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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5 - 단종.세조실록 ㅣ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5
박시백 지음 / 휴머니스트 / 2005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역사라는 게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손가락질 받아 마땅한 죄를 저지른 인간도, 이후의 행적에 따라서 욕은 먹을지언정 동시에 칭송도 받는다. 동시대를 겪지 않은 사람들은 과는 과고, 공은 공이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일까. 근간에는 조선을 무대로 한 사극이 드물지만, 과거 줄기차게 조선 시대를 배경으로 한 사극이 방영될 때에 보여준 관점도 그랬다. 처음부터 보진 못했지만 "왕과 비", "용의 눈물"이 그랬던 것으로 기억난다. 태종과 세조는 막대한 피를 흘리고 즉위했다. 도덕성에서 일단 실패했고 정통성에서 부족하다. 그럼에도 그후 보여준 행적들에 있어서 고개를 손꼽아줄만한 일도 분명히 있다.
태종은 제 손에 피를 묻혀가며 조선이란 나라의 기틀을 세웠다. 그가 선대의 공신들의 발목을 모조리 잡아둔 덕분에 세종은 성군 소리를 들으며 치세를 할 수 있었다. 그런 세종도 수령고소금지법이란 악법으로 백성들의 고혈을 짜내기도 했는데, 그 악법을 바로 일소해 버린 것이 재밌게도 세조다. 세종이 찍소리도 못한 명나라에게 그나마 큰소리도 치고 실력 행사를 했던 것 역시 세조다. 후궁을 들이지 않고 왕비 한 명만을 사랑한 것도 세조고, 근검절약으로 자신의 무덤까지 검소하게 마련할 것을 명한 것도 세조다. 너무나 뜻밖이지 않은가.
그러나, 아무리 공이 크고 업적이 뛰어나다 하더라도 시작점에 문제가 있는 사람은 뿌린 대로 거둘 수밖에 없다. 그것이 세종이 훨씬 더 아름다운 임금으로 칭송 받고, 그런 그에게서 어떻게 세조같은 아들이 나왔는가...라는 탄식이 나오게 하는 부분이다.
공신책봉. 왕이 될 수 없는 인물을 왕으로 세웠으니 얼마나 많은 이들이 공신으로 다시 태어났을까. 백성의 목소리에 귀기울이고, 어사를 파견하고 자신이 준비된 임금임을 각인시키기 위해 갖은 노력을 기울였던 세조도, 공신의 과오 앞에선 무릎을 꿇어야 했다. 그 자신이 약속한 대로 어떤 죄라도 용서해야 했으니까.
그래서, 될 일도 되지 않았다. 태종은 그 면에서 좀 더 자유롭다. 그는 은혜를 모르는 사람이란 소리를 들을 정도로 공신일지라도 가차 없이 왕권에 위협이 될 인물은 버려버렸으니까.
세조 때에는 스리슬쩍 넘어가졌을지는 모르지만, 이후 이때 생성된 공신으로 인해 조선 사회의 폐단은 꽤나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운다. 진보파였던 이들은 보수파로 거듭나고 그들은 훈구파란 이름으로 사림의 공적이 되어버리니 말이다.
작가는 세조의 치적을 적나라하게 묘사해 놓고도 흔들리지 않는 평가를 내려버린다. 그의 치세 동안 있었던 숱한 반란의 움직임. 그 모든 거사들은 자신의 목숨과 가문의 명운을 걸고 벌인 일들이었다. 그런 일이 빈번했던 시기는 역시 문제가 많은 시대이지 않을까라는 질문. 나 역시 동의한다. 세조, 그는 능력있는 군주였을지는 몰라도 옳은 임금은 되지 못했고, 그래서 역시 좋은 임금으로도 남지 못했다.
여담이지만, 어제 끝난 하얀거탑에서의 야망준혁으로 열연을 펼친 장준혁이 떠오른다. 그는 뛰어난 의사였지만 '대의'도 되지 못하고 '중의'도 되지 못하고 '소의'로 눈을 감아야 했다. 그의 죽음만큼이나 허망하지 않던가. 내게 있어 세조의 임금 '됨됨이'는 꼭 그랬다. 허망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