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방범 1 블랙펜 클럽 BLACK PEN CLUB 30
미야베 미유키 지음, 양억관 옮김 / 문학동네 / 2006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미야베 미유키의 소설을 처음 접하게 한 것은 '화차'였다. 얼마나 흡인력이 있던지 잠시도 눈을 떼기가 힘들었던 독서였다. 그리고 다음으로 추천 받은 소설은 '모방범'. 400페이지 넘어가면 살 것인가 말 것인가를 고민하는 나에게 3권 총 1600페이지가 넘는 책은 쉽지 않은 도전이었다.   

길고 긴 이 책이 실제로 일본에서 연재 기간은 5년이었다고 한다. 2001년도 작품이 국내에는 2006년에 번역되었고, 나는 2009년에 읽었다. 그리고 작품의 배경은 1996년이다. 십 년도 더 전의 일본 사회를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자본주의와 개인주의, 사회의 분화 모습을 생각한다면 지금의 우리나라 모습이라고 생각하고 보아도 크게 어긋나지는 않을 듯하다.  

작품은 오가와 공원에서 산책하던 17세의 고등학생 신이치의 개가 쓰레기통에서 잘려진 여자의 팔을 발견하면서 시작된다. 이어서 쓰레기통에서는 다른 여성의 핸드백이 발견되고, 핸드백의 주인인 마리코의 할아버지 아리마 요시오에게는 전화를 건 범인은 실종된 손녀로 인해 애간장을 끓이는 가족을 농락한다. 그리고 차례로 발견되는 여성들의 시체. 연쇄살인범은 도쿄를, 일본 전역을 공포로 몰아넣은 채 방송국과 유가족에게 전화를 걸면서 이들의 고통을 더욱 극대화시킨다. 게다가 얄궂게도 처음 토막난 팔을 발견해낸 소년은 얼마 전 강도살해로 일가족을 다 잃어낸 고통을 겪고 있던 참에 이런 일에 또 연루된 것이다. 경찰은 경찰대로 수사 본부가 발칵 뒤집히고, 방송은 방송대로, 유가족은 유가족대로, 그리고 사건에 연루되지 않은 많은 평범한 사람들이 이 연쇄살인 사건에 시선을 집중하며 그 진행사항을 눈여겨 본다.  

작품은 긴 호흡이었다. 등장인물도 어마어마하게 많았는데, 각각의 사람들과 사건들은 처음에는 별 상관 없는 것처럼 진행되지만, 어느 순간에 가면 한 지점에서 마주치게 된다. 작가의 그물은 촘촘하고도 섬세했다. 독자는 인내심을 갖고 그네들의 뒤를 추적해 간다. 1권의 후반부에 가면 범인은 이미 노출된다. '누가' 범인인가는 이 책에서 중요하지 않다. 그보다는 그네들의 행적을 따라가보면서 그 심리상태를 들여다보는 게 더 긴장감을 증폭시킨다. 게다가 1권에서 이미 살인범의 최후를 보여준다. 그리고 나서 다시 앞으로 돌아가서 그들이 정말 '진짜' 범인인지, 왜 그런 일을 했는지, 그 과정들을 차근차근히 풀어간다.  

지켜보다 보면, 살인범의 행적에 분노가 치솟고, 그놈의 인면수심에 공포를 느끼고, 또 유가족의 고통과 남겨진 슬픔의 잔향에 마음이 쓰라리다. 그들의 고통은 진행형이지만, 앞으로도 그 고통은 옅어질지언정 사라질 수 없고, 또 극복되기도 힘들다. 그저 끌어안고 살아야 한다. 그들은 묻고 또 묻는다. 도대체 왜? 왜 우리에게?  그리고 가혹하게도, 범인은 그 심리를 알기 때문에 희열을 느낀다.


   
 
 “모든 피해자에게, 모든 피해자의 가족에게 영원히 풀리지 않을 수수께끼를 던져주는 거야. 왜? 우리 딸이 왜 죽어야 했을까? 범인은 왜 우리에게 왜 이런 고통을 주는 것일까? 왜, 왜, 왜? 그러나 아무도 그 이유를 몰라. 별것도 아닌 놈들이 잔머리를 굴려보겠지. 경찰도 눈을 부라리며 수사를 할 테지. 그러나 그들은 몰라. 아무것도 없으니까. 그걸 아는 사람은 나, 아니 우리뿐이지.”

– 2권 209쪽
 
   


그네들은 어떤 목적 없이, 이유 없이 살인을 저지르는 것처럼 보였다. 2권의 한 대목을 보자. 


   
 
 “진정한 악이란 이런 거야. 이유 따위는 없어. 그러므로 피해자는 자기가 왜 그런 어처구니없는 일을 당하는지 모르는 거야. 원한, 애증, 돈, 그런 이유가 있다면 피해자도 납득을 할 수 있겠지. 자신을 위로하거나 범인을 미워하거나 사회를 원망할 때는 그 근거가 필요한 거야. 범인이 그 근거를 제시해주면 대처할 방법이라도 있지. 그러나 애당초 근거 같은 건 없었어. 그거야말로 완벽한 ‘악’이야.”
“난 잘 모르겠어.”하고 구리하시 히로미는 기죽은 목소리로 말했다.
“더 심한 범죄들도 많잖아?”
“더 심한 범죄? 더 많은 사람을 죽이고, 더 많은 돈을 빼앗는 것? 그런 건 아무 의미도 없어. 그건 어디까지나 범죄일 뿐, 악은 아니야.”
– 203쪽
 
   


이쯤 되면 저 극악무도한 범죄자는 인간이 아니라 '악마'로 보인다. 범죄가 아닌 '악'을 말하는 자라니. 영화 공공의 적 1편에서 부모를 죽인 이성재는 사람 죽이는데 이유가 있냐고 되물었다. 이유가 없이도, 목적이 없이도, '그냥'도 사람을, 그것도 부모를 죽일 수 있는 그런 무서운 세상을 살고 있다는 살벌한 충격. 그게 코믹 영화였으면서도 그 영화를 가볍게만 기억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했다. 

이 작품 안에서도 그래 보였다. 적어도 처음에는. 설명되지 않으니까, 그들의 범죄에 어떤 원인이나 동기가 발견되지 않아서, 그저 미쳤다고 밖에는 스스로를 납득시킬 수가 없어서 답답했다. 독자도 이런데 희생자나 유가족은 오죽할까.  


   
  "살인이 잔혹한 것은, 살인이 피해자를 죽이는 데 그치지 않고 그 가족의 생활과 마음까지 서서히 죽여가기 때문이야. 하지만 그 가족을 죽이는 것은 살인자 본인이 아니라 그 가족들 자신의 마음이야. 정말 웃기는 이야기지만, 사실이 그래. 난 그게 싫어. 난 아무리 자신을 책망해도, 조금씩 죽어가도, 가만이 이를 악물고 버틸 수 있을 정도로 강한 인간이 아냐. 이제 더 이상은 싫어" – 3권 280쪽  
   

등장인물들은 저마다 처한 상황과 다른 입장에서의 자기의 말을 한다. 여성과 남성이 이 연쇄살인사건을 지켜보는 시각이 달랐고, 희생자에게 느끼는 감정도 달랐다. 여성들만 노리는 살인 사건이었던 터라 여자들은 더 공포를 느꼈고, 남성들 중에는 그 범죄자의 기분(쾌감)을 이해할 것 같다는 반응까지도 나왔다. 게다가 희생자가 사회적 기준에서 건전하지 못한 행적을 갖고 있기라도 한다면 바로 도마 위에서 난도질 당하기에 바빴다. 마치 성추행 사건이 터지면 그 원인을 여자의 짧은 미니 스커트 때문이라고 비난하는 것과 같은 그런 분위기로. 

누군가는 저널리스트의 사명을 외치면서 르포를 쓰겠다고 덤비지만, 그 과정에서 진실을 보지 못했고 혹은 유가족의 상처를 건드리기도 했다. '알 권리'라는 잘난 이름 아래, 우리의 천박한 호기심이 희생자에게 또 어떤 상처를 입힐 수 있는지에 대해서 여러차례 되새겨보게 되었다.  

등장 인물 중에 아주 착한 심성을 가진 청년이 하나 나온다. 어렸을 때 뇌기능의 문제로 시각장애를 앓았는데, 눈으로 드러나는 것이 아닌지라 아이가 시각장애가 있는지 누구도 몰랐고, 그래서 학습장애를 가졌으며 대인관계도 원만하지 않았다. 아버지의 메밀국수집에서 성실히, 열심히 일해왔지만, 내세울 것 없고, 외모도 보잘 것 없는 그 사람이 이 살인 사건의 대단원을 장식했을 때 쏟아지는 온갖 선입견들이 아프고 아팠다. 그러니까 이 잘나빠진 물질만능주의 세상에서는 그 사람의 인성과, 가치관과 노력 따위는 보이지 않고, 겉에 드러나는 것들만이 중요한 이 사회를 너무도 투명하게 보여주는 듯해서 말이다.  

길고 길었던 이 작품이, 마침내 '종결'의 장을 찍었을 때는, 그래도 많은 사람들이 위로를 받을 수 있는 어떤 결론을 도출해 내고 마친다. 얼마나 다행이었는지.  

그럼에도, 작품을 다 읽은 감상을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참으로 외롭다... 이 한마디면 족할 듯하다. 가해자도 외롭고, 희생자도 외롭고, 그리고 그 가족들도, 그런 세상에서 살아가는 사람들도, 그리고 독자까지도 모두, 외롭다. 외로운 세상이다. 그래서 아프다. 그래서, 또 서로를 위로해가며 살아야 하는 세상이기도 하다. 

'모방범'이란 제목으로 검색하면 책이 더 나온다. 아마도 후속작인 듯하다. '모방범'을 모방한 또 다른 모방범이 등장하려나 보다.  

그래도 일단은 '낙원'보다는 '이유'를 더 먼저 만날 듯하다. '먼저'가 내게 얼마나 가까운지는 알 수 없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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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꾸는섬 2009-10-20 00: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이책 제게도 있는데 책장만 넘기다 아직 제대로 읽어보지도 못했어요. 언젠가 읽을 수 있을지도 미지수에요.

마노아 2009-10-20 00:22   좋아요 0 | URL
이렇게 긴 책은 작정하고 읽어야 해요.^^

머큐리 2009-10-20 08: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이 책 때문에 미미여사의 팬이 되어버렸어요...두껍긴해도 순식간에 몰입 당해버렸죠

마노아 2009-10-20 11:03   좋아요 0 | URL
필력이 대단해요. 미미여사 군단이 생길만 해요.^^

같은하늘 2009-10-20 09: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문학동네, 미미여사하면 항상 맨 앞에 나타나는 책이던데...
언젠가는 저도 읽고 미미여사에게 빠질 날이 오겠지요? ^^

마노아 2009-10-20 11:03   좋아요 0 | URL
아마 풍덩 빠져서 헤어나오기 힘들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