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데렐라는 재투성이다 - 발도르프 선생님이 들려주는 진짜 독일 동화 이야기 2
이양호 지음 / 글숲산책 / 2009년 10월
품절


「재투성이」이야기를 두고 일반 사람들은 동화라 하고 학자들은 민담이라 한다. 이러한 문학 장르를 최초로 갈무리한 독일에선 메르헨이라 하는데, 그 뜻은 ‘작은 이야기’일 뿐이다. 거기엔, 동화에 있는 아이 동(童)도 없고, 민담에 있는 백성 민(民)도 없다. 다만, 현대 작가들에 의해 지어진 이야기와 구별해야 할 땐, 폴크스Volks를 메르헨에 덧붙이기도 한다. 그런데 폴크스를 ‘백성 민’으로 옮길 수 없다는 것이 문제다. 민이란 지배와 피지배를 바탕으로 한 말이지만, Volks는 그보다는 공동체를 뜻한다. 갑골문에서 밝혀진 民은 죄수의 눈을 찌른 것을 글자로 형상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논어에 나타난 民도 人보다 낮은 신분을 가리킨다. 이에 반해 폴크스는 ‘군대무리’ 즉 전사 공동체에 그 말 뿌리를 두고 있다.
-16쪽

모두가 알다시피, 옛이야기의 지은이는 알려져 있지 않다. 이런 까닭에다, 이 문학 장르를 민담이라 번역한 까닭이 덧붙여져서, 옛이야기의 지은이가 민중일 거라고 많은 사람들이 여긴다. 통념이 일반적으로 그렇듯이, 이 통념도 그것을 받치고 있는 밑돌이 엉성하다.
-17쪽

이야기꾼이 귀띔해주는 그녀의 아름다움은 우리의 예상을 비껴간다. 뿐만 아니라, 자못 엉뚱하다. 눈도 아니고 입술도 아니고 놀랍게도, 옷의 아름다움을 말하고 있지 않은가! 옷의 아름다움이 왕자의 마음을 송두리째 빼앗아 버린 것이다.

-92쪽

서양 사람들의 피와 살을 이루는 데에 가장 지속적이고 근원적인 구실을 했던 성서를 보면, 옷에 관한 말이 언뜻언뜻 나온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힐 때 옷을 벗고 도망간 한 젊은이, 새하얀 옷을 입은 천사, 희고 빛나는 옷을 입은 예수님, 그분의 옷을 만지고서 12년 동안이나 앓았던 ‘피 흘리는 병’을 고침 받은 한 여인의 이야기... 성서에서 옷의 의미는 무엇일까? 강일상 목사의 말을 들어보자.
-"예수님의 옷을 만졌다"는 것으로 마가가 우리에게 말하고자 하는, 믿음의 구체적인 내용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 지금부터 우리가 해명해야 할 과제다. 만진 것이 왜 하필이면 옷인가? 손을 만졌다고 해도 상관없고 몸을 만졌다면 더 좋았을 법한데, 왜 하필이면 옷을 만졌다고 하는 것일까? 여인이 옷을 만진 게 주술적인 행위가 아니라면, 그리고 예수님의 옷에 마술적인 능력이 있었던 게 아니라면, 이 옷은 마가에게서 상징적인 의미로 쓰였을 수 있다. 더욱이 여기 이 여인의 혈루증이 육체적인 질병이 아니라 유대 민중의 피 흘리는 삶을 상징하는 것이고 보면, 옷을 만진 이 행위 또한 상징적인 의미로 받아들여야 마땅하다.
-97쪽

우리 문명도 금을 귀하고 특별한 것으로 다루긴 했지만, 서양인들만큼은 아니었던 듯하다. 황금률, 황금시대란 말에서 보듯 그들은 가장 좋은 것, 아니 이상적인 것을 황금으로 표현했다. 심지어는 이러저러한 물질을 금으로 바꾸는 일, 즉 잡스런 성질을 바꾸는 일에, 숱한 사람들이 몸과 마음을 기꺼이 바쳤던 게 그들의 문명이다. (...)덧없고 허망한 이 세상에서, 변치 않고 언제나 제 꼴을 지켜가는 모습을 그들은 금에서 본 것이다. 또한 ‘금’의 독일 말 골드가 ‘빛나다, 반짝이다’에서 왔으니, 그들은 금과 빛을 한 동아리라고 여겼을 것이다. 빛이 나오는 바탕인 하늘을 나는 새가, 금 옷과 금 신발을 재투성이에게 내려준 점이 이 말에 힘을 실어준다.

-105쪽

그녀는 의붓 언니들과는 영 다른 것을 가리켰다. "집으로 돌아오실 때 모자에 부딪히는 어린 나뭇가지."
재투성이와 두 의붓 언니는 이렇게 달랐다. 의붓 언니들이 저자에서 파는 물건을 바란 데 반해, 재투성이는 자연이 키운 것을 바랐다. 그것도 아버지 모자에 부딪히는 것을. 바라는 게 무엇인가를 알면, 그 사람을 알 수 있는 법이다. 의붓 언니와 재투성이는 바라는 게 달랐기에 사는 것도 달랐다. 그러니 삶을 갈무리한 것도 다를 터.
-113쪽

‘재’는 사람을 착잡하게 한다. 그 색깔이 그렇고, 촉감이 그렇다. 잿빛은 맥아리가 없다. 출렁임도 없고 잔잔한 흐름도 없다. 그렇다고 검은 색과 닮지도 않았다. 검은 색은 모든 것을 무화하여 ‘없음’을 오히려 세게 내세운다. ‘없음’을 통해 ‘있음’을 알리는, 기막힌 역설을 검은색은 알고 있다. 잿빛은 다른 색을 고스란히 빨아들이지도 못한다. 튕긴다는 점에서 잿빛은 있다. 그렇다고 다른 색에 힘 있게 맞서지도 못한다. 없다고 할 수밖에. 있는 듯 없는 듯, 잿빛의 꼴이다. 게다가, 조금 전까지 그곳에서 활활 타오르던 불꽃을 기억하고 있는 사람에게 잿빛은, 눈빛을 잃은 채 쭈그리고 앉아 있는 늙은이다.

-119쪽

‘재의 수요일’은 가톨릭, 루터교, 성공회가 다 치르는 절기다. 지금은 진탕 먹고 노는 날로 변질되었지만, 본래는 육적인 것을 다 끊는다는 뜻을 가진 카니발(사육제) 다음 날, 즉 예수님이 했던 광야에서의 40일간 금식을 기억하기 위한 사순절의 맨 첫날이 ‘재의 수요일’이다. 이 날 크리스천은 머리에 재를 바른다. 두덴에서 나온 말 뿌리 사전에 따르면, ‘재는 덧없음, 슬픔 그리고 속죄의 상징이다’고 나와 있다. 또한 독일어에 ‘재를 머리에 뿌린다’는 굳어진 말(숙어)이 있는데, 매우 후회한다는 뜻으로 쓰인다. ‘재’의 이런 상징성은 서양 문명의 받침돌들인 그리스·이스라엘·로마에 다 들어 있다. 그리스인들은 호메로스 시대부터 몸에 재를 뿌리거나 재 위에 앉음으로써 죽은 사람에 대한 슬픔을 드러내 보였다. 로마인들은 새해를 정갈하게 시작하려고 새해 첫날, 재로 목욕을 했다.

-122쪽

잿빛은 사실 우리 문화가 천 년도 넘게 품었던 색이고, 지금도 지긋이 품고 있는 색이다. 불교의 입김 속에서 그랬고, 장자의 날개 속에서 그랬다. 스님들은 잿빛 옷을 걸치고 살아왔다. 밤에 잠자리에 들 때도 그분들은 잿빛 옷을 벗지 않는다. 불기 없는 재, 탈 것 없는 재로 살다가, 드디어 몸조차 재가 되어 회신멸지한다.

-133쪽

재투성이가 키운 개암나무는 순전히 개인적인 나무라고만은 할 수 없다. 독일 민족을 이루고 있는 게르만족과 켈트족에게 민속적인 의미를 갖는 나무이기 때문이다. 위키피디아 사전에 보면, 개암나무의 문화적인 결이 잘 나와 있는데 간추리면 다음과 같다.
-사람들은 개암나무가 액막이 특성을 가진 것으로 여겼다. 그것으로 뱀이나 마녀를 물리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재투성이가 개암 나뭇가지를 어머니 무덤 위에 심은 것이다. 또한 로마에서는 휴전 협정이나 평화 협정을 논의할 때 이 나뭇가지를 손에 들고 있었다. 로마, 영국, 독일에서 이 나무는 행운과 풍성한 열매의 상징으로 여겨졌다. 그래서 신부는 결혼식 때 개암 열매를 담은 바구니를 선물 받았다.
-15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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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철나무꾼 2010-10-07 16: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잿빛에 밑줄 쫘악 그어 데려가요~

마노아 2010-10-07 22:25   좋아요 0 | URL
인상 깊지요? ^^

비로그인 2010-10-11 10: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저런 걸 부탁해야겠군요. 당신이 나한테 올 때 당신 옷을 스쳤던 나뭇가지를 꺽어다 주세요,라고. 그래야겠어요. 그래야 하는 거였어요

마노아 2010-10-11 14:23   좋아요 0 | URL
아, 너무 낭만적이에요! 그런데 가느다란 가지가 아니라 몽둥이 수준으로 꺾어오면 어쩌지요? 그럼 낭만이고 뭐고 창피할 거예요.(>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