촛불세대를 위한 반자본주의 교실
에세키엘 아다모프스키 지음, 일러스트레이터연합 그림, 정이나 옮김 / 삼천리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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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의 기본 체제가 자본주의인 까닭에, 그것은 지극히 자연스럽고 당연한 순리처럼 느껴졌었다. 적어도 초등학교 고학년까지는 반공 교육을 받았고, 그래서 왜 나쁜지까지는 파악하지 못하더라도 북한은 나쁜 체제를 유지하는 나라로 인식되어 있었고, 그래서 그 대척점에 있는 남한의 자본주의 체제는 아주 효율적이고 합리적이고 따라서 선에 해당하는 사회로 알고 있었다. 이 사회의 운영 체제가 상당히 비합리적이고 불공정하다는 것은 아주아주 오랜 후에 알았다. 아마도, 내가 학생일 때는 못 알아차렸던 듯하다.  

전근대 사회도 아닌데, 자본주의 체제가 상당히 억압적인 형태라고는 차마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곰곰이 짚어보면 자본이 곧 권력인 사회이고, 자본을 가진 자가 대다수 시민 위에 군림하고 있는 이 행태를 직시한다면 자본주의 체제가 얼마나 다수의 군중을 억압하고 있는 사회인지 쉽게 알아차릴 수 있다. 그리고 그 도구로 이용되는 것이 '교육'에 의한 줄세우기라고 생각하면 뒷못이 뻣뻣해지는 서늘함을 느끼게 된다.  

자본은 사람을 계급과 계급으로 구분해서 서로를 분리시키고 적으로 만들 뿐 아니라, 소수의 지배자가 다수의 억압받는 자의 시간과 노동과 위엄까지도 잠식하거나 하는 중이다. 그것을 알고 있든 모르고 있든. 그래서 더 무서운 것일 게다.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국가과 민족이라는 경계. 그것이 개인의 존엄함보다도 더 우위에 있다는 은연중의 강요와 세뇌가 무섭다. 영화 '태풍'이 역겨웠던 데에는 '국가'의 명이라면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들어내겠다는 주인공의 호언장담도 크게 한몫 했을 것이다. 오늘 보았던 영화 '국가대표'에서는 미국으로 입양되었던 아이가 엄마 찾기 위해서 귀화한 후 대한민국 국가대표로 뛰는 이야기가 나온다. 재미와 감동을 적절히 선사해준 이 영화가 만약 '애국심'에 호소하는 신파로 기울었다면 음향사고로 인한 환불 소동의 방향이 조금 달라졌을 것이다. 감동을 방해해서가 아니라 짜증을 배가시킨 탓으로.  

이 책은 우리가 쉽게 쓰는 용어 자본주의와 사회주의(그밖의 마르크스주의, 레닌주의, 아나키즘 등등)와 같은 단어들을 좀 더 근원적으로 파헤쳐서 쉽게 설명해주는 데에 공을 들였다. 거기에는 자주 삽입되는 일러스트도 큰 몫을 담당하고 있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32쪽의 국가과 조국, 민족의 개념을 자본주의와 대조시켜 설명한 부분이다. 비유가 아주 쉽고 강렬하게 다가온다.  

18세기에 시민혁명이 일어났을 때 많은 사람들은 소수의 특권계급에게 몰려있던 권력이 민중에게로 돌아갈 수 있다고 기대했을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자 왕과 귀족, 성직자와 같은 특권계급보다 좀 더 넓어지긴 했지만 역시 대다수 민중에 비하면 소수에 속하는 부르주아들이 권력을 잡아챘다. 그들은 오늘날의 자본이라는 권력을 가진 소수의 사람들을 떠올리게 한다.  

사회주의 국가들도 그랬다. 그들이 이상으로 삼았던 평등사회와 달리, 군부를 장악하여 권력을 잡은 독재자가 꼭 등장했고, 그들은 사회주의 국가 건설의 실패 이후 빠르게 신자유주의화 되어버렸다.  

좌파들은 어떠했던가. 그들은 권력을 잡으면 세상을 바꿀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또 많은 사람들이 그걸 기대했다. 그러나 우리가 김대중 노무현 정권 십년 동안에 이미 경험을 했지만 정권을 잡는 것만으로 사회가 변하지 않는다. 그들의 정책도 마찬가지였다.  

   
 

 ‘권력을 잡는 것’에 대한 재검토가 필요하다. 그 일이 불가능하기도 하지만 그런 방법이 바람직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권력은 가까이 오는 모든 것을 변질시키는 법이어서 그것에 대항하는 사람들까지 무력화시켜 버리고 만다. 국가 기구를 장악하려고 하는 사회운동이 때때로 권력관계를 재생산하거나 강화시키기까지 하는 경우도 있다. 선거에서 이기거나 국가를 ‘장악’하기 위해서 과거의 반자본주의자들은 당이나 해방군 같은 조직을 만들었다. 하지만 그런 조직은 사람들을 분리하고 단죄하고 종속시키는 기관이 되어 버렸다. 국가 권력을 장악하고 나면 어김없이 과거 권력자보다 더 심하게 억압하거나 더 세련된 억압 형태를 만들어 냈다. 99쪽

 
   

 지난 선거들에서 압도적인 1위 후보를 따라잡기 위해서 진보 정당에게 표를 나눠주는 건 사표라고 강조했던 것들이 생각난다. 그 전제조건에서 이미 정권을 잡기 위해서 타협이 필요하고, 정권만 잡으면 일단 해결된다는 무모한 확신이 들어있는 것이다. 그런 생각들은 역으로 정권을 빼앗기면 어떤 꼴도 감당해야 한다는 역설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그러한 함정에 대해 이 책은 '권력에 포섭되지 않는' 노력에 대하여 이야기한다.  



'민중 권력' 혹은 '반권력', 또는 '대항 권력'에 대해서 우리가 깊이 곱씹어야 할 이유이기도 하다. 우리는 흔히 '혁명'이란 다가와야 할 거대한 무엇이라고 생각하고 납득하곤 하지만, 혁명은 항상 우리 주변에서 바로 지금도 진행되는 부분들이다. 그것이 참 혁명인지 반동인지는 각자가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삶 속에서 말이다. 우리의 생활을 지배하고 생각을 잠식해 들어가는 자본의 올가미와 권력의 억압을 뿌리치는 것 역시 일상의 혁명 속에서만 지속적으로 가능할 것이다.  

반미하면 좀 어떻습니까....라고 했던 질문이 떠오른다. 빗대어서, '반자본주의' 하면 좀 어떻습니까...라고 묻고 싶다. '좌파'라고 하면 '빨갱이'로 몰리는 아직도 후진 한국 문화를 이젠 좀 바꿔야 할 때가 되지 않았을까. 책에선 전통 좌파와 창조적 에너지를 갖고 있는 반자본주의를 구별하기 쉽게 표로 만들어 놓았다. 



좌파라는 것이, 반자본주의라는 것이 숨막히는 도덕주의가 아니라 융통성도 있고 포용력도 있는 가치라는 것을 알아차릴 차례다. 그리고 그렇게 만들어가는 것이 이 희망 없는 자본주의 세상에서 새 힘이 되어줄 것이다.   

제목이 좀 딱딱하고 표지가 덜 호감이 가고, 가끔 오타도 나오곤 하지만, 이 책은 '정독'해볼 만한 가치가 충분히 있는 책이다. 자본주의의 역사와, 거기에 대항해 온 역사를 파악할 수 있고, '반자본주의'라는 명제 우리가 힘을 모아야 할 우리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 책 안에 만병통치약이 들어 있지는 않다. (있을 수 없다.) 취할 건 취하고, 버릴 건 버리면 된다. 그건 당신의 몫이다. 

ps. 점점 더 낯선 도시에서 이뤄지는 정상회의들에는 이런 이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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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큐리 2009-08-01 11: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이 책가지고 사람들하고 한 번 쯤 토론해보고 싶었어요....

마노아 2009-08-01 12:15   좋아요 0 | URL
그런 분위기가 조성된다면 참 바람직할 것 같아요. 근데 쉽게 쓰여진 책인데도 전 어려웠어요ㅠ.ㅠ

다락방 2009-08-01 12: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노아님이 찍어 올리신 사진을 보고 있자니 마지막에 말씀하신 것 처럼 정독해볼 만한 가치는 있는것 같은데 말이죠, 제목에 '촛불세대를 위한'은 좀 거부감이 들어요. 저 수식어 말고 다른 말을 쓸 수는 없었을까요? 아, 전 왜 저렇게 저 말이 맘에 들지 않는걸까요? ㅜㅡ

마노아 2009-08-01 22:44   좋아요 0 | URL
나름 고심해서 지은 제목일 텐데 오히려 독자층을 너무 구속하는 느낌이에요. 길기도 하구요. 그런데 또 우리 사회에서 '반자본주의'라는 말이 불편하게 다가가잖아요. 여러모로 고민한 결과인가봐요.^^;;;

치니 2009-08-02 12: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다락방님처럼 '촛불세대를 위한'이 끝끝내 맘에 들지 않더라구요. 마노아님은 출판사의 고민을 헤아려주시는 관대한 독자. ^_^ 좋은 리뷰 잘 읽고갑니다.

마노아 2009-08-02 14:35   좋아요 0 | URL
아하핫, 졸지에 관대한 독자가 되었어요. ^^;;;;
책을 선택하게 할 때 제목이 주는 역할과 영향을 무시할 수 없어요.
흔한 제목은 너무 식상하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