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명의 안식처, 이집트로 가는 길
정규영 지음 / 르네상스 / 200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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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이집트 왕가의 결혼을 살펴보면 근친결혼의 측면 외에 한가지 더 흥미로운 사실이 있다. 그것은 파라오의 왕권은 왕비 우선 순위 1위와 결혼하고 있는 동안에만 정통성을 가진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파라오는 그의 왕비가 생존해 있는 경우에 한해 파라오로서 군림할 수 있었다. 이 때문에 파라오는 혈족에 상관없이 가족내 왕비 서열에 들어 있는 모든 여자와 미리 결혼하려고 하였다. 그렇게 함으로써 왕비가 먼저 죽을 경우 발생할지도 모를 원치 않는 퇴임을 막을 수 있었던 것이다.
왕권의 모계 상속을 나타내는 한가지 예가 람세스 2세이다. 람세스 2세는 자기 딸들은 물론, 심지어 자신의 어머니와도 결혼했다. 이와같은 결혼은 왕가의 피를 순수하게 하려는 의도 외에, 왕위의 굳건한 유지라는 측면에서 볼 수 있을 것이다. 만약에 왕위의 계승이 모계 상속이 아닌 남성 위주로 이루어졌다면, 구태여 여동생이나 자신의 딸, 자신을 낳아준 어머니와 결혼하려고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41쪽

우리가 잘 아는 클레오파트라의 결혼만 해도 그렇다. 처음에 클레오파트라는 자신의 큰오빠와 결혼한다. 바꾸어 말하면, 클레오파트라의 큰 오빠는 클레오파트라와 결혼함으로써 왕권을 계승한 것이 된다. 오빠가 죽자 클레오파트라는 다시 남동생과 결혼한다. 남동생은 클레오파트라와 결혼함으로써 왕권을 상속받을 수 있었다.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이집트를 침공했을 때, 그가 이집트 왕위를 합법적으로 계승하여 통치자로 인정받을 수 있는 방법도 역시 클레오파트라와 결혼하는 길이었다. 로마에 결혼한 아내가 있었던 안토니우스 역시 왕권을 이어받기 위해서는 클레오파트라와 결혼할 수밖에 없었다. -42쪽

왕권을 장악한 하트셉수트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여자는 파라오가 될 수 없다는 수천 년의 전통을 깨고, 공식석상에서 남장을 했으며 파라오의 가짜수염을 붙였다.
대 이집트 제국의 실질적인 파라오가 된 하트셉수트 여왕은 애절한 사랑을 한 파라오로도 기록을 남기고 있다. 그녀가 파라오 재위기간 중 유일하게 사랑한 사람은 '이집트의 왕관없는 파라오'라고 불렸던 신전 건축가 센무트였다.
...
건축가 센무트는 여왕의 명령에 의해 장제전을 건축하면서 하트셉수트 여왕의 무덤 옆에 자신의 비밀 무덤을 설계하였다고 한다. 비록 그의 비밀 계획이 사전에 누설되어 실패로 끝났지만, 죽어서라도 사랑하는 사람 곁에 가까이 있고 싶어한 그의 소망이 바로 여왕 자신의 소망이었던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을 것이다. -43쪽

현대 건축 공학자들은 100년에 15cm 정도가 침강하는 땅이라면 사무 빌딩용 건물 부지로 적합하다고 말하고 있다. 가령, 미국의 국회의사당은 지난 200년 동안 12cm 정도 침강하였다. 그런데 약 63억 kg이나 나가는 대피라미드는 5천년 동안 불과 1.25cm 밖에 가라앉지 않았으며, 더구나 피라미드가 위치한 기초 부분은 지진과 지반운동에 가장 영향을 덜 받는 지역이다.
...
1992년 10월 이집트에 강도 6도의 지진이 발생한 적이 있었다. 약 400명의 사망자와 만여 명의 부상자가 발생하고 수백 채의 가옥과 콘크리트 건물이 한 순간에 무너진 엄청난 지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피라미드가 입은 피해는 하나도 없었다. 나중에 TV에서 지진 발생 당시 피라미드 속에 들어가 구경을 했던 관광객과 인터뷰하는 장면이 방영되었는데 그 사람들은 피라미드가 약간 흔들리는 것만 느꼈을 뿐이라고 말했다.-152쪽

기원전 2,600년 무렵은 아직 철기 시대 이전이므로 이집트인들이 가진 연장 중에 가장 강한 것은 청동연장이었을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집트에는 대피라미드를 건설하기에 적합한 연장이나 도구가 거의 없었다. 청동연장을 사용했다 해도 채석장에서 2.5톤에서 10톤에 이르는 돌을 청동정을 이용해 오차가 없이 자르고 다듬는 일을 하기에는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특히 왕묘실에 있는 무게가 40톤까지 나가는 화강암들을 청동 연장을 사용하여 다듬는 일은 불가능한 일이다.
또 석조 블록 하나를 캐고 다듬고 이동하고 제자리에 놓는 데 평균 1시간이 걸린다고 가정하고, 하루에 10시간을 일한다고 한다면 하루에는 10개의 블록을, 1년에는 3,650개의 블록을 샇을 수 있다. 그러나 그런 속도라면 쿠푸 왕의 피라미드를 쌓는 데 걸리는 시간은 헤로도토스가 말한 대로 30년이 아니라 약 715년이 되어야 한다.

-153쪽

20년 동안 250만 개의 돌로 대피라미드를 건설하였다는 역사학자 헤로도토스의 말을 여과없이 받아들인다 해도 우리는 여전히 어떻게? 라는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다. 피라미드 건설에 사용한 돌의 운반 방법으로 많은 학자들이 믿고 있는 것은 이른바 '굴림대론'이다. 굴림대 역할을 하는 통나무 위에 무거운 돌을 올려놓고 앞에서 인부들이 밧줄을 이용하여 끌었다는 것이다.
다음으로 '경사론'이 있다. 피라미드의 높이가 높아질수록 옆에 제방을 비스듬히 쌓아 그 둑길로 돌을 운반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이론들은 무엇보다도 피라미드를 건설하는 데 무한한 인력의 공급을 가정하고 있다는 점을 모순으로 꼽을 수 있다.
-153쪽

현대 공학의 이론을 빌리면 무게 2.5톤~15톤짜리 석조 블럭 하나를 옮기기 위해서는 약 150명 정도의 사람이 필요하다고 한다. 그러므로 헤로도토스의 말대로 20년 동안 250만 개의 돌을 운반했다면 하루 평균 1,400개의 돌을 운반해야 했을 것이고, 한 블럭당 150명의 남자가 매일 네 차례 왕복했다고 가정하면 52,500명의 남자가 동시에 작업을 해야 한다. 그러나 52,500명의 장정들이 20미터도 채 되지 않는 넓이의 길 위에 꽉 들어찬 채 돌을 나르는 일이 가능했을까? 이에 대한 답변은 분명 '아니다'이다.
돌을 굴리는 데 필요한 통나무 역시 구하기가 힘들었을 것이다. 당시 이집트에서 자라는 나무로 대표적인 것은 대추야자 나무였는데, 이집트인들이 주 식량원이던 이 나무를 단순히 돌을 나르기 위해 잘랐을 리 만무하다. 이 나무들을 레바논 등과 같은 해외에서 수입을 했다고 쳐도 엄청난 무게의 바위에 눌린 나무들이 부서져 버릴 가능성은 여전히 남아 있다.

-154쪽

지금까지 이야기한 대로 고대 이집트인들은 피라미드 건설 당시 단단한 돌을 다듬을 수 있는 연장을 가지고 있지 않았고, 헤로도토스가 말한 기간 안에 피라미드를 완성시킬 수 있는 노동력이 없었으며, 돌을 운반하는 일이 산술적으로나 방법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점의 세 가지 이유 때문에 "피라미드는 여전히 신비에 싸여 있다"고 말한다.-154쪽

대피라미드의 외계인 건설 주장을 뒷받침하는 또 하나의 증거가 있다. 그것은 방사선 탄소동위원소 측정방법에 의해 대피라미드가 피라미드의 초기 형태라고 알려진 조세르 왕의 계단식 피라미드보다 최소한 450년은 먼저 건설되었음이 밝혀졌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대피라미드가 이집트에서 건설된 7번째나 8번째 피라미드가 아니고 가장 먼저 세워진 피라미드라는 것이다. 따라서 그 후에 지어진 작은 피라미드들은 대피라미드를 모방한 것들이며, 결국은 피라미드 건설에 실패한 것들이 된다.
그럴 경우 우리는 다음과 같이 생각해 볼 수도 있지 않을까? 즉, '외계인(화성이나 기타 행성에서 온)들이 기자에 최초로 대피라미드를 건설했다. 그 후에 이집트인들이 이 피라미드를 모방하려고 90여 차례 시도하였으나 모두가 실패로 끝났다.'라고 말이다. 너무 비약시킨 결론인 듯싶지만 이집트의 수도 이름인 카이로가 '화성(카히라)'과 관계가 있는 것도 새로운 각도에서 설명할 수 있지 않을까? 의구심은 또 다른 의구심을 낳는다.-155쪽

발견 당시 이 태양선은 땅 속에 매장되어 있었는데 무덤에 넣기 위해 완전히 분해되어 있던 상태였다. 나무의 재질은 레바논 삼나무였으며 생전에 실제로 파라오가 사용했던 배를 부장품으로 묻은 것임이 밝혀졌다. 신기한 것은 이 배를 만드는 데 단 하나의 쇠못도 사용하지 않았으며 나무와 나무는 구멍을 뚫은 후 전부 끈으로 묶어 만들었다는 점이다.-156쪽

수천 년 동안 미소를 머금은 스핑크스가 바라보는 방향은 동쪽이다. 고대 이집트인들의 신앙에서 '동쪽'이 갖는 의미는 단순한 방향의 의미를 훨씬 뛰어 넘는 것이다. 고대 이집트인들에게 해가 뜨는 동쪽은 흔히 생명과 부활의 세계와 동일시되는 반면 서쪽은 죽음의 세계를 나타낸다. 이집트의 모든 피라미드가 전부 서쪽에 위치하고 있는 것이 바로 이 때문이다.
-159쪽

콥트교의 십자가는 우리의 십자가와는 달리 특이하게도 네 끝 부분이 손가락처럼 세 갈래로 갈라진 모양이다. 세 갈래 갈라진 부분은 각각 성부, 성자, 성신의 성삼위일체를 나타낸다고 한다.-174쪽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일생동안 자신의 이름을 딴 60여 개의 도시를 건설한 것으로 유명한데, 불행하게도 대왕 자신은 살아 생전에 이 알렉산드리아를 보지 못했다.-232쪽

알렉산드리아의 쇠퇴는 경제적인 이유로 인해 알렉산드리아 주민들과 로마의 황제 사이에서 빈번히 불화가 발생함으로써 시작하였다. 콘스탄티노플 대제는 알렉산드리아의 대안으로 급기야 자신의 이름을 딴 새 도시를 건설하는데 이 도시가 지금의 터키 이스탄불, 콘스탄티노플이다. 알렉산드리아는 이제 지중해 연안에 또 하나의 경쟁도시를 갖게 된 것이다. -234쪽

알렉산드리아의 쇠퇴를 가속화시키는 데는 자연도 한몫을 하였다. 세월이 흐르면서 나일강의 흐름에 변화가 일어난 것이다. 푸스타트에서 두 갈래로 갈라지는 나일강의 두 지류 중 서쪽 지류는 원래 알렉산드리아를 거쳐 지중해로 흘러갔다. 그러나 이 지류가 물길을 약간 동쪽으로 틀어 알렉산드리아가 아닌 로제타를 통해 바다로 흘러가게 된 것이다.
...
설상가상으로 알렉산드리아는 중세 유럽의 십자군 전쟁 때 공격을 받아, 나폴레옹이 1798년 그의 군대와 함께 도착했을 때는 약 4천 명 정도의 주민이 사는 가난한 어촌으로 전락해 있었다.-235쪽

로제타석의 발견으로 학자들이 가졌던 기대와 흥분은 잠깐, 아부 키르해전에서 영국의 넬슨 함대에게 대패한 나폴레옹은 영국 함대의 포위망을 뚫고 단신으로 본국에 귀환했다.
프랑스군의 패배와 함께 영국은 이집트를 점령하고 프랑스인들이 발견한 로제타석도 전리품으로 획득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프랑스인들은 로제타석의 복사본을 만들어 놓았기 때문에 상형문자의 해독작업은 그 후 영국은 물론 프랑스와 기타 유럽 국가들에서 행해질 수 있었다. -259쪽

나세르에 따르면 영국은 이집트의 44% 지분마저 빼앗아 갔다. 운하의 소득은 1955년에 3500만 영국 파운드, 즉 1억 달러였는데 그 중에서 이집트가 챙긴 돈은 어이없게도 3백만 달러로 불과 3%에 불과했다.영국은 이집트로부터 매년 1억불을 가져갔지만 향후 5년 동안 이집트에 대한 원조액으로 고작 7천만 달러만을 책정해 놓고 있었다. -27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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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10-02-11 01: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밑줄긋기만 봐도 굉장한 정보가 들어 있는 책이네요.
마노아님이 이런 곳을 다녀왔다는 얘기고...^^

마노아 2010-02-11 01:38   좋아요 0 | URL
하핫, 결국 그런 얘기가 되네요.^^;;;

카스피 2010-02-11 10: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넘 부럽습니다^^

마노아 2010-02-11 18:10   좋아요 0 | URL
아직 오지 않은 카스피님의 멋진 여행이 기다리고 있을 거예요!

gimssim 2010-02-11 14: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일정 땜에 이집트를 스쳐지나가듯 했는데 책을 보니 좀 꼼꼼히 공부하고 다시 가보고 싶네요.
역시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이 맞아요.

마노아 2010-02-11 18:10   좋아요 0 | URL
저도 더 많이 공부하고 가지 못한 게 후회되었어요.
그래도 모자란대로 만족하려고 해요.^^

2010-02-11 17: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2-11 18: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2-11 21: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2-12 00: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2-12 17: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2-12 18:22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