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차
미야베 미유키 지음, 박영난 옮김 / 시아출판사 / 2006년 10월
평점 :
절판


때로 명성이 너무 자자한 작가의 책을 만나게 되면 기대가 너무 커서 작품의 참맛을 다 느끼기도 전에 질릴 때가 있다. 그렇지만 명성이 있는 작가의 작품을 만나게 되면 그 명성이 절로 얻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을 저절로 깨달을 때도 있다. 미미 여사가 내게 그랬다.

추리 소설, 미스테리 스릴러, 서스펜스 등등. 이런 종류의 책과 영화를 멀리한다. 워낙에 겁이 많아서 뒷감당이 힘들고, 진짜 재밌는 추리물을 만나면 거기에 빠져서 헤어나지 못할까봐 제어장치가 필요했다. 그랬던 나에게도 미미 여사는 피해갈 수 없는 관문이었나 보다. 실은 작년 말 비연님 생일 이벤트 당첨 선물이었는데 내내 미루다가 오늘에서야 빼들었다.

엄마의 병원 진료일이었고 여차하면 장의 용종 제거 수술에 들어가야 할 판이었으므로, 하루종일 병원에 있을 각오로 두꺼운 책을 골라갔던 것이다. 정말 다행으로, 엄마의 건강이 생각보다 나쁘지 않아 수술은 피해갔고, 병원에서 읽어온 분량은 책의 1/3 정도였다. 그리고 나서 볼쇼이 아이스 쇼에 엄마와 함께 다녀오는 길인데, 어무이 심심한 것은 제쳐두고 이 책 읽느라 내내 정신이 없었다. 그렇게 하루 종일 붙들고 있어서 461페이지의 책을 결국 당일치기로 다 읽었다. 다 읽은 감상은? 아, 섬뜩하다! 내가 괴물을 만났구나... 이 정도면 설명이 될까?

작품의 배경이 90년대 초반이다. 십수 년이 지난 일본 사회를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사회의 진행 흐름을 보건대 오늘날 대한민국의 상황과 바로 대입해도 별로 문제가 되지 않을 설정이다.

한 여자가 실종되었다. 처조카로부터 그 여자의 행방을 찾아달라는 부탁을 받은 휴직 중인 경찰관. 여자의 흔적을 뒤따라가다 보니, 무섭고 끔찍한 사건의 끄트머리를 밟게 된다. 이 여자, 처조카가 알고 있는 그 여자가 아니다. 다른 사람의 인생을 훔쳐서 살고 있던 여자, 그녀는 대체 누구인가?

사건의 발달은 '빚'이었다.  베일 속에 감춰진 등장인물들의 인생을 그렇게 비참하게 바꿔버린 것은 부채였다. 그것이 주택담보 대출금이든, 소소한 쇼핑의 결과물이든, 어쨌든 빚이란 것은 제 속성을 감추지 않고 눈덩이처럼 불어났으며 마침내 사람을, 인생을, 윤리를, 그리고 행복을 모조리 삼켜버렸다.

여기에는 단지 채무자의 나태함과 게으름, 무분별한 경제 행위에만 책임이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들을 그런 자리로 몰아가게 만든 사회 구조. 즉, 빚 권하는 사회의 음모가 뒷받침 되어 있는 것이다. 생각 없이 제2 금융권 광고를 하는 스타들이 괜히 욕을 먹는 것이 아니다.  자신들 손에 쥐어지는 그 돈을 위해 다른 사람의 인생을 파멸로 몰아가는 몰이꾼 역할을 해버린 것이니까.

대한민국은 사채시장의 천국이다. 지난 해 몹시 인기를 끌었던 '쩐의 전쟁'을 기억할 것이다. 첫 회에서 금나라는 사채 잘못 써서 아버지 자살하고 어머니 홧병 나 돌아가시고 동생 결혼 망치고를 몽땅 당했다. 제2 금융권의 법정 금리가 69%다. 상상이 가는가? 100만원 빌려서 일년 이자가 69만원이다. 그걸 일년 내에 상환하지 못한다면? 법정으로 69%지만 그것은 얼마든지 200%, 그리고 1000%까지 올라갈 수 있다. '합법적으로' 말이다. 그러니 완전 음성인 '사채'는 오죽할까?

김대중 정권 시절, 정말 무분별하게 신용카드 발급을 허용해 주었다. 길거리 가다가도 핫도그 하나 사먹는 것처럼 가볍게 신용카드를 만들 수 있었던 시절이었다. 그렇게 해서 늘어난 카드로 무엇을 해주길 바랬던가? '소비'를 원했다. 당장 눈앞에서 경제가 살아나는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그 다음은? 빚에 찌들린 사람들이 사회의 악으로, 쓰레기로 전락하는 과정을 보아야 했다. 누군가는 악착같이 갚으면서 독기만 남았을 것이고, 누군가는 파산 신청을 하며 드러누웠을 것이고, 누군가는 그 빚을 감당하지 못해 야반도주를 하던가 일가족이 동반 자살을 하였다. 그 후로 십년이다. 올바른 소비 패턴을 지킬 수 있다면 무엇보다도 편한 것이 신용카드이지만, 그 신용카드로 패가 망신한 사람을 얼마나 많이 볼 수 있었던가.

휴직 중인 경찰관 혼마가 사건을 캐면서 밟아가는 두 여자의 삶은, 한꺼풀 한꺼풀 벗겨질수록 끔찍함에 혀를 내둘러야 했다. 그 살벌한 긴장감과 그 지독한 외로움의 균형이라니!

신조 교코는 남의 인생을 훔쳐서라도 새 사람으로 살고 싶었지만, 그녀의 과거가 그녀를 놓아주지 않았다. 급기야는 그녀 자신의 인생도 도난 당하도록 만드는 비극의 악순환.

작가가 얼마나 능숙하고도 매력적으로 작품을 완결했는지, 마지막 장면의 그 씬은 영화로 따진다면 '최고의 엔딩' 그랑프리감이었다. 이 작품이 워낙 인기가 좋았으니 혹 영화로도 제작된 것은 아닐까 궁금해지는데 아직 찾아보진 않았다. 만약 만들어졌다면 최고의 공포 서스펜스 심리 추리물이 되지 않았을까?  사람들이 미미 여사의 신간이 나오면 그토록 열광하는 이유를 정말 제대로 뒷북치며 공감할 수 있게 되었다.

사실, 읽으면서 나는 많이 슬펐다. 작품 속 그녀들의 파란만장한 삶이 가여워서만은 아니었다. 내가 가여웠던 사람은 다른 사람이었다. 내가 아는 그녀도 이 작품 속 여자들과 비슷한 길을 걸었다.  단지 '행복'해지고 싶어서 소비했던 것들이 그녀에게 되돌려준 것은 칼이었고, 독이었고, 덫이었다. 그리하여서 그녀가 갖게 된 것은 몰상식, 비윤리, 민폐의 연속...

우리 사회가, 우리의 교육이, 오렌지를 어륀지~라 발음하라 가르칠 것이 아니라, 사회 생활을 하면서 기본으로 지켜야 할 최소한의 경제 관념과 윤리의식에 더 힘쓴다면, 적어도 이 사회의 경제가, 또 미래가 조금은 더 밝아지지 않을까? 우리가 당연히 알고 있을 거라고 여기는 많은 것들은 당연히 모를 때가 있다. 현명한 소비? 그거 어려운 거다. 공부, 필요하다. 이 책은 그 공부의 필연성을 제대로 가르쳐주고 있는데, 더 많은 사람들이 읽고 가슴을 쓸어내리고 공포를 느꼈으면 좋겠다. 저 지옥불을 향해 불수레(火車)를 끌고 들어가고 싶지 않다면...

책 뒷면에 내가 아는 알라디너들의 이름이 잔뜩 포진되어 있다. 반갑다, 미미여사 군단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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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08-08-23 03: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오늘 막 이 책 다 읽었는데요.
역시 미미여사의 책은 한 번 잡으면 단숨에 읽게 돼요.

마노아 2008-08-23 09:45   좋아요 0 | URL
그러게 말예요. 중간에 다른 일을 할 수가 업었다니까요. 명성 앞에 무릎을 꿇었어요^^ㅎㅎ

순오기 2008-08-23 09: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미미여사가 그렇게 유명하다 해도 하나도 안 읽은 나는 알 수 없어요.ㅜㅜ
한땐 추리소설 열독했는데~ 나이들면서 심드렁해졌을까?ㅎㅎㅎ
책 뒤에 알라디너의 이름이 잔뜩 포진되어 있다니 궁금하군요~~ ^^

마노아 2008-08-23 09:46   좋아요 0 | URL
페이퍼 읽다 보면 미미여사 극찬이 참 많았는데 저도 알길이 없었거든요.
근데 그게 다 빈말이 아님을 깨달았어요.
여름 되면 특히 장르 소설 좋아하시는 알라디너들 이름이 잔뜩 있더라구요^^

다락방 2008-08-24 00: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제목만 보고 화차의 리뷰일거라고 짐작했어요. 후훗.

그렇지만 미미여사의 작품이 다 좋은건 아니더라구요. [마술은 속삭인다]로 미미여사를 처음 만났는데, 이 책만 읽고서는 어라, 이게 다야? 했었거든요. 그러다 [화차]를 읽고 그녀의 작품을 읽어야겠다고 결심했지요. [모방범]이 최고였어요. [낙원]을 사놓고는 기대중이랍니다. 씨익.
:)

마노아 2008-08-24 18:08   좋아요 0 | URL
어떤 작품을 첫번째로 만나는가도 꽤 중요한 문제 같아요. 전 알랭 드 보통을 '동물원에 가다'로 처음 만났는데 첫인상이 별로였거든요. 그래서 그후 결별(?) 상태예요.
미미여사를 화차로 만난 건 다행이네요^^
모방범은 좀 아껴두고 이유를 먼저 볼까봐요. 이것도 두께가 680페이지. 어휴. 왠만한 책 두배예요.
낙원은 다락방님의 반응을 기대하렵니다^^

마냐 2008-08-24 01: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첨에 모방범 보고 입에 거품을 물었고, 이유, 화차, 역시 그랬어요. 연달아 읽으니..무엇이 가장 좋았는지 잘 모르겠더군요. 그러다가 낙원을 읽으니...역시 좋았긴 했는데, 왠지 이유, 화차보단 점수를 덜 주고픈 마음이 들더군요. 대체 왜 그런건지 딱 꼬집어내진 못하는데...오. 미미 여사님.

마노아 2008-08-24 18:10   좋아요 0 | URL
정말 오, 미미 여사님!이에요. 하루종일 잔상이 어찌나 남던지요. 덕분에 밤에는 좀 으스스 무섭긴 해요.ㅡ.ㅡ;;;;
전 다음 번 책으로 '이유'를 볼까 해요. 일단 보관함에 담아두고 조만간 주문할 생각이에요.
그리고 좀 아껴서 모방범을 읽을까 해요. 이렇게 두껍고 긴 책 안 좋아하는데 미미여사 책은 두꺼워도 신나더라구요^^

로드무비 2008-09-27 14: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미미 여사 군단은 아닌데, 이 책 읽어보고 싶네요.
책소개가 아주 리얼합니다.

마노아 2008-09-27 18:20   좋아요 0 | URL
헤엣, 이 책 읽고 제대로 삘 받고 몇 권 더 사놨는데 그 후 바빠져서 못 읽고 있어요. 이유랑 모방범이 저를 기다리고 있는데 말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