짜라투스트라는 자신의 유일한 동시대인은 '시간'뿐이라고 말했다. 그 말이 어떤 맥락에서 나온 것이었는지 지금으로선 가물가물한데, 그가 진실로 고독하고 고독하다는 의미였다면 저 단호한 선언에 담긴 절실한 그 무엇을 감히 짐작할 수 있을 것도 같다. 고독은 빙하와 같다. 빙하처럼 혹독하고 소스라치게 차가운 그것은 아무 때나 소리 없이 녹아내려 연약한 하루를 난감하게 적셔버린다. 고독은 일상의 재해이다.-22쪽
여행자는 행동 하나하나에 온 마음을 담아 집중한다. 세상에서 제일 사소한 일을 최고로 진지하게 해낸다. 나를 둘러싼 시공간에 대한 극진한 예의가 저절로 우러나온다. 여행이 아니라면, 삶은 언제나 나에게 부당한 업신여김을 당해왔다. 하지만 여행지에서는 그 지긋지긋하던 삶이 나를 도발한다. 더 이상 지루하지 않은 척하려고 애쓸 필요가 없다. 나는 졸린 고양이처럼 솔직해진다.-25쪽
카프카의 글은 행간마다 슬픔이 비비적대는 문장들이 마음을 할퀴어서 좋다. 슬픔의 끈질긴 점성은 도리 없이 매혹적이다. 웃음도 뛰어난 미학이지만 안타깝게도 찰나적이다. 오래 가는 것은 슬픔이다. 슬픔에 흠씬 젖었을 때 나는 인생 앞에 고분고분해진다.-34쪽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모든 사람들은 일상 속에서 연기를 한다. 잘 지내는 척, 바쁜 척, 부끄럽지 않은 척, 무관심한 척. 그중의 제일은 뭐니뭐니해도 쿨한 척이다. 먹어치운 밥그릇 개수만큼 노련해진 우리는 있는 그대로 감정을 노출했다간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그 참혹한 결과를 잘 알고 있다. 너무 성급하게 표시한 관심 때문에 망쳐버린 연애. 딱 한 번 진짜 속마음을 이야기했다가 깨져버린 우정 따위. 진심이란 녀석은 땀을 잘 흘린다. 그래서 여차하면 들키기 십상이다.-40쪽
카프카는 "몇 년 동안의 두서없는 생활과 수면 부족이 야기한 질병"인 폐결핵에 걸리게 되고, 끝내 애증의 대상이었던 프라하를 떠나지 못하고 죽었다. 그에게는 삶이 "감탄과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삶에 감탄하기만 하는 사람은 아둔하고, 삶을 두려워하기만 하는 사람은 우울하다. 카프카의 삶은 짧고 국지적이었지만 그 어느 인생보다 강렬했다. 나는 그런 삶을 흠모한다.-80쪽
아는 만큼 더 보인다는 것은 명징한 진실이다. 하지만 나는 그냥 그 순간을 살았다는 것이 중요하다. 무지의 소치로 눈부신 건축과 역사를 상한 우유처럼 미련 없이 포기해야 했지만, 흐리멍덩한 눈빛으로 오직 시간을 앞으로 밀어내기 위해 걷고 또 걸었던 그 시간도 좋았다. 어차피 여행은 각진 다면체 세상을 내맘에 맞게 이리저리 둥글리는 작업이 아닐까. 너무 낯설어서 날카로웠던 세상의 한구석을 내 두 발로 조금 닳게 만들었다면, 그것으로 되었다. 공부 잘하는 법, 연애 잘하는 법은 있어도 여행 잘하는 법은 정의상 성립되지 않는다. 여행에서는 치사한 합리화도 허용된다. 그래서 가장 초라한 여행조차 눈부시게 찬란할 수 있다. 나는 그렇게 믿는다.-86쪽
베네쇼프 역에 내려 2.5km 정도 한적한 오솔길을 걸어가면 코노피쉬테 성이 나온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황태자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이 사라예보에서 암살되기 전까지 아내 소피와 아이들을 데리고 살았던 성이다. 그는 사라예보에 가기 직전에도 이 성에서 독일의 빌헬름 황제를 만나 보스니아 문제를 의논했다고 한다. 페르디난트 대공은 정략결혼이 판쳤던 역사 속에서 보기 드물게 뜨거운 연애질을 결혼으로 성공시킨 인물이다. 이 성은 에드워드 노튼과 폴 지아매티가 주연한 영화 '일루셔니스트'의 배경으로도 등장하는데, 영화 속 황태자는 페르디난트 대공이 아니지만 공교롭게도 여자 주인공 이름은 소피다. -92쪽
페르디난트 대공은 프라하의 한 무도회에서 하급 귀족 집안의 딸인 소피 초텍을 만난다. 말이 좋아 귀족이지 평민이나 다름없었던 모양이다. 소피는 이사벨라 황녀의 시녀 노릇을 했으니 말이다. 두 사람은 사랑에 빠졌지만 신분 차이 때문에 드러내 놓고 연애를 할 수는 없었다. 한번은 대공이 이사벨라 황녀의 집에 머문 적이 있었는데 실수로 테니스 코트에 시계를 떨어뜨리고 갔다. 황녀는 대공이 자기 딸들 중 하나와 사랑에 빠졌다고 착각하고 있었던 터라 당연히 시계 안에 딸의 사진이 들어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어이없게도 그 안에는 시녀의 사진이 들어 있었던 것이다. 황녀가 야생마처럼 길길이 날뛰었음은 물론이다. 결국 두 사람은 우여곡절 끝에 결혼을 하지만, 황실 사람들은 아무도 결혼식에 참석하지 않았다.-93쪽
아시다시피 두 사람은 백년해로하지 못하고 사라예보에서 세르비아 출신 민족주의자의 총알에 유명을 달리한다. 그리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세르비아에 선전포고를 함으로써 전쟁이 시작되고 이 전쟁은 1차 세계대전으로 확대된다. 사실 황태자 부부 암살 사건은 구실에 불과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보스니아와 헤르체고비나를 병합할 때 불만을 품었던 세르비아를 내내 벼르던 중이었고 응징할 기회만 노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외교적으로 사태를 해결하고 싶어했던 세르비아의 노력을 묵살한 것을 보면 제국이 얼마나 전쟁을 원했는지 알 수 있다. 현재 코노피쉬테 성 박물관에는 문제의 그 총알이 전시되어 있다고 한다.-93쪽
페르디난트 대공은 정신세계가 독특한 사냥광이었다. 그가 생전에 죽인 사슴만 해도 5천 마리가 넘는다. 원래 왕위 계승자도 아니었던 사람이 얼떨결에 황태자가 되어 비명횡사한 것을 보면, 엄연한 역사적 사실을 두고 사이비 삼장법사스러운 생각을 안 할 수가 없다. 무분별한 제국주의 야욕으로 인해 자극된 민족주의 감정이 폭발해서 비극적인 사건을 일으킨 것도 일으킨 거겠지만, 혹시 살생을 많이 한 업보로 팔자가 사나워진 건 아닐까. 스코틀랜드 출신 록 밴드 프란츠 퍼디난드의 는 페르디난트 대공의 아내 소피를 위한 노래이다.-94쪽
두브로브니크 구시가지에는 시멘트가 없다. 모든 길에 유서 깊은 돌이 깔려 있다. 목격한 세월을 뻐기지 않는 과묵한 역전 노장들. 따끈따끈한 돌 위를 맨발로 걷는 기분은 자지러지도록 황홀하다. 이미 色을 초월했을 연배의 노인네들이건만, 그들은 점잖게 발바닥을 간질이기도 하고 따끔따끔 찌르기도 하면서 온갖 기교를 다 부린다. 아, 죽어도 좋아. 저절로 그런 말이 새어나온다.-133쪽
나는 강원도에서 책을 읽고, 번역을 하며 살아가고 있다. 시골살이의 몇몇 기쁨 중 하나는 그런 것이다. 우리 집에는 전용 풀장도 없고 멋들어진 정원도 없지만 조금만 걸어 나가면 저절로 순환하여 정화되는 저수지와 자연이 알아서 가꾸는 아름다운 산이 지척에 있다. 꼭 소유해야 맛이 아니다. 언제든 아끼고 즐길 수 있는 것이라면 움켜쥐지 않아도 인감도장 찍어놓지 않아도 그건 내 것이나 마찬가지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산다. 풍수지리에서 배산임수 지형을 길지라고 하는 이유도 뭐 별 거 있겠는가. 등 뒤에는 빛깔 고운 조각보를 두르고 눈앞에는 거울처럼 맑은 세숫물을 받아 놓고 사니, 번잡스러운 마음도 자꾸만 산과 물을 닮으려고 용을 쓴다. 그러다 보면 무슨 일을 하든지 어찌 어찌 되겠지, 언젠가는 순리대로 돌아가겠지, 하는 속 편한 생각이 들기도 한다.-144쪽
그러나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입었다고 해도 목숨이 다하는 날까지 삶은 계속되어야 한다. 유머가 필요한 것은 그 때문이다. 유머는 지우개처럼, 아프지 않을 만큼만 상처를 문질러서 조금씩 희미해지게 만들어주니까.-169쪽
자코메티는 자신을 이해하려면 자신이 나고 자란 곳을 이해해야 한다고 했다. 그 말은 모든 사람에게 해당할 테지만 보스니아의 경우에는 특히나 더 그렇다. 진정한 존중은 '이해'에서 나온다. 그리고 이해는 '관심'에서 나온다.-170쪽
내가 생각하는 느리게 살기란 결국 덜 생산하는 삶이다. 재화와 용역을 덜 생산하면 필연적으로 폐기물과 스트레스도 덜 생산된다. 조금 덜 생산하고 덜 성장한다고 세상에 어떻게 되지 않는다. 그렇게 해서 번 시간을 개인적으로 가치 있는 일들에 사용한다면, 그것이 '슬로우 라이프'의 진심이 아닐까.-184쪽
나무의 여신이 초록색 물이 뚝뚝 떨어지는 속곳을 오래오래 담갔다가 건져낸 듯 한없이 투명하면서도 푸른 물 빛깔. 슬로베니아는 '동유럽의 스위스'라고도 불린다. 나라의 절반 이상이 숲인 나라이다. 유럽에서 핀란드, 스웨덴에 이어 세 번째로 숲이 많은 나라라고 하니 대충 어느 정도인지 알 만하다. -199쪽
블레드 호수는 보힌 빙하의 후퇴 작용으로 형성되었는데 환경보호 차원에서 엔진으로 구동되는 배의 운행을 금지하고 있다. 소중한 것을 지키려면 이 정도 까탈은 부려야 한다.-221쪽
혹시라도 살다 살다 이제는 사는 게 너무 재미없어서 아이 키우는 재미라도 있어야겠다 싶어진다면, 늙어감에 대한 공포와 권태를 잊게 해줄 뭔가가 절실해진다면, 그때는 태어나버렸지만 갈 곳 없는 아이를 데려다 키우고 싶다. 아이의 엄마가 아니라, 이모 혹은 고모가 되고 싶다. 끈끈한 건 됐고, 말이나 통하면 좋겠다. 의무로 묶이기보다 우정으로 엮일 수 있는 사이면 더 바랄 게 없겠다.-225쪽
그래도 나는 9시 이후에 알코올을 팔지 않는 이 깐깐한 동네가 맘에 든다. 그 시간 이후로는 묽은 위로를 팔지 않으니 책을 읽든 정사를 나누든 다른 길을 알아보라고 딱 부러지게 말하는 태도가 미더운 것이다. 허튼 기대를 버리면 인생은 조금 더 수월해진다.-232쪽
조로아스터교에서는 불을 가장 중요시하지만 공기, 흙, 물도 더럽히지 않는 것이 원칙이다. 그래서 화장, 토장, 수장 대신 새가 사체를 쪼아 먹도록 내버려두는 조장을 행한다. 조로아스터교 신자, 즉 '파시'들이 세상을 떠나면서 가장 마지막으로 쌓는 공덕이 바로 새에게 시신을 내주는 것이라고 한다.-26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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