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일에 뮤지컬 영웅을 예매했던 건 순전히 가격 때문이었다. 그 날을 앞뒤로 해서 딱 일주일만 A석을 1만원에 팔았던 것이다. 공연장은 엘지 아트센터. 엘지 아트센터는 3층에서 보더라도 시야를 별로 가리지 않는 무대다. 다만 배우들의 얼굴이 작게 보일 뿐. 류정한을 좋아하긴 하지만, 그가 얼굴형 배우라고 생각하진 않기 때문에 크게 아쉽지 않았다.
8시 시작과 10시 40분 끝이라는 건 상당히 부담스러운 일정이었다. 다음 날은 놀토도 아니었고. 게다가 역삼역. 부도덕한 체력을 자랑하는 내가 감당하긴 좀 벅찼는데, 아니나다를까 눈에 힘을 무지 주면서 버텨야 했다. 그러고 보니 2년 전인가 같은 장소에서 역시나 류정한 주연의 '스위니 토드'를 보면서 무진장 졸았던 기억이 난다. 극이 재미 없었던 것도 아니고, 자리도 훌륭했건만(비쌌건만!) 내내 졸다가 나왔던 그 기억을 되새기며 주구장창 물을 마시며 버텼다.
보통 연극이나 뮤지컬은 월요일 공연을 쉬는 것을 원칙으로 하지만, 10월 26일 월요일이 바로 안중근 의사 의거일이기 때문에 이례적으로 월요일에 공연을 오픈했다. 영화 도마 안중근이 실패했었던 것을 떠올리면서 너무 무거운 주제가 아닐까 지레 걱정이 되기도 했는데, 극을 다 보고 나니 기우일 듯하다. 이 뮤지컬, 재밌고도 감동적이다. 손수건, 준비하시라.
난 워낙 류정한을 좋아해서 이 사람 캐스팅만 눈독을 들였는데 정성화씨가 더 유명한 건가? 이름이 먼저 나오는 경우를 더 많이 본 듯하다.
내가 본 날은 류정한이 안중근 의사를, 그리고 안중근 의사에게 거사 계획을 잡을 수 있게 이토의 행적을 알려준 궁녀 설희 역을 김선영 씨가, 안중근을 사모하는 중국 아가씨 링링을 소냐가 연기했다.
시작할 때 일곱 발의 총성이 울리면서 스크린에 총구멍 일곱 개가 북두칠성의 모양을 만들었다. 본명은 응칠. 점 일곱 개가 이룬 북두칠성의 모양 때문이라고 했다. 그리고 그 일곱 발은 이토를 향해 그의 총구멍에서 쏘아진 불덩어리이기도(이토에게 명중된 것은 세 발).
숲 속에서 단지 동맹을 맺고 나라 위해 싸울 것을 다짐하는 동지들. 명성황후의 마지막 모습을 기억하는 궁녀 설희는 일본으로 건너가기로 결심하고 안중근과 인사를 한다. 안중근이 자신을 소개하는 대사가 인상적이었다.
나는
대한제국 의병군 참모중장
안중근이오.
일단 배우가 목소리가 좋기 때문에 울림도 좋은 거지만, 저 말을 하는 사람을 안중근 의사라고 생각하니 짧은 대사로도 울컥하는 기분.
중국인 만두 장사 왕웨이가 나오는 부분은 다소 뻔한 유치함을 보여주지만 그렇게 가볍게 쉬어가는 시간도 분명히 필요했다. 설희 역의 김선영 씨는 한복보다 게이샤 복장이 사실 더 잘 어울렸다. 왕웨이의 동생 링링 역을 맡은 소냐는 참 좋은 목소리를 가진 훌륭한 배우이지만 이번 배역에서는 그 터질 듯한 가창력을 선보일 기회가 많지 않았다. 일단 배역의 비중이 크지 않아서일 것이다. 역시 최고는 지킬 앤 하이드였다는!
거사 날짜를 잡고 '대한독립'이라고 쓰여진 지금과는 사뭇 다른 태극기를 펼쳐들고 사진을 찍으면서 1부는 끝이 난다. 그리고 거사 과정과 체포 후의 안중근 의사가 변론하는 모습, 감옥의 간수가 그에게 감화되는 모습, 그리고 최후 사형 장면에서 작품은 끝이 난다.
어머니 조마리아 여사가 아들을 향해 부끄럽게 살지 말고 의롭게 죽으라고 할 때, 어머님이 보내준 수의를 입게 될 때, 어머님이 불러주는 노래, 그리고 떨림에 몸을 맡긴 안중근 의사. 여기저기서 흐느끼는 소리들이 들린다. 슬프고 감동적이긴 했지만 눈물은 나오지 않던 나.
그러나 커튼 콜을 보면서 뒤늦게 감동이 사무쳐 온다. 자신은 전쟁 중이며, 이토를 사살한 것도 전쟁 행위이며, 그러니 전쟁 포로로 대우하라던 그 말, 마지막 노래의 절절함까지 갑자기 가슴을 마구 울린다. 꼴사납게 불 켜지고 나서 와락 우는 모습이라니...ㅜ.ㅜ
100년 전 그때에, 조국을 위해서 초개처럼 목숨 바쳐 싸우던 분들이 참 많았다. 조국은 힘이 없었고, 조국은 유린되었고, 그 안의 민중의 삶은 더 처참했고, 그들은 몸이 자라 어른이 되기 전에 이미 성숙할 수밖에 없었다. 일찍이 눈을 떠서 제 앞가림 하느라 치졸하게 살아남은 무수한 이들이 있는 반면, 저렇게 살다가 돌아가신 분도 참으로 많다는 것. 그렇게 지켜낸 조국이 독립되었을 때 유해를 옮겨달라고 했건만, 철저히 유린된 그분의 유해는 지금도 흔적을 찾지 못하고, 해방된 조국에 돌아오시지 못하고 있다. 해방된 조국이 결국 '해방'되지 않았다는 것을 안다면, 오히려 더 슬퍼하실까......
모두 처음 듣는 노래인지라 한 번에 착 감기기는 어려웠지만, 마지막에 처형 직전에 부르신 노래가 아무래도 제일 인상 깊었고, 무엇보다도 무대는 정말 훌륭했다. 스크린을 아주 잘 활용했고, 움직이는 무대의 배경 처리가 매끄러웠다.
12월 중순부터는 티켓 가격이 만원씩 더 오른다. 마음이 동하신 분들은 지금 예매하는 게 더 좋다. 아직도 만원 티켓 유효하다.^^
공식 블로그 바로가기
덧글) ost는 아직 발매 전이다. 잔뜩 기대가 되고 있다.
도마 안중근의 '도마'는 '토마스'에서 나온 말이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