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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딴방
신경숙 지음 / 문학동네 / 1999년 12월
평점 :
신경숙을 처음 만난 것은 '풍금이 있던 자리'였다. 처음 접한 작품이었는데 그 깊은 우물같은 지독한 우울함이 싫었다. 이니셜이 남발하는 인물들도 싫었고, 안개가 낀 것처럼 뿌옇게 진행되는 진짜 하고 싶은 말들의 메아리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 외딴방을 읽은 후 너무 우울해서 싫어졌다고 이 책 가지라고 한 지인의 말이 잘 이해가 되었다. 지인이 그랬던 것처럼 나도 더 우울해지기 싫어서 다시 만나지 못했던 신경숙을, '리진'과 '엄마를 부탁해'를 통해 결국 다시 만났다. 작품의 출간 간격이 있어서인지, 첫 책에서 만났던 그 느낌이 많이 상쇄되어 있어서 슬프긴 했지만 그때처럼 우울하진 않았다. 그리고 이제, 나는 '외딴방'을 만났다.
각오했던 것보다 덜 힘들었다. 여전히 우울함이 깔려 있고, 슬픈 이야기를 진행시키는 데도 그때처럼 뿌연 안개가 가리고 있지는 않았다. 사건들과 인물들은 좀 더 구체화 되었고 선명해졌다. 그것이 작가가 꺼낼 수 있는 것을 다 꺼낸 것이라고 여겨지진 않지만.
작품은 두 개의 축을 동시에 진행시킨다. 정읍에서 상경해서 낮에는 구로 공단의 여공으로 일을 하고 저녁에는 산업체 학교에서 공부를 하는 열 여섯부터 열아홉의 나와, 소설가가 되어 지금 이 '외딴방'을 쓰고 있는 나가 동시에 나온다. 물리적으로 두 사람은 같은 사람이지만 그 사이에는 쉽게 건널 수도 넘을 수도 없는 불화의 강이 하나 존재한다. 그 존재는 '희재 언니'로 통한다. 37개의 방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그 집 3층에 살고 있는 그녀의 1층 집에 살고 있던 희재 언니. 정확한 나이도 모르고 고향도 모르고, 사실은 아무 것도 몰랐을 수 있는 그 언니가 작가의 삶에 그은 획은 무서운 것이었다. 누구라도 쉬이 자유로워질 수 없는 낙인과 족쇄와 천근 같은 마음의 무게를 남겼으니.
작가가 열 여섯 나이로 공장에 들어갔을 때가 79년이었다. 같이 상경한 외사촌이 열아홉, 그리고 이들 두 동생들의 보호자가 되어준 큰 오빠가 스물 셋이었다. 지금의 기준으로 보면 모두 어리고 어린 나이다. 부모의 보호와 그늘이 필요했을 때에 그들은 '산업역군'이라는 달갑지 않은 훈장을 어깨에 이고 지고 부모가, 사회가, 세상이 떠안긴 가난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안간 힘을 썼다. 시골 집에서는 동네에서 가장 제사 많이 지내는 집인지라 먹을 게 많았고, 마당도 넓고 동네 한 가운데에 있던 풍요로움을 알고 지냈는데, 서울에 도착한 그들은 최하 빈민층이었다. 쉽게 납득되지 않았던 그 체감온도를 스스로 이해시키기도 전에 한 장 연탄과 한 줌의 시금치에 발발 떠는 현실이 그들을 맞이했다.
작품 속에서 등장하는 작가의 가족 이야기는 '엄마를 부탁해'에서의 내용과 많은 부분 겹친다. 고시 공부를 하고 싶었지만 장남으로의 막중한 책임에 눌려 공무원직도 포기하고 동생들을 보살폈던 큰 오빠나, 약사가 된 여동생, 글을 읽을 줄 모르는 엄마의 이야기는 모두 사실일 것이다. 너무 비좁은 방에서 나란히 누워 자다가 잠결에 오빠를 치는 바람에 야단을 듣고 주머니에 손 찌르고 자던 습관 등도 모두 작가의 실제 경험일 것이다. 그리고, 작가가 되고 싶었던 그 소녀의 이야기도 작가의 것일 것이다.
그래서, 이미 작가가 된 그녀에게 모교의 한 교사가 여전히 산업체 학교에서 야간 교육을 받는 학생들의 꿈 이야기를 하는 대목은 참 뜨거웠다. 어려운 환경의 아이들이었지만 나름의 꿈과 희망과 포부는 야무졌다. 물론 부유한 지역의 아이들이 말하는 꿈과는 차이 나는 부분들이 있었다. 이를테면 '나는 일.류. 디자이너가 되고 싶어요"라든가 "의사가 되고 싶어요"가 아니라 "나는 미용기술을 배우고 싶어요", "전문대학에라도 꼭 가고 싶어요"라고 말을 하는 그 아이들의 꿈이 더 작고 가난하다고 감히 말할 수는 없으니까.
작가 신경숙이 이 소설을 쓰게 된 계기가 된 것은 오래 전 같이 공부했던 하계숙의 전화를 받으면서부터다. 너는 왜 우리 이야기는 쓰지 않냐고. 그때 그 시절을 부끄럽게 여기냐고. 너는 좀 다른 삶을 사는 것 같다고 말한 것이 작가의 목에 걸림돌이 되었다. 뱉어내려고 해도 빠져나가지 않고 무시하려고 하면 통증이 되어버리는 굴레. 작가는 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하지 못한 게 맞을 것이다. 그 지독했던 가난과 지독했던 탄압과 외로움, 그리고 무엇보다도 희재 언니의 죽음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한 자신 때문에.
소설은 작가에게 글쓰기란 무엇인가를 묻는 치열한 자기 검열이 됨과 동시에, 그녀의 성장소설도 되어주고, 노동소설도 되어주고 70년대, 80년대, 90년대의 실체적 사건들을 다루는 현장 르포의 느낌으로도 독자를 만나고 있다. 그 모든 이야기들은 한켠 충분히 얘기되어지면서 동시에 충분히 비껴가고 있다는 느낌도 주어진다. 평론에서 백낙청 교수가 말했듯이 노동현장에서 일어날 법한 분쟁과 거친 사건들이 채 드러나지 않는 것처럼.
큰오빠가 어린 동생들을 보호하면서 느끼는 부담감과 답답함, 외로움과 고독의 무게가 참 애틋하게 보였다. 그는 충분히 사랑받고 충분히 기대와 인정을 받고 자란 사람이지만, 장남으로서 받았던 그 사랑은 장남으로서 감당해야 할 업으로 다시 그를 눌렀다. 그 시절 그만 그렇게 살았던 것은 아니었다. 그 시절 이후에도 많은 장남들이, 장녀들이 그렇게 살았다. 굳이 첫째가 아니어도 가족의 짐을 어깨에 지고서 무거운 삶을 산 사람이 어디 그뿐일까. 가족이기에 아프고, 가족이기에 힘이 되는 그 사연들이 당연히 이해되면서 또 당연하게도 나는 싫었다. 설명하기 어렵기 때문에 더더욱.
작가의 동네 친구 '창'의 이야기가 나온다. 만약 이 작품 속에서 허구적 인물이 등장한다고 하면 그건 창이 아닐까 짐작한다. 확인할 수는 없지만. 그래서 창과의 이야기가 가장 진행도 더디고 이야기도 하다만 것처럼 된 것이 아닐까. 창이 아니더라도 현재의 '나'에 가끔 등장하는 '그'도 있다. 터미널까지 그녀를 태워다 주었던. 역시 실체를 보여주지 않는다. 가끔 그런 글쓰기와 전개는 독자를 답답하게도 만드는데, 이제는 그저 신경숙식 화법이라고 이해할까 한다. 말해주지 않는 것을 미뤄 짐작하라는 의도이기 보다 거기까지만 말하고 싶은 의도로 읽히기 때문이다.
실제 연재 기간이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작품 속 진행 시간으로는 1년. 그 시간 동안 신경숙은 자신의 마음 속 깊은 곳에 숨겨져 있던, 꺼내고 싶지 않았던 '외딴방'을 수면 위로 올려보냈다. 의도적으로 피하려 했던 인물들을 다시 꺼내놓았고, 그 사람들과 조우했으며, 그들과 화해를 했다. 그건 그녀의 과거이기도 했으며, 곧 그녀 자신이기도 했고, 그녀의 살아온 시간 모두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랬기에, 이제 작가는 자신을 이해하고 사랑할 수 있게 되었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용서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녀 탓이 아니었다는 면죄부와 함께.
작품 속에서 은사님은 그리 말씀하신다. 너무 많이 쓰고 있다고. 너의 글쓰기는 네 살 파먹기이니, 너무 많이 파내면 네가 아프다고.
그 말에 동감한다. 그리고 바꿔 말하면 이렇게도 들린다. 그녀의 작품은 매력적이지만 우울하고, 아름답지만 아프다고. 그래서 읽는 독자도 제 살을 파먹는다고. 그러니, 많이 읽으면 내가 아프다고.
읽으면서, 나는 좋았다. 신경숙에게 더 다가간 느낌이었다. 그리고 이제 너무 가까이는 가지 말자고 말한다. 조금 쉬었다가 다시 만나자고. 그녀의 외딴방이 아닌 나의 외딴방을 들여다볼 시간이 필요해진 게 아닐까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