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이라는 게 참 어렵다.  의사소통의 방법으로서 편리한 도구이지만, 사용하기에 따라서 무기가 되기도 하고 힘이 되기도 하는 놀라운 녀석이다.

지난 주 목요일, 직장에서 힘든 일이 있었다.  그 전날도 힘든 일이 있었지만, 전날의 맘고생이 아무 것도 아닌 게 되어버릴 만큼의 충격이 나를 강타했다.  그건 생존의 문제였고, 생계의 문제였고, 또 존엄의 문제였기에 나는 마음이 온통 넝마가 되어버린 것 같았다.  비올락 말락 날씨의 습기가 모두 내 눈으로 모인 것처럼 울면서 집으로 돌아간 날, 이러이러한 일이 있었다고 엄마에게 털어놓았다.

엄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으셨다. 못했을 수도 있다.

수돗물을 틀어놓고 씻다가, 또 꺼이꺼이 울어버렸다.  쉽게 진정되지 않았고 쉽게 해결될 일도 아니었다.

두 시간쯤 지난 뒤, 방안에서 흐느끼는 소리가 났다.  들어가 보니, 엄마가 TV프로를 보시면서 울고 계셨다.  말레이시아 할머니 한분이 62년 만에 가족을 찾는 내용이었다.  나는, 마음이 상해버렸다.

문을 닫고 나와 멍하니 있다가, 얼마 간 기도를 하다가, 너무 설움이 북받쳐 다시 엄마에게로 갔다.

엄마.

잔뜩 잠긴 목소리로 불러본다.

엄마는 내가 울면서 들어온 것도 알고 있고, 돌아와서도 그렇게 우는데 왜 한마디도 안 해?

나 오늘 참 비참했는데, 너 힘들었겠다... 한 마디만 하면 되잖아.

나는 엄마가 밤마다 나를 위해 울며 기도하는 것도 알지만, 그것보다 내 앞에서 직접, '말'로 위로해주면 안되는 거야?  TV프로 속의 그 할머니가 나보다 100배는 더 참담한 세월을 사셨겠지만, 그 할머니를 위해서 울었던 것처럼 왜 나한테는 마음 표현을 못하는 건데?  나 정말 섭섭하다.

말하면서 또 눈물이 쏟아졌고, 엄마도 같이 우신다.  사실은 네 생각하면서 미안함에 눈물이 났던 거라고 고백하신다.

나는, 엄마의 그 말이 진실일 거라고 생각한다.  눈앞에서 표현하지 않지만, 늘 내 생각하고 계실 것을 왜 모르겠는가.  그렇지만, 그건 별로 위로가 되지 않는다.  그저 한 마디 말해주는 것, 혹은 등을 한 번 토닥여 주는 게 더 위로가 될 수 있다.  정말 위로가 필요한 사람에게는, 그것이 위선일지언정 약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엄마마저 우니까, 마음이 아파왔다.  그렇지만, 동시에 섭섭한 마음도 사라져버렸다.  조금, 위안이 되기도 하였다.  내 문제 해결에는 아무 도움이 안 되지만, 그래도 마음의 상처는 조금 아물어졌다.

엄마를 울리다니, 나는 참 불효녀다. 그렇게라도 위로를 구한 내가 참 이기적이란 생각도 든다.  그런데, 그래야 숨을 쉴 것 같았다.  혼자서 아파하기엔 상처가 컸다.  같이 울어줄 사람이 필요했다. 

손가락 찔러서라도 함께 울어줄 사람이 있었다는 것은 감사할 일이다.

생명의 위협을 느끼는 사람들이 있고, 생존의 문제로 투쟁하는 사람들이 있는 이 시점에, 내 머리속에 나로 꽉 채워져 있는 내가 민망하고 불편하다. 

나 먹고 살기 바빠!라고 하는 내가, 먹고 살만해지면 그때는 어떤 변명을 할까?  그때는 지금보다 더 '긍휼'을 베풀 수 있는 사람이 되어 있을까?  내가 나에게 허락하는 긍휼만큼 타인에게도...

경성스캔들을 보면서, 그 시절을 살았던 사람들에게 조국이 얼마나 암울했을까를 생각해 보았다.  만약 그 시절에 태어났다면, 나는 독립운동의 필요성을 절감하면서 '방관'자가 되어있지 않을까 참담한 상상을 해본다.  어느 심리 테스트에선 독립운동가의 기질이 있다고 나오더만 스스로 신뢰가 안 간다.  조마자의 충고대로 '자기 안의 혁명'이 필요하다. 

'말'이 할 수 있는 역할에 대해서 말하려고 했는데 심각한 사회 분위기와 역시 심각해져버린 알라딘 분위기에 쓸려 도랑에 빠지고 말았다.  ('삼천포'라는 말을 안 쓰려고 노력해 본다.)

오늘 오랜만에 통화한 지인은 상황에 비해 목소리가 밝다고 했는데, 그렇게라도 해야 살아지는 것 아니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은 살아가야 하니까... (역시 경성스캔들의 명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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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7-25 21: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07-25 21: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hnine 2007-07-25 21: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20% 공감이요!
어머니에게 서운함을 느끼실 때 바로 말씀하시고 서운함을 푸시는 것, 혼자서 마음 속으로 쌓아두는 것보다 좋은 방법이어요. 전 그게 왜 안 될까요.
직장에서 무슨 일이 있으셨는지 모르겠지만, 잘 풀렸으면 좋겠어요.

마노아 2007-07-25 21:37   좋아요 0 | URL
오래 고민하다가 말을 꺼냈어요. 저도 싫은 소리 정말 못하는 편이거든요.
말하고 나니 속이 시원해졌어요. 문제 해결엔 뭐 전혀 도움이 안 되었어요.
이랜드 사태는 결국 내 문제기도 하거든요. 사회적 구조의 모순이요ㅡ.ㅜ

비로그인 2007-07-26 01: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눈물이 나는 건 어쩔 수 없어요. 차라리 눈물이 나는 게 다행인 것도 같아요. 울 수 있을 땐 우는 게 좋은 것 같아요. 어쩔 수 없이 참아야만 할 때도 있잖아요. 마노아 님 곁에 위안이 될 수 있는 사람이든, 일이든, 그 무엇이든 종종 만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마노아 2007-07-26 01:34   좋아요 0 | URL
이유님의 댓글이 제게 위로가 됩니다. 아떤 사태에 해결을 해주는 것은 아니더라도 눈물 자체로 위로가 될 때도 있는 거지요. 힘을 북돋아 주셔서 감사해요. 잘 자요~

비로그인 2007-07-26 11: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아~ 그런 일이 있었군요. 나의 소울 메이트.
어쩐지, 지난주에 유난히 내가 우울하더라니. 그랬죠. 우울했었습니다.
흐린 장마철 날씨를 핑계삼아. 그러나 소울 메이트의 기운이 전달되어서일겁니다.
무슨 일이었을까. 도움은 안되겠지만,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를 하면서 마음의 답답함을
덜어버릴 수는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라도 괜찮으시다면, 이야기해 주시겠습니까?
나는 무조건 당신 편이 될게요.
'정정당당' '공평' '중용' 등을 삶의 신조인양 외쳐대는 나이지만, 저 역시
팔이 안으로 굽다보니 친한 사람의 편을 들게 되더군요. (웃음)

저도 비슷한 경우가 있었습니다. 저는 언제나 약한 모습을 보이는 것을 스스로
허락하지 않는 성격이다 보니, 힘든 일이나 고민거리가 있어도 속을 안 보이고
늘 아무렇지 않은듯 지내죠. 그러다보니, 주변의 아주 가까운 사람들이 저에 대해
모르게되고.
그런데 저는 어느 날 그게 터질 때가 있습니다. 나에게 너무 관심없는거 아니냐고
상대방에게 버럭버럭 원망의 소리들을 질러버렸죠. 그리고 울렸습니다.
어찌 보면, 내가 사람들에게 나에 대해 이야기들을 안하면서 그들이 알아서 알아주길
바라는 이기심으로 인해 벌어진 일들이지만 ...

내가 다른이에게 무심하고, 나 역시 다른 이의 무관심 따위 신경 안쓰며 살긴 해도,
가끔은 그런 것들이 섭섭하게 느껴집니다. 제 경우는 자업자득이지만.(웃음)
저는 마노님의 그 마음, '손가락 찔러서라도 위로받고 싶은' 것이 인간의 당연한
마음이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지금은 마음이 조금 괜찮아지셨나요?

마노아 2007-07-26 14:27   좋아요 0 | URL
무조건 내편이 되어주겠다고 하는 엘신님, 그 마음이 참 고맙고 힘이 됩니다.
내 가슴앓이의 원인들은 말하고 나면 늘 구차하고 서로 민망해지는 사안들이어서, 혹은 누워서 침뱉기가 될 가능성이 많아서 입다무는 것이 덜 챙피해지는 거지만, 입다물고 살면 내 속이 썩어서 독이 됩니다.
누구에게 털어놓는다고 해서 하나 달라질 것 없는 것들이지만, 그래도 인간인지라 한마디 위로에 목말라서 금세 후회할 속내를 드러내기도 하지요.
누구나 세상살이 어렵고 힘든 법인데, 나혼자 세상짐 떠안고 가는 양 엄살을 부리는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저 역시, 엘신님의 마음이 고되어질 때 힘이 될 수 있는 사람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아무 도움이 안 된다면, 함께 울어라도 주고 싶습니다.
그대는 오늘도 참 좋은 나의 친구입니다.

비로그인 2007-07-26 17:49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마노아 2007-07-26 17:51   좋아요 0 | URL
저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