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들 로드 - 3천 년을 살아남은 기묘한 음식, 국수의 길을 따라가다
이욱정 지음 / 예담 / 2009년 8월
절판


밀가루 음식을 탕으로 맛있게 먹으려면 간이 잘 밸 수 있도록 얇게 늘려야 한다. 밀가루 반죽을 덩어리째 넣으면 간이 잘 배지 않는다. 게다가 가늘고 긴 면의 형태로 만들어야 양도 늘어나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국수는 가루를 내어 구워 먹을 수밖에 없었던 빵 문화를 낳았던 밀이 중원의 탕 문화를 만나 끓는 물에 조리하기 적합한 디자인으로 변모한 음식이라 할 수 있다. 건식의 재료와 습식의 조리법이 만난 동서 최고의 합작품, 이것이 바로 ‘국수’였다.-124쪽

송나라 이전까지의 도시들은 정치·군사도시로서의 성격이 강한, 전형적인 고대형의 도시였습니다. 당나라의 수도인 장안의 경우도 높은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었고, 성벽 내부는 다시 정방형으로 구획되어 바둑판처럼 108개의 방(坊)으로 나누어졌습니다. 방은 주민들이 거주하는 지역으로 담도 있고 문도 있어 아침에 문을 열고 저녁에는 잠갔습니다. 이곳에서는 장사를 할 수 없었죠. 상업이 가능했던 곳은 오로지 ‘시(市)’라고 불리는 구역이었습니다. 장안에는 동서로 두 개의 시가 있었는데, 하나는 동시이고, 하나는 서시였습니다. 그리고 동시에서는 내국인들이 장사를 할 수 있었고, 서시는 서역인들이 장사를 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주민들이 물건을 사기가 매우 불편했습니다. 게다가 야간에는 통행금지제도가 시행되어 밤에는 아예 물건을 사는 게 불가능했죠. -145쪽

하지만 송대에 이르러서는 이런 폐쇄적인 도시의 모습이 완전히 바뀌어 아주 개방적인 도시의 형태를 띱니다. 시간과 공간의 제한을 받지 않고 어디서나 장사를 할 수 있었습니다. 심지어 교통에 영향을 주고 안전하지 않다는 이유로 장사를 금한 홍교(虹橋-무지개다리)에서도 장사를 했습니다. 「청명상하도」의 홍교를 보면 장사하는 노점이 여덟 곳이나 있습니다. 번화한 지역에서는 밤새 장사를 해서 송대 카이펑은 지금의 도시처럼 밤 문화생활이 활발한 도시였습니다. 2,000여 명의 유태인들이 장사를 하기 위해 정착할 만큼 상업이 융성하고 비즈니스 기회가 넘치는 개방적인 도시였죠. 기록에 의하면 카이펑에는 무역을 전문으로 하는 업체만 160여 개가 있었다고 한다. 그러니 얼마나 교역량이 많고, 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카이펑으로 몰려들었겠는가. -146쪽

송대 연구소장은 카이펑의 도시 규모가 인구 150만 명-당시 유럽의 최대 도시 이스탄불의 인구는 40만, 런던의 인구는 10만 명이었다-에 이를 정도로 점점 커지면서 사람들이 성을 나가기 힘드니까 성벽을 없애고 가게를 열어 24시간 장사를 했다고 말했다. 실제로 우리는 「청명상하도」와 함께 북송시대 카이펑의 모습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는 『동경몽화록』을 통해 당시 이곳 거리에 새벽 4시에 문을 열어 한밤중까지 영업을 하는 음식점과 상점들이 즐비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동경몽화록』은 남송 시대 맹원로가 쓴 역사서로, 북송이 금나라에 패해 어쩔 수 없이 남쪽에서 살게 된 맹원로가 옛 수도의 번영을 그리워하며 저술한 책이다. 때문에 이 책에는 북송의 풍속과 건축, 문화 등 다양한 모습이 아주 세세하게 기록되어 있으며, 특히 음식문화에 대해 자세히 다루고 있다. 그 중에서 우리 제작진의 흥미를 끈 것은 송대에 이르러 국수가 대중음식으로 자리 잡았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는 기록들이었다. -146쪽

이를 테면 당시 북송 카이펑 사람들이 먹었던 다양한 국수의 이름이 등장하는데, 양고기 국물을 낸 암생연양면, 마늘과 귤껍질로 만든 소스로 무친 이탈리아 파스타와 닮은 세물료기자, 돼지고기와 닭고기로 국물을 내서 담백한 동피면, 물로 식혀서 먹는 냉동기자, 밀반죽을 손으로 비틀어 불규칙하게 썰어 고기, 야채와 함께 먹는 흘달, 동피숙회면, 혼돈, 채면, 호접면 등 그 종류가 수없이 많았다. 이를 통해 국수가 송나라 때 매우 보편화되고 인기 있는 음식이었음을 추정할 수 있었다. -147쪽

송대에 국수가 대중화되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는 또 하나의 기록은 "옛날에는 그저 숟가락을 쓰고 지금은 모두 저(箸)를 사용한다"는 보편화된 젓가락 사용에 대한 내용이었다. 이는 면 요리가 대중화되어 젓가락으로 먹는 일이 많아졌다는 것을 추측하게 했다. 실제로 여러 문헌을 살펴보면 당나라 때 밀의 생산량이 증가하고 제분 기술이 혁신적으로 발달하면서 밀가루 가격이 하락해 귀족뿐만 아니라 서민들도 분식을 즐길 수 있게 되었지만 ‘면(麵)’과 ‘병(餠)’이라는 글자가 온전히 구분되지 못했다. 당시 밀가루 음식을 가리키는 병처럼 면도 밀가루라는 뜻 이외에 밀가루로 만든 요리를 총칭하는 말로 쓰였다. 무엇보다 일반적으로 국수처럼 밀반죽을 끓는 물에 데치거나 삶은 형태로 먹는 음식을 ‘탕병(湯餠)’이라고 불렀기 때문에 국수는 탕병의 부분집합에 불과했다. -147쪽

수많은 학자들은 송대 사람들이 많은 음식들 중에서 특히 국수를 즐겼던 이유를 도시발달로 인해 그들의 라이프스타일이 변화했기 때문이라고 추측했다. 그도 그럴 것이 주로 상공업에 종사했던 송대 사람들은 그 전의 중국인들과 달리 현대인들처럼 대단히 바빴다. 때문에 집에서 음식을 만들어 먹을 시간이 없어 주로 외식을 했다.
-150쪽

당시 카이펑은 음식 배달이 대단히 일상적일 정도로 외식문화가 꽃 피웠다.
일상의 속도가 빨라져 외식을 즐겼던 송대 사람들. 이들은 외식을 할 때도 빨리 먹을 수 있는 음식을 필요로 했다. 그런데 국수는 길고 가늘어 삶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고 조리법도 간단해 빨림 먹을 수 있는 음식을 원했던 송대 사람들에게 최적의 메뉴였다.
파는 사람도 마찬가지였다. 식사 시간 때마다 밀어닥치는 손님들을 감당하기에 국수만큼 훌륭한 상품은 없었다. 국수는 다른 재료와 함께 조리를 해도 모양이 변하지 않고, 심지어 미리 삶아 놓았다가 살짝 데쳐서 국물을 붓고 고명만 얹으면 음식이 완성되었기 때문에 단시간에 손님상에 내놓을 수 있었다. -151쪽

송나라 당시 식당 점원들은 손님이 자리에 앉으면 메뉴판을 들고 가서 주문을 받아 정확하게 기록을 해두었다가 주방으로 가서 주문 내용을 큰 소리로 전달했다. 그러면 주방에서는 빠른 속도로 음식을 완성했고, 때문에 서빙을 하는 점원들은 쉴 틈 없이 양손은 물론 어깨까지 사용해 많은 음식을 날라야 했다. 그들은 아무리 음식의 가짓수가 많아도 손님이 주문한 음식을 정확하게 그 손님 앞에 놓았다. 하지만 주문을 잘못 받아 다른 음식이 나오는 경우도 있었다. 이때 점원들은 주인에게 야단을 맞거나 월급이 깎이기도 했고, 심지어 해고를 당하기도 했다.-153쪽

그녀들에게 이 국수틀이 어디에서 온 것 같으냐고 묻자 옆 마을의 국수틀이 분명하다고 말했다. 그러나 내가 중국의 것이라고 말하자 매우 놀라워했다. 그러면서 방금 전까지 국수가 잘 뽑힌다며 국수틀에 대해 칭찬 일색이던 여인들이 갑자기 돌변하여 국수틀에 대해 이런저런 불평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체츄 축제에서 만났던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국수틀이 어디에서 온 것인지 모르기 전에는 국수틀에 대해 아무 불평도 없던 사람들이 중국의 것이라는 것을 알자 흠을 잡기 시작했다.
산시성의 국수틀을 보고 중국의 것이라고 짐작조차 하지 못하는 부탄인들의 반응이 무척 재미나기도 했지만 또 하나의 흥미로운 사실을 눈치 챌 수 있는 기회가 되기도 했다. 산시성의 국수틀과 부탄의 국수틀이 놀랄 만큼 흡사한 것은 혹시 중국의 압출면 문화가 전파되었다는 가설을 뒷받침하는 증거가 아닐까.-239쪽

"인도인들은 산을 싫어해서 산에 오르지 않습니다. 이것이 힌두문명의 재미있는 점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힌두문명은 대평원에서 잉태된 문명이기 때문에 애써 히말라야처럼 높은 산을 오를 이유가 없었습니다. 산이라는 것을 받아들일 필요도 없었고 실제 전혀 받아들이지도 않았습니다. 광대한 내륙문화이 중국문명이 바다로 나가지 않았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인도에 면뿐만 아니라 중국문화가 거의 받아들여지지 않았던 것입니다. 즉, 히말라야는 중국문화가 인도로 전파되는 것을 막는 거대한 장벽이었습니다. 그래서 중국의 면도 인도로 뻗어나가지 못하고 티베트 문화권에서 멈춰선 것입니다."-247쪽

우리가 만난 이어령 박사는 이런 이유로 면이 특별한 날에 먹는 음식이 될 수 있었다고 의견을 내놓았다.
"외래문화는 축제문화가 되기 참 좋습니다. 평소에 늘 봐서 익숙한 토착문화와 달리 외래문화는 색다르니까 여느 것과 차별화되기 쉬운 거죠. 외래 작물인 밀로 만든 면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보통 때 늘 먹던 음식이라 친숙한 밥은 특별한 의미가 부여되기 어려웠지만 면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면은 이색적인 외래의 것이기 때문에 상징적인 의미를 갖기 좋았죠. 생각해보세요. 우리가 뜻밖에 횡재를 만났을 때 "이게 웬 떡이야?"라고 하지 "이게 웬 밥이야?"하지 않습니다. 밥은 늘 먹는 음식이고, 떡은 그렇지 않기 때문이죠. 특수한 것이 의미가 부여되기 쉽죠. 특히 면은 실처럼 모양이 길기 때문에 장수와 사람과의 긴 인연을 상징했습니다. 쌀알은 모두 따로따로 분리되어 떨어지지만 면은 길게 얽히기 때문에 시간의 상징이었죠. 그래서 생일이나 회갑연에는 면처럼 길게 살라는 의미에서 국수를 먹었습니다."-258쪽

"사찰 국수의 육수에 들깨를 넣는 이유는 승려들이 고기를 먹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승려들의 식단은 채식입니다. 때문에 단백질과 지방이 부족해지기 쉬운데, 들깨에는 이런 영양소가 풍부하게 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오래 전부터 승려들은 들깨를 많이 먹었고, 또 굉장히 좋아했습니다. 들깨는 승려들에게 중요한 단백질, 지방의 공급원이었습니다. 들깨 칼국수는 전통적인 사찰국수입니다."-274쪽

"승소는 스님들이 국수를 이르는 말입니다. 말 그대로 ‘스님의 미소’라는 뜻으로, 스님들이 국수만 보면 좋아서 웃기 때문에 이런 이름이 붙여졌습니다. 스님들이 왜 국수를 좋아하냐면요, 국수에는 육식을 하지 않는 스님들에게 결핍되기 쉬운 글루텐이라는 단백질이 많아서 국수만 보면 몸이 당기거든요. 그래서 국수를 보면 기분이 좋아져서 미소를 짓게 돼 승소라는 이름이 붙게 되었어요."-276쪽

에도시대는 270년간 지속되었고, 개방 전까지 한국, 중국, 네덜란드밖에 교역하지 않았던 매우 폐쇄적인 문화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니까 에도문화는 일본 안에서 그들끼리 건설한 문화라고 할 수 있다. 일본인들끼리 독자적으로 세운 도시, 에도는 그 규모가 어마어마했다. 18세기 전성기 때의 에도의 인구는 무려 100만 명에 달했다. 비슷한 시기 중국 베이징의 인구는 60만, 프랑스 파리의 인구는 55만이었던 점을 감안할 때 그 무렵 에도는 세계 최대의 도시였던 것이다. 외부세계와의 접촉을 꺼려했던 에도가 세계에서 가장 큰 도시였다니, 나는 아이러니한 느낌을 좀처럼 지울 수 없었다. -328쪽

어촌에 지나지 않았던 에도가 100만 명에 달하는 대도시로 급성장할 수 있었던 이유는 에도시대 일본의 실질적인 통치세력이었던 도쿠가와 막부의 정치체제와 깊은 관련이 있다. 도쿠가와 막부는 쇼군이 다이묘를 영주로 임명해 그들에게 관할하는 영지를 통치할 수 있는 권리를 주고 쇼군은 그 다이묘들을 다스리는 형태의 중앙집권적 봉건체제를 갖추고 있었다. 때문에 쇼군은 다이묘들의 충성도를 확인하고 통제할 수 있는 제도가 필요했기에 다이묘들의 처자식들을 에도에 인질로 잡아두고 ‘참근교대’라는 제도를 실시했다. 참근교대는 다이묘들을 1년 동안은 자신의 영지에서, 1년간은 에도에서 거주하게 하는 제도로, 쇼군은 이를 통해 반란을 막았다.
그런데 전국 각지의 260여 명에 달하는 다이묘들이 참근교대를 하기 위해 한 번 움직일 때마다 수행원이 적게는 100~150명, 많게는 4,000명이 따라붙었다. 그러니까 매년 에도에 30-40만 정도의 무사들이 오갔고, 여기에 이들을 위한 사원과 창고, 숙소 등을 건축하기 위해 전국에서 수공업자와 상인들이 대거 모여들었다. 정권강화를 위해 도입한 참근교대제가 에도를 대도시로 급성장하게 하는 기능을 한 것이다.-328쪽

일본 사람들은 신도시 건설을 위해 전국 각지에서 모여든 장인, 노동자, 상인들을 가리켜 ‘조닌’이라 불렀다. 조닌은 도시에 사는 상공업 종사자라는 뜻으로, 다이묘들이 거느린 무사들과 이들이 가세해 에도는 한때 남성 인구가 전체 인구의 70%에 육박했다. 한마디로 에도는 남자들의 도시였던 것이다.
에도의 남자들, 특히 조닌 중에는 가족을 두고 혼자 지방에서 올라와 사는 독신들이 많았다. 이들은 대부분 공사 현장 인근의 목조 연립 주택인 ‘나가야’에서 살았다. 나가야는 한 채의 집을 수평 방향으로 여러 개로 칸막이해서 다가구가 독립적으로 살 수 있게 만든 집으로, 마당에 상수도 시설까지 갖추고 있었지만 급증한 인구로 주거공간이 가구당 5평 남짓으로 매우 비좁았다. 그로 인해 부엌이 있기는 했지만 화재의 위험성 때문에 매 끼니를 해 먹기가 불편하고 위험했다. -329쪽

놀랍게도 같은 시기, 머나먼 이탈리아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이탈리아는 유럽에서 유일무이하게 고유한 국수문화를 가지고 있는 나라로, 중세 유럽 사람들은 이탈리아 사람들, 특히 남부 이탈리아인들을 가리켜 국수를 어마어마하게 많이 먹는 대식가라는 뜻의 ‘만자 마케로니’라고 불렀다. 그런데 나는 이 지점에서 이런 의문들이 생겼다. ‘수많은 유럽인들 중에서 왜 이탈리아인들만이 국수를 먹었을까?’, ‘이탈리아 사람들은 언제부터 국수를 먹기 시작했을까?’, ‘혹시 이탈리아의 국수도 중국 국수문화의 영향을 받은 것은 아닐까?’ 등등.-337쪽

에도시대와 나폴리에 공통적으로 나타난 한 현상에 주목했는데, 바로 국수라는 음식이 중소 상인들, 도시의 육체 노동자들, 서민층에게 각광받는 음식이었다는 점이다. 이는 동서양을 떠나 국수가 인류 최초의 패스트푸드였음을 나타내는 증거가 아닐까.-387쪽

안도 모모후쿠가 개발한 인스턴트라면은 인류의 식생활에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사발이나 젓가락을 사용하지 않는, 면의 문화가 없던 곳에서도 면을 먹게 된 것이다. 즉, 인스턴트 라면으로 인해 면은 인류 공통의 먹거리가 되었다. 실제로 한 통계자료에 따르면 전 세계인들이 지금까지 먹은 인스턴트 라면의 개수는 무려 1,000억 개에 이르고, 현재 지구상의 60억 세계인들이 연간 100억 개에 육박하는 인스턴트 라면을 먹고 있다고 한다. 1년간 세계에서 소비되는 인스턴트 라면을 모아 에펠탑을 지으면 무려 327개를 세울 수 있다. 라면은 인류가 만든 가공식품 중 가장 많이 소비되는 식품으로, 20세기 최고의 발명품이라는 말은 과언이 아니다. -390쪽

인스턴트 라면을 만드는 과정 속에는 2,500년 동안 인류가 고안해내고 발견한 면 제조 방법이 고스란히 녹아 있음을 목격할 수 있다. 인스턴트라면은 밀가루를 물, 소금 등과 적절한 비율로 섞고(배합)→밀반죽을 얇고 평평하게 밀고(압연)→얇게 민 반죽을 자르고(제면)→면을 익히고(증숙)→찬물에 면을 식히고(냉각)→식힌 면을 말리는(건조) 공정을 거쳐 완성된다. 이는 우리 제작진이 국수의 발자취를 따라 전 세계를 누비고 다니던 곳곳에서 만났던 고대 사람들이 창안해 낸 제면법들이었다. 즉, 간편함을 추구하는 현대인의 대표음식인 인스턴트라면 속에 수천 년의 국수 역사가 압축되어 있는 것이다. -39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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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0-06-19 16: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책으로도 나왔었군요. 다큐멘터리 재밌게 봤었어요.
날이 더워도 추워도 국수가 생각나지 않아요? 저는 점심에 냉모밀국수 해먹었어요. ㅎㅎ

마노아 2010-06-19 19:50   좋아요 0 | URL
저는 오늘 점심에 칼국수 먹었어요. 급식 메뉴가 칼국수였거든요.
에어콘 바람으로 추웠는데 딱 좋았어요.
그치만 요새 가장 먹고 싶은 건 콩국수예요.^^

L.SHIN 2010-06-20 12: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이 책, 전에 읽을까 말까..했었는데.
재밌는 것은 동.서양 어느 나라나 국수 문화가 있다는 거에요 ^^

마노아 2010-06-20 16:30   좋아요 0 | URL
국수가 서민 음식으로 보편화되었는데, 지금도 경우에 따라 고가 음식도 되어요.^^
아, 드라마 파스타 참 재밌게 봤는데..^^

BRINY 2010-06-20 13: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거 다큐멘터리 보면 정말로 면이 땡겼어요.

마노아 2010-06-20 16:30   좋아요 0 | URL
이 책 보는 것 보더니 어떤 샘이 다큐가 1편 빼고 너무 실망스러웠다고 막 흥분하셨어요.
저는 안 봐서 대꾸할 수가 없었어요. 그치만 궁금했어요.^^

같은하늘 2010-06-22 00: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국수를 좋아하는 저 TV로 열심히 봤던 기억이...^^
책에도 사진이 잔뜩 실려 있나요? 먹고싶다...

마노아 2010-06-22 08:48   좋아요 0 | URL
책에는 사진이 그닥 많지 않고요, 대략적인 현지 분위기만 담아서 오히려 우중충했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