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일곱 송이 붉은 연꽃 샘깊은 오늘고전 3
허난설헌 지음, 이경혜 엮음, 윤석남.윤기언 그림 / 알마 / 20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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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난설헌을 이미지화 한다면, 이 책의 표지같은 느낌이지 않을까 생각했다.  비단 감촉이 나는 표지는 그 광택과 문양과 화려하지 않고 고아한 색감으로 우아함을 들이밀며 고상을 컨셉으로 잡았다.  그렇다고 무게만 잡는 무거운 책은 절대 아니다.  어린 아이들도 읽을 수 있는 쉬운 고전이면서, 동시에 어른의 감성으로도 능히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는 깊은 이야기가 담겨 있다.

허난설헌은 개방적인 분위기의 가정에서 태어나 천재 소리 듣는 형제들과 학문을 공부했고, 훌륭한 여류 시인이며 문장가로 이름을 날렸지만, 개인적인 삶은 불행했던 가엾은 여자다.

남편과의 사이는 살갑지 않았고, 시어머니의 사랑도 받지 못했고, 남편보다 뛰어난 여자라고 오히려 입방아에 오르기 일쑤였다.  뿐이던가.  딸아이와 아들 아이를 연이어 잃었고, 뱃속의 아이도 잃고 말았다.  제사 받들어줄 후손 하나 없이 난설헌은 그 자신도 스물 일곱의 젊디 젊은 나이에 병도 없이 죽고 만다.  가슴 속 깊은 한만 남긴 채.

그녀는 자신의 시가 남겨지기를 바라지 않았지만, 그녀만큼이나 자유를 갈망했던 동생 허균의 애정과 부지런함으로 시가 오늘날까지 남을 수 있게 되었다.  더군다나 중국에서 일본에서 시집으로 엮이어 국제적 명성까지 드날리게 된다.  그들 형제의 불우했던 삶과는 너무도 대조적인 죽음 이후의 모습이다.

작가 이경혜씨는 번안하다시피 시를 가다듬어 직역보다는 의역에 가깝게 독자 앞에 펼쳐놓았다.  시 한수 읊어주고 그 시의 풀이를 말해주고 자신의 경험담과 느낌을 담담하게 서술했는데, 몹시 편안하게 읽혀진다.  그리고 독특한 그림이 뒤따라 오는데 현대미술의 창의적인 감각을 십분 발휘했으면서도 묘하게 고전적인 느낌을 전달해 준다.

난설헌이 품었던 신선의 세계, 드넓은 광야를 달리고 싶었던 남성적 꿈이라던가, 자신이 겪은 삶은 아니지만 가난하고 아픈 이들의 마음을 표현한 시들이 모두 가슴에 와서 박힌다. 

쉽게 빨리 읽히지만, 천천히 곱십으며 느리게 읽어야 더 맛있을 아름다운 책이었다.  책장에 꽂혀서는 그 우아함으로 한 번 더 값어치를 해낼 책이다.

맛보기 시. 
평범한 여성으로서의 감정에 충실한, 또 평범한 행복을 원하기도 했던 그녀의 마음이 드러난다.

나한테
화려한 비단 한 필이 있어요.

쌓인 먼지 털어 내니
비단 광채가
눈부시기 짝이 없네요.

두 마리 봉황이 마주 보게 수를 놓았는데
그 무늬가 어찌나 찬란한지요.

몇 년이나 상자 속에
고이 간직해 오다
오늘 아침 낭군께 가져다 드립니다.

님의 바지야
얼마든지 지어도 좋지만

다른 여인 치마를 지어서는
절대 안 된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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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07-04-04 23: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허난설헌의 삶은 너무 비극적이어서 그녀의 평범한 시조차도 너무 마음이 아파요. 때로 전 그녀가 차라리 황진이처럼 기생이었다면 조금은 더 행복할 수 있지 않았을까? 아니 잠시 행복한 순간이라도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한답니다.

마노아 2007-04-05 00: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재주를 펼칠 수 없는 세상에선 너무 뛰어나다는 것만으로도 사람이 비극적인 삶을 살수도 있나 봐요. 참 안타까운 인재예요ㅠ.ㅡ

비로그인 2007-04-05 01: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화 [항후화]에서 쉴 새 없이 국화 자수를 놓던 황후가 생각납니다.
10만의 군사들의 목에서 나풀대던 그 아름답던 국화 스카프가 상당히 인상적이었는데.
재능은 시대를 잘 만나야 하는 것이죠. 가슴 아프지만 어쩔 수가 없는 우주의 움직임.

마노아 2007-04-05 08: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대가 알아주지 않을 때, 받아주지 않을 때, 때로 재능이 독이 되기도 하다니 참 안타까운 일이에요. 평범한 나, 만만세..;;;;;

비로그인 2007-04-05 13: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거의 모든 사람들은 자신의 재능을 펼치기보다는 현실에 타협하거나 미처 재능을
모르고 있는 경우, 일부의 사람들 중에서는 시대에 맞지 않는 재능을 펼치다가
단명하거나 혹은 적절히 현실과 타협해서 마음껏 펼치는 경우가 있습니다만.
문제는 세상 밖으로 나와 자신의 소명을 다하고 떠난 영웅,천재,위인들보다
그늘에서 괴로워하다 죽어간 이들이 더 많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30%가 환경적 요소이고,. 70%가 자신의 의지라고 생각합니다.

마노아 2007-04-05 13: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세상에 그 재주를 다 떨친 사람들도 개인적으로 얼마만큼 행복했는가는 또 말하기 쉽지 않은 문제지만 그 덕분에 많은 사람들이 덕을 보고 살기도 하는 것 같아요.
환경적 요소를 무시할 수 없지만 의지와 노력의 중요성 역시 간과할 수 없죠.

비로그인 2007-04-05 14: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천재, 영웅, 위인들, 그리고 기이하고 특이한 특소수의 사람들은 -
신이 보낸 '노동자들'일 뿐입니다. 자신의 역할을 최대한 다하고 죽는 것이 그들의...
태어난 존재 의의가 아닐까....하는.
감사합니다. 마노아님이랑 대화를 하다보니 뭔가 머리 속이 정리되어 가는 느낌입니다.

마노아 2007-04-05 23: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노동자들'....
그러니까 그 훌륭한 재주를 공익을 위해서 사용하지 않는다면 '직무유기'가 되겠군요. 공익도 이루고 사익도 이루어지면 좋겠어요. 더불어 행복하게... ^^

비로그인 2007-04-05 21: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직무유기...입니까. (쩝-)

마노아 2007-04-05 23: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너무 잔인한가요??? ..;;;

비로그인 2007-04-05 23: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니요. 뭐, 그냥. (긁적)

마노아 2007-04-06 00: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냥... 뭐..... 쿨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