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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데렐라는 재투성이다 - 발도르프 선생님이 들려주는 진짜 독일 동화 이야기 2
이양호 지음 / 글숲산책 / 2009년 10월
평점 :
품절
'백설공주는 공주가 아니다?!'를 워낙 재밌게 읽어서 '신데렐라는 재투성이다'에 대한 기대가 자못 컸다. 워낙 전작에서 받은 충격이 컸기 때문에 이 작품에 깃들어 있는 여러 상징에 대한 놀라움의 크기는 다소 줄어들었지만, 그 안에 녹아 있는 서양 문명에 대한 이해가 의미 심장하게 읽혔다.
원작 자체가 길지 않기 때문에 영어판과 독일어판, 그리고 우리말 번역을 다 싣고도 대부분은 문장 속의 숨은 의미에 대한 해석에 할애되었다. 그런 까닭에 후반부로 갈수록 조금 늘어지는 기분은 드는 편이다. 저자가 해주고 싶은 이야기가 워낙 많다 보니 가지치기를 꽤 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도 비슷한 이야기로 '콩쥐팥쥐'가 있듯이 이 소녀에 대한 이야기는 오래도록 전해져 내려왔다. 그 옛 이야기를 먼저 프랑스의 샤를 페로가 수집했고, 그로부터 100여 년뒤 그림 형제가 다시 손을 보았다. '신데렐라'라는 이름은 원작 어디에도 나오지 않지만 우리에겐 이 이야기의 주인공 이름으로 각인되어 있다. 까닭은 영어 발음 탓이다. 프랑스어 '쌍드리옹'의 뜻이 '그을음'인데, 이걸 영어로 번역할 때 '씬데르스'라고 썼고, 그게 '씬데뤨라'가 되면서 우리에게 익숙한 부드러운 발음의 '신데렐라'로 둔갑한 것이다. 그러니까 사실, 이 기막힌 운명의 주인공 여아의 이름은 '재투성이'가 되어야 했던 것이다. 단순히 발음만 유사한 '신데렐라'라고 부르면 그 의미에 담겨 있는 여러 상징이 전혀 잡히지 않는다. 그 아이가 갖고 있는 슬픔과 역경, 고난의 크기 같은 것 말이다. 다만 우리가 그 이야기를 이미 알고 있기 때문에 연상시키는 것이지, 처음 그 이야기를 접하는 사람으로서는 신데렐라에게서 '재투성이'의 느낌을 떠올릴 수 없는 것이다. 여기서 이 책의 제목이 바로 나온다.
샤를 페로 작품과 그림 형제의 작품은 스타일이 조금 다르다. 그림 형제 작품에는 '무도회'란 낱말이 나오지 않고 '혼인잔치'가 대신한다. 우리에게 보다 익숙한 작품은 샤를 페로 이야기인데 이 책은 그림 형제 작품을 최종적으로 따르고 있다. 구박받던 아이가 홀로 슬픔을 달래었던 곳은 어머니의 무덤 가였다. 의붓 언니들이 옷이며 진주, 보석 등을 원할 때, 홀로 어린 가지를 원했던 재투성이 아이. 아이는 그 나뭇가지를 어머니의 무덤 위에 심었고(이를 '무덤가'로 번역한 우리나라 작품을 저자는 성토한다), 자신의 눈물로 나무를 키웠다. 그리고 날마다 세 번씩 나무 밑에 가서 울고 기도했다. 그때마다 새하얀 새 한마리가 그 나무 위로 날아왔고, 소녀가 바라는 말을 할 때마다, 새는 소녀에게 그것을 떨어뜨려주곤 했다.
그녀는 의붓 언니들과는 영 다른 것을 가리켰다. “집으로 돌아오실 때 모자에 부딪히는 어린 나뭇가지.”
재투성이와 두 의붓 언니는 이렇게 달랐다. 의붓 언니들이 저자에서 파는 물건을 바란 데 반해, 재투성이는 자연이 키운 것을 바랐다. 그것도 아버지 모자에 부딪히는 것을. 바라는 게 무엇인가를 알면, 그 사람을 알 수 있는 법이다. 의붓 언니와 재투성이는 바라는 게 달랐기에 사는 것도 달랐다. 그러니 삶을 갈무리한 것도 다를 터. – 113쪽
왕의 아들('왕자'가 아니라 굳이 '왕의 아들'이라고 꼬박꼬박 명시한다)을 위한 혼인잔치에 가기 위한 준비물도 바로 그 나무 위 새에게서 얻어냈다. 첫날의 잔치에선 금과 은으로 된 옷과 비단으로 수놓은 신발을 내려주었고, 두번째 날은 전날보다 더 당당해 보이는 옷을, 그리고 하일라이트가 될 마지막 날에는 '빛나는' 옷을 입었다. 그리고 이때 신은 신발은 온통 금으로 되어 있는 신발이었다. (요정 할머니나 유리 구두 등은 샤를 페로 원작 버전에서 만날 수 있다.)
온통 금으로 된 옷과 신발이라니, 기분에는 새하얀 드레스와 유리 구두보다 뭔가 격조가 떨어지는 기분이 들건만, 저자는 '황금'에 대한 서양인들의 집착(?)이 남달랐음을 강조한다.
우리 문명도 금을 귀하고 특별한 것으로 다루긴 했지만, 서양인들만큼은 아니었던 듯하다. 황금률, 황금시대란 말에서 보듯 그들은 가장 좋은 것, 아니 이상적인 것을 황금으로 표현했다. 심지어는 이러저러한 물질을 금으로 바꾸는 일, 즉 잡스런 성질을 바꾸는 일에, 숱한 사람들이 몸과 마음을 기꺼이 바쳤던 게 그들의 문명이다. (...)덧없고 허망한 이 세상에서, 변치 않고 언제나 제 꼴을 지켜가는 모습을 그들은 금에서 본 것이다. 또한 ‘금’의 독일 말 골드가 ‘빛나다, 반짝이다’에서 왔으니, 그들은 금과 빛을 한 동아리라고 여겼을 것이다. 빛이 나오는 바탕인 하늘을 나는 새가, 금 옷과 금 신발을 재투성이에게 내려준 점이 이 말에 힘을 실어준다. – 105쪽
우리에게 흔히 '신데렐라'는 '콤플렉스'라는 단어와 함께 사용되면서 왕자님 하나 잘 만나서 인생역전을 시키는 사람으로 인식되곤 하지만, 원작 속에서 재투성이 아이는 의붓 언니들보다 미모롭지도 않았거니와, 고난과 역경을 감내할 줄 아는 사람으로 그려져 있다. 여기에는 '재'의 의미에 대한 깊은 성찰도 한몫 더해준다. 이 부분은 좀 길지만 인용해 보겠다.
‘재’는 사람을 착잡하게 한다. 그 색깔이 그렇고, 촉감이 그렇다. 잿빛은 맥아리가 없다. 출렁임도 없고 잔잔한 흐름도 없다. 그렇다고 검은 색과 닮지도 않았다. 검은 색은 모든 것을 무화하여 ‘없음’을 오히려 세게 내세운다. ‘없음’을 통해 ‘있음’을 알리는, 기막힌 역설을 검은색은 알고 있다. 잿빛은 다른 색을 고스란히 빨아들이지도 못한다. 튕긴다는 점에서 잿빛은 있다. 그렇다고 다른 색에 힘 있게 맞서지도 못한다. 없다고 할 수밖에. 있는 듯 없는 듯, 잿빛의 꼴이다. 게다가, 조금 전까지 그곳에서 활활 타오르던 불꽃을 기억하고 있는 사람에게 잿빛은, 눈빛을 잃은 채 쭈그리고 앉아 있는 늙은이다. – 119쪽
‘재의 수요일’은 가톨릭, 루터교, 성공회가 다 치르는 절기다. 지금은 진탕 먹고 노는 날로 변질되었지만, 본래는 육적인 것을 다 끊는다는 뜻을 가진 카니발(사육제) 다음 날, 즉 예수님이 했던 광야에서의 40일간 금식을 기억하기 위한 사순절의 맨 첫날이 ‘재의 수요일’이다. 이 날 크리스천은 머리에 재를 바른다. 두덴에서 나온 말 뿌리 사전에 따르면, ‘재는 덧없음, 슬픔 그리고 속죄의 상징이다’고 나와 있다. 또한 독일어에 ‘재를 머리에 뿌린다’는 굳어진 말(숙어)이 있는데, 매우 후회한다는 뜻으로 쓰인다. ‘재’의 이런 상징성은 서양 문명의 받침돌들인 그리스·이스라엘·로마에 다 들어 있다. 그리스인들은 호메로스 시대부터 몸에 재를 뿌리거나 재 위에 앉음으로써 죽은 사람에 대한 슬픔을 드러내 보였다. 로마인들은 새해를 정갈하게 시작하려고 새해 첫날, 재로 목욕을 했다. – 122쪽
잿빛은 사실 우리 문화가 천 년도 넘게 품었던 색이고, 지금도 지긋이 품고 있는 색이다. 불교의 입김 속에서 그랬고, 장자의 날개 속에서 그랬다. 스님들은 잿빛 옷을 걸치고 살아왔다. 밤에 잠자리에 들 때도 그분들은 잿빛 옷을 벗지 않는다. 불기 없는 재, 탈 것 없는 재로 살다가, 드디어 몸조차 재가 되어 회신멸지한다. – 133쪽
재투성이가 키운 개암나무는 순전히 개인적인 나무라고만은 할 수 없다. 독일 민족을 이루고 있는 게르만족과 켈트족에게 민속적인 의미를 갖는 나무이기 때문이다. 위키피디아 사전에 보면, 개암나무의 문화적인 결이 잘 나와 있는데 간추리면 다음과 같다.
-사람들은 개암나무가 액막이 특성을 가진 것으로 여겼다. 그것으로 뱀이나 마녀를 물리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재투성이가 개암 나뭇가지를 어머니 무덤 위에 심은 것이다. 또한 로마에서는 휴전 협정이나 평화 협정을 논의할 때 이 나뭇가지를 손에 들고 있었다. 로마, 영국, 독일에서 이 나무는 행운과 풍성한 열매의 상징으로 여겨졌다. 그래서 신부는 결혼식 때 개암 열매를 담은 바구니를 선물 받았다. – 154쪽
이렇게 풀어내 보니 재투성이 이야기는 보통 의미심장한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 말이 '동화'라고 번역하는 탓에, 또 너무나 오래 그런 의미가 관행으로 되어버린 탓에 어린이들의 전유물로 전락해 버렸지만, 원어에서의 메르헨은 그저 작은 이야기일 뿐, 동화도 민담도 아닌 것이다. 물론, 어리기만 한 아이들에게 서양의 문명과 그 원형에 대해서 떠드는 건 무척 곤란하다. 아이들에겐 아이들의 눈높이에 맞는 이야기가 필요하다. 그렇지만 원작을 무분별하게 훼손하는 것은 당연히 곤란하다. 바른 번역과 해석을 바탕으로 하되 어렵지 않은 이야기로 풀어주어야 한다. 그 아이들이 자라서 이야기의 원류를 찾아보는 재미를 주는 것도 꽤 소중하지 않겠는가.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청소년 이상의 사람에게 좋은 길잡이 책이 될 것이다. '콤플렉스'라는 단어로는 제대로 설명하기 힘든 어느 소녀의 진실된 이야기와 진정성에 마음을 주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