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장호에서
얼어붙은 호수는 아무것도 비추지 않는다 불빛도 산 그림자도 잃어버렸다 제 단단함의 서슬만이 빛나고 있을 뿐 아무것도 아무것도 품지 않는다 헛되이 던진 돌멩이들, 새떼 대신 메아리만 쩡 쩡 날아오른다
네 이름을 부르는 일이 그러했다-13쪽
밀물이 내 속으로
쌓고 또 쌓고 쌓는지도 모르고 쌓고 싸는 것의 허망함을 알면서 쌓고 어디까지 갈 수 있나 오기로 쌓고 이것도 먹고사는 일이라고 말하며 쌓고 부끄럽다 얼굴 붉히면서도 쌓고 때로 공허함이 두려워서 쌓고 지우지 못해 끊지 못해 쌓고 바닥도 끝도 없음을 쌓고 또 쌓다가
어느 날 내가 쌓은 모래성이 밀물을 불러왔다-58쪽
이끼
그 물들 그냥 흘러간 게 아니었구나
닳아지는 살 대신 그가 입혀주고 떠나간
푸른 옷 한 벌
내 단단한 얼굴 위로 내리치며 때로 어루만지며 지나간 분노와 사랑의 흔적
물 속에서만 자라나는 물 속에서만 아프지 않은
푸른 옷 한 벌-64쪽
速離山에서
가파른 비탈만이 순결한 싸움터라고 여겨온 나에게 속리산은 순하디순한 길을 열어 보였다 산다는 일은 더 높이 오르는 게 아니라 더 깊이 들어가는 것이라는 듯 평평한 길은 가도 가도 제자리 같았다 아직 높이에 대한 선망을 가진 나에게 세속을 벗어나도 세속의 습관은 남아 있는 나에게 산은 어깨를 낮추며 이렇게 속삭였다 산을 오르고 있지만 내가 넘는 건 정작 산이 아니라 산 속에 갇힌 시간일 거라고, 오히려 산 아래서 밥을 끓여 먹고 살던 그 하루하루가 더 가파른 고비였을 거라고, 속리산은 단숨에 오를 수도 있는 높이를 길게 길게 늘여서 내 앞에 펼쳐주었다-69쪽
부패의 힘
벌겋게 녹슬어 있는 철문을 보며 나는 안심한다 녹슬 수 있음에 대하여
냄비 속에서 금세 곰팡이가 피어오르는 음식에 나는 안심한다 썩을 수 있음에 대하여
썩을 수 있다는 것은 아직 덜 썩었다는 얘기도 된다 가장 지독한 부패는 썩지 않는 것
부패는 자기 한계에 대한 고백이다 일종의 무릎 꿇음이다
그러나 잠시도 녹슬지 못하고 제대로 썩지도 못한 채 안절부절, 방부제를 삼키는 나여 가장 안심이 안 되는 나여-7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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