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곳이 멀지 않다
나희덕 지음 / 문학동네 / 2004년 5월
구판절판


천장호에서

얼어붙은 호수는 아무것도 비추지 않는다
불빛도 산 그림자도 잃어버렸다
제 단단함의 서슬만이 빛나고 있을 뿐
아무것도 아무것도 품지 않는다
헛되이 던진 돌멩이들,
새떼 대신 메아리만 쩡 쩡 날아오른다

네 이름을 부르는 일이 그러했다-13쪽

밀물이 내 속으로

쌓고
또 쌓고
쌓는지도 모르고
쌓고
싸는 것의 허망함을 알면서
쌓고
어디까지 갈 수 있나 오기로
쌓고
이것도 먹고사는 일이라고 말하며
쌓고
부끄럽다 얼굴 붉히면서도
쌓고
때로 공허함이 두려워서
쌓고
지우지 못해 끊지 못해
쌓고
바닥도 끝도 없음을
쌓고
또 쌓다가

어느 날
내가 쌓은 모래성이 밀물을 불러왔다-58쪽

이끼

그 물들
그냥 흘러간 게 아니었구나

닳아지는 살 대신
그가 입혀주고 떠나간

푸른 옷 한 벌

내 단단한 얼굴 위로
내리치며 때로 어루만지며 지나간
분노와 사랑의 흔적

물 속에서만 자라나는
물 속에서만 아프지 않은

푸른 옷 한 벌-64쪽

速離山에서

가파른 비탈만이
순결한 싸움터라고 여겨온 나에게
속리산은 순하디순한 길을 열어 보였다
산다는 일은
더 높이 오르는 게 아니라
더 깊이 들어가는 것이라는 듯
평평한 길은 가도 가도 제자리 같았다
아직 높이에 대한 선망을 가진 나에게
세속을 벗어나도
세속의 습관은 남아 있는 나에게
산은 어깨를 낮추며 이렇게 속삭였다
산을 오르고 있지만
내가 넘는 건 정작 산이 아니라
산 속에 갇힌 시간일 거라고,
오히려 산 아래서 밥을 끓여 먹고 살던
그 하루하루가
더 가파른 고비였을 거라고,
속리산은
단숨에 오를 수도 있는 높이를
길게 길게 늘여서 내 앞에 펼쳐주었다-69쪽

부패의 힘

벌겋게 녹슬어 있는 철문을 보며
나는 안심한다
녹슬 수 있음에 대하여

냄비 속에서 금세 곰팡이가 피어오르는 음식에
나는 안심한다
썩을 수 있음에 대하여

썩을 수 있다는 것은
아직 덜 썩었다는 얘기도 된다
가장 지독한 부패는 썩지 않는 것

부패는
자기 한계에 대한 고백이다
일종의 무릎 꿇음이다

그러나 잠시도 녹슬지 못하고
제대로 썩지도 못한 채
안절부절,
방부제를 삼키는 나여
가장 안심이 안 되는 나여-7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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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10-01-17 21: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희덕 시집을 읽으면 정말 쩡~ 하고 울리는 시가 많아요.

마노아 2010-01-18 00:01   좋아요 0 | URL
어느 분이 올렸던 시가 좋아서 시집을 샀더랬는데, 역시 좋은 시가 많더라고요. 쩡~하는 울림!

꿈꾸는섬 2010-01-17 23: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두요. 나희덕 시집...마음이 쩡~~~해요.

마노아 2010-01-18 00:01   좋아요 0 | URL
이분 시집을 또 구입해야겠어요. 너무 좋네요.^^

같은하늘 2010-01-18 18: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보관함으로...

마노아 2010-01-18 20:36   좋아요 0 | URL
제가 밟았던 수순을 그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