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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퀴엠 - CJK - 죽은자를 위한 미사
진중권 지음 / 휴머니스트 / 2003년 5월
평점 :
2003년도 출간작이니 제법 시간이 흘렀다. 그러나 과거 어느 시점의 이야기라고 하기엔 지금도 얼굴이 화끈거리고 속이 따끔거린다. 대한민국의 양심불량은 여전히 소화불량 상태다.
미학자여서인지, 확실히 접근하는 관점이나 표현하는 방식이 남다르다. 그러니까 어쨌든 '죽음'에 대해서 이야기하는데, 그걸 해체하고 분해하고 다시 통폐합하는 솜씨가 살벌하게 아름답다. 연상하자면 하얀 거탑의 장준혁 외과 과장같은 솜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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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인과 처남에게 “누가 저 자살 공격을 계획했느냐”고 묻자, 매우 당혹스러워한다. 이제까지 그런 질문은 한 적도, 들은 적도 없었기 때문이다. 이 물음이 없어야 비로소 저들은 조국을 위해 스스로 몸을 던진 호국의 영령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이데올로기는 반드시 던져야 할 질문을 덮어두는 데에서 성립한다. 도대체 저 아이들을 무의미한 자살공격에 몰아넣은 사람은 누구일까? 아직까지도 나는 이 미친 작전을 기안한 자가 누구인지 알지 못한다. 그리고 아마 일본인들도 모를 것이다. 알 필요도 없고, 별로 알고 싶어하지도 않을 것이다. 아니, 알아서는 절대로 안 될 것이다. – 7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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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드시 던져야 할 질문을 덮어두는 일이 얼마나 많던가. 때로는 몰라서, 때로는 알고도 일부러. 그렇게 무심의 테두리를 두르고 자기합리화로 변명을 하다 보면 어느새 거짓된 진실에 스스로 매료되고 말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 무수히 마주치고 있는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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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 자살특공대는 다르다. 가미카제가 ‘영웅’이라면, 이슬람 자살특공대는 ‘순교자’다. 가미카제가 희생으로 제 존재를 ‘완성’하려 했다면, 이슬람 자살특공대는 신에게 바치는 희생의 존재로 제 존재를 ‘포기’하려 한다. 가미카제가 죽음이라는 인간의 한계를 넘는 ‘초인’의 경지로 자신을 끌어올린다면, 이슬람 자살특공대는 한갓 신의 뜻을 실현하는 ‘소도구’로 자신을 끌어내린다. 가미카제가 극단의 ‘우월함’이라는 미학을 실천한다면, 이슬람 자살특공대는 마찬가지의 극단성을 가지고 ‘겸손함’의 도덕을 실현한다. 가미카제가 인간 세계에서 ‘불멸의 명성’을 얻어 영원성에 도달한다면, 이슬람 자살특공대는 자살의 대가로 신으로부터 천상에서 영원한 생명과 낙원을 약속받는다. – 83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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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 자살 특공대와 태평양 전쟁 때의 가미가제 특공대를 비교 분석한 것이 인상적이었다. '대구'는 수사의 가장 기본이되 화려한 효과를 주는 듯하다. 때로 그는 너무 가벼운 인상을 줄 때가 있어 말도 가볍게 들릴 때가 있지만 그저 언어유희로 끝내는 것이 아님을, 말 속에 뼈가 있음을 느끼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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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나다와 멕시코는 아예 미국과 국경을 접하고 있어 대미 의존도가 우리보다 높으면 높았지 결코 낮지는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들 나라는 파병은커녕, 미국의 전쟁에 분명하게 반대의사를 표명했다. 주권 국가로서 타국의 부당한 요구에 제 의사를 표명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 거기서 비롯하는 외교 갈등은 그 후 다시 해결하면 될 일이다. 그런데 왜 우리는 이 당연한 것을 상상조차 하지 못하는 것일까? 바로 거기에 우리 사회가 앓고 있는 정신병 증세가 있다. – 1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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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병 증세. 너무 극적인 표현인지라 속상하지만 그게 사실로 받아들여져서 더 아프다. 조승희 사건 때의 극악 오버가 떠오른다. 미국과 연결만 되기만 하면 알아서 기던 그 근성은 대체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이러니 우리도 모르는 사이 사실은 미국의 마지막 '주'가 이미 된 것은 아닐까라는 상상을 더욱 부채질한다.
당시 대통령은 파병을 결정하였다. 지금도 두고두고 회자되는 그의 실책 중 하나. 궁금하다. 그도 정말 '국익'을 위해서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고 진심으로 믿었던 것인지. 만약 국민들이 더 열심히, 더 힘껏 힘을 모아 절대 반대를 외쳤더라면, 모두가 촛불들고 농성을 했더라면, 국민들이 저리 반대해서 못하겠다라는 번복을 할 수 있었을까? 혹시 그걸 원한 건 아니었을까? 아직도 그에게 남아있는 연민과 설움으로 거는 순진한 기대일까? 물어볼 수 없고 대답을 들을 수도 없는데 목에 컥컥 걸려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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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은 바그다드에 입성했다. 그리고 그 안에 포위됐다. 군사적 싸움의 시기는 지나고, 이제 그들 앞에는 지루한 정치적 싸움이 기다리고 있다. 군사력으로는 압도한 우위를 자랑해도, 사담이 사라진 이상 그들의 정치적 우위를 보장해주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런데 이제부터 그들이 해야 할 싸움은 불행히도 군사적인 것이 아니라 정치적 성격의 것이다. 그들을 환영하는 이는 아무도 없다. 이런 상황에서 그들이 정치적으로 승리하는 유일한 길은 깨끗이 패배하는 것, 즉 이라크의 미래를 이라크인들의 손에 맡기고 조용히 그 땅을 떠나는 것뿐이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을 게다. 때문에 그 정치적 열세를 군사적 우위로 상쇄하면서 그들은 계속 그곳에 머무르려 할 것이다. – 14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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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은 군사적으로 북한과 싸울 생각도 의지도 없으면서 말로는 뭐든 다 할 것처럼 덤볐다. 그의 싸움은 처음부터 정치적이었다. 그의 싸움이 깨끗하게 이기려면 깨끗하게 인정하는 것, 그리하여 깨끗하게 패배하는 것임을, 아마 결코 알지 못할 것이다. 국제적으로 망신을 당하고, 온 국민을 쪼개어 분열 파탄으로 몰아갈지라도.
근대사회에서 개인의 폭력 행사는 금지된다. 사형(私刑)이나 복수할 권리는 인정되지 않는다. 폭력의 권리는 국가에 위임되고, 국가의 폭력 행사는 법의 통제 아래 놓인다. 단순 무식한 중세의 전사(戰士)는 교양과 매너를 갖춘 신사(紳士)가 된다. 전사를 움직이는 것이 명예라면, 신사를 움직이는 것은 이익이다. 이런 이기적인 신사들이 만든 사회에 사는 낭만적인 전사들은 당연히 권태를 느낄 수밖에 없다. 전사들은 자신의 폭력성을 마음껏 발산하고 싶으나, 그 욕망은 사회에 의해 엄격히 통제된다. 이 검열을 피해서 억눌린 폭력의 욕망을 승화하는 방법은 없을까? – 160쪽
그 방법이 있다. 즉 국가가 승인하는 폭력을 통해 개인의 공격 본능을 맘껏 발산하는 것이다. 국가가 승인하는 폭력. 그것이 바로 전쟁이다. – 161쪽
국가라는 이름으로 포장되어 행사되는 무시무시한 폭력 전쟁. 그 폭력을 눈감고, 혹은 암묵적으로 동조하고, 심지어 적극적으로 환영하는 행위들. 우리의 야만성이 무섭고 부끄럽다. 깨닫지 못하는 무지까지. 병들어버린, 상처입은 영혼들이 참으로 많다. 구제할 길도 보이지 않는데...
이 책을 읽는 동안 '죽음'에 대한 미학적 접근에 감탄하고, 미처 알지 못했던 어떤 의미들에 감동도 받았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부끄럽고 슬펐다. 그의 말이 아름답게 가꿔지고 서늘하게 다듬어질수록. 어찌 됐든 그것은 '죽음'에 관한 이야기였으니까. 죽은 자들을 위한 미사는 나의 몫이 아니니, 내 마음은 애도로 채워본다.
덧) CJK는 '진중권'의 약자인가?
다음 번엔 '춤추는 죽음'을 읽고 싶다. 그 전에 네 무덤에 침을 먼저 뱉어야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