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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리더-책 읽어주는 남자 - The Reader
영화
평점 :
상영종료
열 다섯의 소년과 서른 여섯의 그녀가 만나 사랑했다. 소년은 책을 읽어주었고, 그녀는 그 울림을 들으며 울기도 했고 화도 냈으며 감동도 받았다. 알고 있는 건 서로의 이름 정도뿐. 더 알지도 못했고 알려고 하지도 않았고 알 필요도 없었는데, 그녀가 사라졌다. 어느 날 갑자기. 그리고 시간이 흘러, 이제는 법대생이 된 소년은 그녀를 다시 만난다. 법정의 피고인이 되어버린 그녀를.
사실 영화는, 또 원작은, 여기서부터 제대로 시작된다고 할 수 있었다. 그녀가 왜 갑자기 사라져버렸는지, 그녀의 완고한 표정들이 모두 여기서 설명된다. 그녀가 감추고 싶어했던 비밀, 그리고 그녀의 족쇄가 되어버린 그 비밀 한 자락.
그녀는 글을 읽을 줄 몰랐다. 문맹. 가장 감추고 싶었던 그 사실이 그녀를 세상 밖으로 발가벗겨 내쫓는 구실을 한다. 글을 읽을 줄 모른다는 사실을 감추기 위해서 회사에서의 보장된 승진을 포기하고 아우슈비츠의 감시원으로 취직했던 그녀. 전쟁이 끝나고 전차 승무원으로 일하다가 역시나 사무직으로 승진이 예정되자 가차 없이 직장도 버리고 사랑했던 소년도 버리고 떠났던 그녀. 그랬던 그녀가 법정에서 문맹 사실을 감추기 위해 모든 죄를 홀로 뒤집어 쓰고 무기징역 형을 받는다.
이제는 청년이 된 꼬마는, 혼란스럽다. 그가 배운, 그가 알고 있는 '정의'대로라면 그녀의 진실을 밝혀야 했다. 그녀의 죄과가 없어지진 않더라도 홀로 다 지고 가는 것은 옳지 않았다. 그런데, 그녀가 원하지 않는다. 평생을 감옥에서 보내야 할지언정 밝히고 싶지 않아하는 그 마음을 그만이 알고 있다. 감당하기 힘든 그 사실 앞에 그는 얼마나 좌절하고 번민했던가.
그녀, 한나가 그랬다. 폭격을 맞은 교회 안에는 300명의 포로가 갇혀 있었고, 감시원은 6명이었다. 불이 났고, 온통 아비규환으로 변해버린 그 현장에서, 그녀와 다른 감시원들은 어떻게 해야 할지 판단하지 못했다. 달리 무얼 어떻게 해야 했는지 알 수 없었다. 자신들의 임무는 완수했지만, 인륜은 저버렸다. 전쟁이 온 세상을 덮었던 그 시절에, 그녀같이 혼란스러운 판단을 내려야 했던 무수한 사람들이 있었다. 그 사람들이 모두 자신의 결정을, 혹은 침묵을 책임지며 살진 않았다. 대표 희생양 하나 내세워 가차 없이 돌을 던지고, 그 뒤에 숨어 지냈던 사람이, 더 많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녀처럼 배우지 못했던, 무엇을 잘못했는지, 무엇이 잘못되었는지조차 알지 못했던 사람도 있었다.
20년이 넘는 시간 동안 복역을 했던 그녀. 가석방 일주일을 앞두고 재회한 자리에서, 꼬마였던 중년 신사는 묻는다. 감옥에서 무얼 배웠냐고. 무엇을 깨우쳤냐고. 그녀는 말한다. 글을 깨우쳤다고.
그는 그녀가 과거와의 반성과 화해, 사죄를 했는지 알고 싶었다. 그게 중요했다. 그게 우선이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따뜻한 온정을 기다렸다. 그의 답장을 받기 위해서 그가 녹음해준 테잎을 들으며 책을 읽고 그것으로 글을 깨우쳤다. 수십 년 만에 만난 그 자리에서, 따뜻하게 잡아주는 손을 기대했다.
글을 배우지 못해 온 인생을 나락으로 떨어뜨렸던 그녀를, 법대를 나와 변호사가 되어버린 많이 배운 그는, 이해하지 못했다. 늘 그녀가 밟히고 마음에 얹혀 있었지만, 어떻게 소화해야 할지 그도 알지 못했다. 그녀가 그때 그 불타버린 교회 앞에서 어찌해야 할지 몰랐던 것처럼.
서로가 인생의 혼돈 속에서 흔들렸지만 두 사람의 반응은 무척이나 달랐다. 그녀는 큰 죄를 저질렀지만, 그 죄에 대해서 변명하지 않았고 남의 뒤에 숨지 않았다. 죽은 사람은 살아 돌아오지 않지만, 살아있는 그녀는 살아서 그 업을 감당하려고 노력했다. 허리를 펴고 두 눈에 꼿꼿이 힘을 주고 당당히.
그는, 도망쳤다. 결혼했지만 금방 이혼했고, 자식뿐 아니라 다른 가족과도 마음을 나누지 못했다. 그녀를 위해서 책을 읽고 그것을 녹음해서 보내었지만, 결정적 마음 한자락을 더 싣지 못했다. 그녀가 평생에 걸쳐서 숙명처럼 지고 살았던 죄짐을, 이젠 그가 지고 갈 차례다. 이제껏 무거웠던 그 마음에 그녀의 상처입은 마음까지 더 얹어서.
책과 영화는 사소한 설정들에서 약간의 차이를 보인다. 무시해도 좋을 차이들이었지만, 마지막에 그녀가 꼬마에게 남긴 메시지는 아쉬운 대목이다. 원작에서 그녀는 아무 것도 남기지 않는다. 남기지 않음으로써 가장 강렬한 메시지를 주었는데, 영화는 '따뜻한' 한나로 그녀를 남겨둔다. 그리고 한나가 과거와의 매듭을 풀지 못했다고 여겼던 그가 이제는 매듭을 풀기 위해 딸에게 그녀의 이야기를 하는 것으로 마무리 짓는다. 너무 친절하려고 해서 원작의 맛과 영화적 멋이 오히려 감소한 게 아닐까 싶다.
사족 1. 32살 때부터 랄프 파인즈가 나오는데, 어린 딸과 함께 있으니 마치 손녀 딸을 보는 기분이었다.
사족 2. 케이트 윈슬렛의 연기는 정말 훌륭했는데, 예순 넘어서의 외모는 보여줬어도 목소리는 지나치게 젊었었다. 그래서 문득, '불멸의 이순신' 때 김명민 씨가 얼마나 연기를 잘 했는지 새삼 사무치기도.
사족 3. 이 영화에서 올 누드, 나신~ 이런 단어들은 불필요한 것들인데, 영화의 포스터는 뭔가 관음증적 냄새가 나는 은밀한 분위기를 보여준다. 불만이다.
사족 4. 남주인공 이름 '마이클'은 너무 미국적인 느낌이 아닌가? 원래 이름 미하엘과는 발음 차이겠지만, 그 이름이 주는 분위기 차이가 크다.
사족 5. 별점 다섯을 충분히 줄 만큼 좋았지만, 그래도 나는 슬럼독 밀리어네어보다, 더 리더보다,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가 더 좋았다. 그리고 '더 리더'라는 제목보단 '책 읽어주는 남자'가 더 마음에 와 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