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백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18
미나토 가나에 지음, 김선영 옮김 / 비채 / 2009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봄방학을 앞둔 종업식 날, 담임 교사는 그날이 자신의 교직 인생 마지막 날이라고 선언하면서 아이들에게 작별 인사를 한다. 그녀는 차분한 목소리로 자신이 어떻게 해서 교직 생활을 하게 되었는지를 얘기했고, 왜 싱글맘으로 살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도 간략하게 설명했다. 그랬다. 그녀는 싱글맘이었다. 한 달 전까지.  

그녀의 딸은 네 살. 일주일에 단 하루, 회의 때문에 늦게 끝나는 수요일에만 학교 양호실에 아이를 맡긴 채 일을 했는데, 그 날 사고로 아이가 죽어버린다. 수영장에 빠져서 익사했던 것. 그런데, 그게 다가 아니었다고 그녀가 선포한다. 자신의 딸은 살해되었다고. 바로 이 곳, 이 학급의 학생들에 의해서. 

그렇게, 시작했다. 첫번째 고백을 한 사람은 사랑하는 딸을 잃은 가엾은 엄마이기도 한 희생자의 유가족부터였다. 그녀는 범인이 누군지도 알고 있고, 범행도 자백 받았지만 경찰이 발표한 그대로 딸의 죽음은 '사고'로 남겨두겠다고 단언한다. 그녀가 성직자와 같은 경건한 마음으로 그런 결정을 내린 것일까? 잘못된 길로 들어선 중학교 1학년 학생의 앞길을 갱생의 차원으로 인도하고자 하는 교직자의 마음으로 그리 했을까? 아니다. 모두 아니다. 그녀는 법의 심판이 아닌 私적인 심판을 원했던 것이다. 미성년자라는 이유 때문에 법적 제재조차 당하지 않는, 그것을 악용해서 더 사악해지는 어린 범죄자를 향해 그녀 나름의 통렬한 복수를 기획한 것이다.  

마치 짧은 단편처럼 그렇게 한 챕터가 끝이 난다. 이제 다음 화자로 넘어가 보자. 두번째는 학급의 반장이다. 2학년이 되어서 새로운 담임선생님을 만났지만, 초짜이면서 동시에 너무도 열혈 청년인 까닭에, 오히려 긁어부스럼 만들기 일쑤인 이 선생님으로 인해 겪게 된 갈등과, 선생님의 사임 이후 벌어진 학급 내의 일들이 이 소녀의 입을 통해서 전달된다. 그렇지만 이 친구 역시, 정상은 아니다. 상식 수준에서 이해되지 않는 아이들의 언행, 그리고 엄포. 입이 딱 벌어진다.  

세번째 화자는 두 명의 살해자 중 한 녀석의 누나다. 사건의 전개 과정을 얘기하는 건 누나지만, 사실은 그녀의 엄마다. 엄마의 일기장 기록을 통해서 그 사이 벌어졌던 일들의 진행 과정이 다시 적나라하게 설명된다. 자기 자식만을 위하는, 왜곡된 애정을 가진 어머니의 지독한 사랑이 불편하지만 익숙한 구도로 전개된다. 이런 어머니들을, 우리는 곧잘 보게 된다. 우리의 주변에서, 혹은 자신의 집에서도. 

네 번째는 살해자 중 한 녀석, 그리고 다섯 번째는 또 다른 살해자의 차례다. 이들의 관계는 좀 복잡하다. 실제로 살해 계획을 세운 녀석과, 살해 행위의 직접적인 가해자가 어긋났다. 두 사람의 조합이 아니었다면 아이는 죽지 않았을 터인데, 최악의 만남으로 아이는 죽었고, 그 후 또 다른 사람들이 어긋난 인과 관계로 죽게 된다. 가해자와 피해자가 겹치면서 증오와 복수의 악순환이 반복된다.  

마지막 화자는 다시 첫번째 얘기를 꺼냈던 퇴직 선생님으로 돌아간다. 그녀가 준비했던 복수극이 어떻게 망가졌고, 그것을 다시 어떻게 일으켜 세우는 지에 대한 설명이 나온다. 이 모든 이야기들은 전부 각 화자들의 '고백'을 통해서 진행된다. 성직자/순교자/자애자/구도자/신봉자/전도자... 라는 소제목을 달고서. 

작품은 독자를 끌어들이는 엄청난 힘을 지녔다. 점점 더 커지는 검은 구멍이 읽고 있는 동안 독자를 삼킬 것만 같은 착각을 느끼게 해서 순간순간 흠칫흠칫 놀라게 만들었다. 억울한 죽음을 당한 딸 아이, 반성하지 않는 가해자들. 어미된 자로서 느끼는 그 절망감과 분노를 어찌 삭히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녀가 가했던 복수는 일견 통쾌해 보이기까지 했다. 그러나, 뒷맛은 씁쓸하다. 누구든 사적인 복수를 자유롭게 할 수 없을 뿐더러, 그 과정에서는 필연적으로 또 다른 희생을 불러오게 한다. 복수 뒤의 허망한 마음 역시 그렇다.  

일본을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이 이야기는 굳이 국적을 중요한 바탕으로 삼지 않는다. 등장하는 각각의 인물들은 모두 이기심이 극에 달해 있었다. 그들은 자신만 사랑했고, 자신 이외의 사람을 보지 못했다. 자신이 잘못한 일은 생각지 않고 야단 맞은 것에 대한 분노로 엄한 복수극을 준비했고, 자신을 떠난 엄마가 자신을 찾아오게 만들려고 흉악한 범죄의 주인공이 되고자 했고, 자신이 세운 '성공'의 기준에서 너무도 멀어진 아들을 견뎌내지 못하고 서로를 '실패자'로 묶어서 죽으려고 한 못난 어미도 있었다. 안타깝게도, 그들은 모두 자신의 상처만, 자신의 분노만 들춰내고 감당하려고 했지 다른 사람을 보지 못했다. 비정상적으로 뻗은 제 분노로 인해 해를 입은 사람들에 대한 일말의 미안함과 사죄가 없다. 진심이 담긴 사죄가 우선했다면, 반성이 먼저 따라왔더라면, 딸을 잃은 선생님이 그렇게 사적인 복수를 계획하고 실행에 옮겼을까.  

괴물같은 이기심들이었다. 처음엔 모두가 가질 법한 못나고 부족한 마음의 한 덩어리였을 뿐인데, 그것들이 공교롭게 뭉치면서 최악의 시나리오로 치달았다. 그것을 멈춰낼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누구라고 완전한 사람이겠는가. 모두가 부족한 부분들을 안고 그것들을 다듬어가며 채워가며 살아가야 마땅한 것인데, 현대사회의 전형적인 캐릭터로 표현된 이 사람들은 도통 갱생의 여지가 보이질 않는다. 현실에서 일어났다고 해도 하나 이상하지 않을 것 같은 이야기의 소설. 그 사실을 인식하는 순간, 소름이 돋는다.  

희생자이자 결과적으로 가해자가 된 그 선생님을 손가락질 하기 힘들면서도, 동의할 수 없는 딜레마가 답답하다. 무엇보다도 복수의 장에 또 다른 학급 아이들을 참가시킨 것에 한숨을 쉬게 된다. 당신은 차분했고, 냉정했고, 또 똑똑하기 그지 없었지만, 그래도 그건 성숙한 선택은 아니었어요... 딸을 잃은 당신에게 '성숙'을 기대하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지만..... 

뉴스를 장식하는 범죄 소식들은 나날이 사악해지고, 범죄자의 연령대는 더 어려지고, 법의 효과는 더 미미해지는 것만 같다. 계속해서 쌓이는 불신의 고리. 범죄를 잉태하고 키워가는 음습한 이 사회. 충분히 재밌고 탁월한 소설을 읽었음에도 뒷맛이 씁쓸한 까닭이 여기에 있다. 어떤 답도 줄 수 없고, 어떤 마무리도 개운할 수 없는 불편함이 계속 남는다. 우리는 참으로 편리하고 놀라운 세상을 살고 있지만, 동시에 지극히 무섭고 불안한 세상을 살고 있다는 자각이...... 2012년이면 인류가 거의 절멸할 것이다... 라는 예언보다도 더 끔찍하다.  

덧글) 이 작품은 작가의 첫번째 소설이라고 한다. 이토록 매끄럽고 유려한, 게다가 긴장감 넘치는 작품이라니... 그야말로 슈퍼 루키가 아닌가! 작가의 다음 작품도 빠르게 번역되어 나올 듯하다. 다시 또 불편해질 수 있지만, 그래도 기대가 되는 것도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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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09-11-15 13: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법이 사실 피해자 가족의 마음을 위로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죠.

마노아 2009-11-16 00:09   좋아요 0 | URL
법이 위로해주기까지는 바라지 않더라도 공정하게 적용이라도 된다면 좋겠어요.
웃긴 사례까 너무 많잖아요..;;;;

antitheme 2009-11-17 12: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평을 읽고나니 꼭 읽고 싶다는 생각이 드네요. 법이란데서 인간미를 느끼는 걸 포기해야 하는 생각도 듭니다. 가해자와 피해자의 인권을 존중하는 방법이 존재하나 하는 회의가 들 때도 있구요...

마노아 2009-11-17 16:24   좋아요 0 | URL
법을 만들고 적용하고 활용하고 악용하는 것 모두가 인간이라고 생각하면, 역시 모든 문제의 시작은 인간인가... 회의가 들기도 하구요. 성선설까진 아니더라도 성악설은 맞지 않다면 좋겠어요.

노이에자이트 2009-11-17 16: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청소년 범죄 증가율보다 노인들이 저지르는 강력범죄 증가율이 더 높다네요.저는 어린 소녀만을 강간해 죽이는 노인 연쇄살인범 이야기도 나올 거라고 봅니다.

마노아 2009-11-17 16:49   좋아요 0 | URL
뉴스에서 심심치 않게 나오는 대목들이지요. 분명 이미 나왔거나 앞으로 나올 거예요.ㅜ.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