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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 폭풍 ㅣ 비룡소의 그림동화 113
니콜라 배일리 그림, 안토니아 바버 글, 김기택 옮김 / 비룡소 / 2003년 12월
평점 :
크리스마스 관련 책을 찾다가 발견한 명작! 사실, 크리스마스 얘기는 별로 안 나오고, 그게 큰 주제도 아니지만 그럼에도 크리스마스라는 특별성 때문에 일어난 일들, 그래서 더 훈훈한 이야기였다.
앤서니 브라운을 연상시키는 세밀한 그림체였다. 앤서니 브라운의 밝고 화사한 색과는 거리가 멀지만, 이 작품에서 보여주는 심각한 느낌은 제대로 살린 편이다. 마치 실사를 연상시키는 그런 촘촘한 그림.
주인공은 늙은 어미 고양이 마우저. 그리고 그의 동반자는 톰 할아버지.
이들이 사는 곳은 영국의 유난히 작은 항구 '마우스 홀', 일명 '쥐구멍'이다.
쥐구멍 마을에서 마우저를 유일하게 기쁘게, 만족스럽게 만들어주는 톰 할아버지. 하루하루 즐거운 나날이 이어졌는데 변수가 생겨버린다.
저 멀리 푸른 바다가 잿빛과 검은빛으로 바뀌기 시작하더니 거대한 고양이 폭풍이 불어온 것!
마을 사람들 모두 고기잡이를 못 나가고 발이 묶이고 만다. 마을에 먹을 것이 똑 떨어지게 된 것도 그 때문.
생선 외에는 다른 것을 먹지 않는 마우저도 내내 굶을 수밖에 없었다. 생선 스튜와 별자리 파이 생각이 간절해지는 나날들.
그러던 어느 날, 톰 할아버지는 저 바다를 뚫고 고기잡이를 나갈 결심을 하신다.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는데, 그 따스한 명절에 마을 아이들을 굶길 수 없다는 게 할아버지의 각오.
자신은 이미 늙었고, 마누라는 죽었고, 자식들은 모두 다 컸기 때문에 더 없는 적임자라고 여긴 것이다. 그리고 그건 마우저도 마찬가지였다. 무엇보다도 할아버지가 돌아오지 않는 집을 혼자 지킬 자신이 없었다. 두 사람은 결국 동반자가 되어서 고양이 폭풍이 몰아치는 바다 한 가운데로 나가버린다. 모두를 위해서, 행복한 크리스마스를 선사하기 위해서!
고양이 폭풍의 위력은 대단했다. 배를 삼킬듯이 위협을 했지만, 결코 이 재미난 장난감을 쉽게 부수지 않겠다는 듯 약올리며 희롱한다. 배는 휘청휘청 위험스럽게 항해를 할 수밖에 없다. 그 와중에 기적같은 노래 소리가 울리니...
바로 마우저가 부른 노래 소리. 마치 바다 요정 세이렌처럼 노래를 부르니, 고양이 폭풍의 울음소리와 함께 이중창처럼 울려퍼진다. 마우저의 달콤한 세레나데에 거대한 고양이 폭풍은 잠시 마음이 누그러진 듯 이들의 배를 놓아주기도 한다.
그 때를 놓치지 않고 열심히 그물을 던지는 톰 할아버지!
하지만 안심할 수는 없다. 돌아가는 길목에도 고양이 폭풍이 떡하니 가로막고 있을 테니. 폭풍의 심술을 어찌 가라앉힐 것인가.
역시 희망은 마우저의 노래 소리?
아니다. 이번엔 다른 소리다. 생선 스튜가 끓는 소리와 오븐에서 노릇노릇하게 변해가는 별자리 파이를 상상하며 기분이 좋아진 마우저의 가르랑거리는 소리가 고양이 폭풍을 달래고 말았다. 생전 처음 들어본 놀라운 소리! 마치 자신의 새끼 고양이 시절을 떠올리게 하는 그런 소리였던 것이다.
고양이를 길러보지 못하고 가까이서 그리 접해보지 못한 나로서는 가르랑거리는 소리는 다만 상상으로만 느낄 뿐이다. 그건 어쩐지 좀 더 나른하고 기분 좋은, 여유가 있는 듯한 소리로 느껴진다. 고양이 폭풍도 그래서일까? 금세 잠잠해지고 만다.
저 기분 좋은 표정이라니! 고양이로 묘사된 푸른 바다의 빛깔도 지금만큼은 따스하게, 부드럽게 느껴진다.
돌아오는 뱃길은 행복한 길. 게다가 온 마을을 밝힌 환한 불빛들이 톰 할아버지와 마우저를 반겨준다.
둘이 마을을 떠난 것을 알고 마을 사람들은 걱정이 되어 붉을 밝히고 이들의 귀향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마음씀씀이들이 있으니 할아버지도 그 험한 뱃길을 자처한 것일 테지.
구름도 걷히고 희미한 달빛이 바다를 잔잔히 비쳐준다. 저 평온하게 가라앉은 바다. 온순해진 고양이 폭풍.
선물과도 같은, 희망과도 같은 불빛들이 독자의 마음도 따스하게 어루만져 준다.
이제 마을에서는 크리스마스 이브 전날 밤이 되면 생선 잔치를 벌이고, 톰 할아버지를 기념하며 건배하게 되었다. 또 쥐구멍 마을의 고양이들도 마우저 할머니를 기념하며 소리 높여 노래하게 되었다.
그리고 해마다 크리스마스가 되면 이 자방 사람들은 바닷가 돌담에 수천 개의 등불을 밝히는 행사를 갖는다고 한다.
전설과도 같은, 아름답고 따뜻한 이야기 한 자락. 훈훈하고 구수하다.
글쓴 이는 안토니아 바버로 좋은 작품을 많이 쓴 듯한데, 번역되어 소개된 책은 이 책 뿐이다. 그림을 그린 이도 마찬가지.
그 부분이 제일 아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