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보, 나좀 도와줘 - 노무현 고백 에세이
노무현 지음 / 새터 / 2002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시간이 참 빨리도 흘러서, 너무도 많은 사람들을 충격에 싸이게 했던 그날로부터 3주가 훌쩍 지나가버렸다. 강준만 교수의 '노무현 죽이기'를 아주 오래 전에 읽은 기억이 있지만, 그 외에는 이 이름자 석자가 담긴 책을 찾아볼 일이 별로 없었다. 그래서 관련 책이 그렇게 많다는 것에 깜짝 놀랐다. 이 책의 초판은 94년도에 나왔다. 15년 전의 그의 육성이 담긴 이야기. 그래서 내가 만나기 전의 그의 모습이 담겨 있었다. 그건 나로서는 무척 신선한 만남이기도 했고, 그래서 낯설기도 하고, 또 그렇기 때문에 더 아프기까지 했다.  

책은 그가 처음 여의도에 입성해서 종횡무진 할 때의 이야기, 낙선을 거듭할 때의 각오와 포부, 그리고 삼당 합당에 대한 분노, YS와 DJ와의 만남 등등 정치인 노무현에 관한 이야기들을 참 편안하게 이야기한다. 보통의 정치인들이 책 속에 담았을 법한 변명과 과시는 찾아볼 수가 없다. 이렇게 솔직해도 되는 건가? 싶을 만큼 당돌한 이야기들. 아, 이게 이 사람의 천성이었지. 이 분은, 이런 스타일이었지... 다시금 추억하며, 그 끝엔 꼭 쓰라린 내음과 함께 마음이 아파진다.  

제목이 '여보 나 좀 도와줘'인데, 한 챕터 속의 소제목을 끌어다가 제목으로 만든 것이다. 평범한 소시민다운 제목을 뽑은 것일 게다. 그런데 독자는, 이번 사건을 겪으면서 이 제목이 참 속상하다. 유가족들은 더 그럴 테지만...... 

대학교 때 친구의 아버지는 국회의원이셨다. 친구는 그 엄마와 아빠가 선거 운동할 때 얼마나 바쁘게 지냈는지에 관한 이야기를 여러 차례 했었다.(내 기억에 당시 3선 의원이었다. 아니다, 세번째에 낙선했나 보다..;;;) 그런데 권여사님은 남편의 정치 활동에 자신과 자식들의 인생을 절대로 담보잡히지 않으려 노력했다. 남편이 소신을 못 지키거나 옳지 못한 판단을 한다고 여길 때는 가차 없이 끌어당기는 역할을 했지만, 그런 극단적인 순간이 아니라면 철저히 무관심으로 일관함으로써 오히려 가족을 지켜냈다. 자녀들이 정치인 아버지로 인해 사생활을 침해 당하지 않도록 했고, 아버지는 또 아버지대로 자녀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아버지 모습을 보여주었다. 아비가 구속 당하는 순간에도 그 모습에서 공포를 느끼지 않고 부끄러워 하지 않았다는 대목이 인상깊었다. 물론 그가 변호사였기에 보통의 노동자들과 다른 입장이었고, 아이들이 어리기도 했지만, 그런 믿음은 한 순간에 생기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인 유대에서 쌓인 것일 게다.  

죽을 자리를 제 발로 찾아갈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아이가 마흔 살 될 때까지는 책임지고 뒤를 밀어주겠다... 등등의 말이 책 속에서 찾아질 때면 다시금 한숨이 물려진다. 시간이 지나면 옅어질 게 분명하지만, 그런 안타까움은 오래오래 두고두고 우리들에게 남을 테지.  

15년 전의 그는, 그리고 그보다 더 오래 전의 그는 정말 불같은 열정을 지니고 황소 고집을 가진, 물러설 줄 모르는 거침 없는 행보를 보였었다. 그에 비하면 대통령으로서의 인생 말년의 그의 모습은, 성정은 비슷하거나 여전할 지언정 목소리는 참으로 차분해졌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에게 너무 익숙한 목소리이고 스타일이기 때문에, 책 속에서 그가 하는 말은 모두 그의 육성으로 변해서 다시 들려진다. 내가 미처 알지 못했던 젊은 시절의 그를 들여다보는 느낌이어서 좋고도 아팠다.  

한국 사회에서 정치한다는 것, 그리고 정치인으로 산다는 것에 대한 소탈한 회상과 분석도 인상적이었다. 제도적으로 돈 없이 정치할 수 없는 모순이 착잡했고, 순박하게 도와달라고 힘 좀 보태달라고 계좌번호를 책 속에서 박아버린 그의 배포와 절박함이 아리기도 하다. 그를 대통령으로까지 보내주었던 희망 돼지 저금통이 아른거리는 순간이다.  

책은 편안하게 읽힌다. 그는 세련되게 말하지도 않았고, 과장을 하지도 않았다. 정말 인간 노무현을 그대로 보여줄 뿐이다. 다소 투박하고, 때로는 마초적인 느낌도 보여주지만 그는 그것을 가리지 않고, 스스로가 반성하는 부분들도 과감 없이 보여준다. 그래, 이렇게 인간적인 매력이 넘치는 사람이었지... 다시금 공감하도록.  

'사람 사는 세상'은 그의 오랜 모토였다. 그리고 사실, 우리의 소망이기도 했다. 우리가 많이 잊고들 살았지만. 평범한 한 시민으로서 살았다면 그는 보다 많은 존경을 받으며 더 편안하고 안전하게 살수 있었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 길을 가지 않았다. 마약 같은 정치의 속성이라기 보다, 보다 나은, 사람 사는 세상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의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도전했고, 그리고 실패했다. 그의 실패는, 사실상 우리의 실패였다. 그렇다면, 이제 주저앉아 그 세상을 꿈꾸기를 포기해야 하는 것일까. 그는 자신이 불씨를 피워냈던 가치들이 함몰되는 순간에 생을 등져버렸다. 그리고 그 바람에, 오히려 더 많은 사람이 사람 사는 세상을 꿈꾸며 염원하게 되었다. 우리 사는 꼬라지에 분노하면서, 서러워하면서, 다시금 주먹 불끈 쥐고 달라진 세상을 기대하고 달려가게 되었다. 그것이 그의 유산이었다. 그가 내준 마지막 선물이었다.  

갈 길이, 멀다. 험하기도 하다. 그래도 포기하지 말자는 생각을 해본다. 힘들면 잠시 멈추어 쉬어가더라도, 사람 사는 세상을 믿고, 만들어 가자고. 지금 우리가 느끼는 이 열패감과 서러움, 또 미안함이 가실 수 있게 말이다.  

ps. 굳이 이런 말을 안 보태도 알겠지만, 다음 개정판에는 표지를 바꿔줬으면 한다. 굳이 사진을 박을 필요는 없지만 이 책의 일러스트는 고이즈미 전 총리를 연상시킨단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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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09-06-15 04: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맞아요~ 정말 표지를 왜 그 따위로 그린 걸 썼는지~ 그것도 어떤 의도가 깔린 것 아니었나 생각했다니까요.ㅜㅜ

마노아 2009-06-15 10:01   좋아요 0 | URL
'의도'까진 생각을 못했는데 지금 보니 역시 좀 의심이 가네요. 어쩜 그렇게 말도 안 되는 표지를 썼는지...ㅡ.ㅡ;;;;

다락방 2009-06-15 08: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이 책이 이런책이었군요!! 저도 보관함에 넣어야겠어요, 마노아님.

마노아 2009-06-15 10:02   좋아요 0 | URL
진솔 그 자체예요. 이런 분을 또 언제 만날까요ㅜ.ㅜ

같은하늘 2009-06-15 09: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순오기님의 리뷰를 기다렸는데 마노아님이 먼저 올려주셨네요...^^
인간 노무현을 다시 보게해주는 책이라니 꼭 보구싶어져요...
그런데 벌써 시간이 이렇게 흘러갔다니...
점점 잊혀져가고 있는것 같아 아쉽네요...

마노아 2009-06-15 10:04   좋아요 0 | URL
대통령 이전의 그분을 먼저 만나보고 싶었어요. 보고 나니 또 아파졌다는 게 문제지만요ㅜ.ㅜ
사진 속 저 미소가 너무 그리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