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빈슨과 방드르디 - 좋은벗 좋은책 아동문학 1
미셸 투르니에 지음, 이원복 옮김 / 좋은벗 / 2004년 6월
평점 :
품절


초등생일 때 로빈슨 크루소를 읽었는데, 나에게는 그의 표류기가 어마어마한 모험담이었다.  이 재미난 소설이 제국주의적 이기심과 오만으로 똘똘 뭉쳤다는 평을 받고 있다는 소리는 한참의 시간이 흐른 뒤에야 듣게 되었다.  그렇다고 어릴 적의 그 감동이 바로 사라졌다거나 배신감을 느낀 것은 아니지만, 그런 접근이 얼마든지 가능하겠다고 생각은 했다.  이 책은, 그 로빈슨 표류기를 패러디/재구성한 책의 청소년판이다.

구성은 어느 정도 비슷하다.  난파당한 배에서 살아남은 로빈슨이 무인도에서 악착같이 홀로 살아남는 눈물겨운 투쟁이 이어진다.  그가 난파당했을 때의 나이가 22인데, 무인도 생존이 가능한 그 온갖 지식들이 신기해서 나는 그가 이루고 있는 '문명'을 들여다 보는 것이 여전히 재미 있었다.  그리고 그런 것들이 다 무슨 소용이겠냐며 그가 한 차례씩 좌절할 때마다 같이 안쓰러워 했다.

달라지는 것은 '프라이데이'의 출연부터다.  금요일에 구한 인디언을 프랑스어로 "방드르디"라고 로빈슨은 명명했다.  생명을 구해 받은 방드르디는 로빈슨을 주인으로 모셨고, 그의 말에 복종했으며 그가 요구하는 언어를 익혔다.  그렇지만 그의 마음에 그런 것들이 기쁘다거나 달가웠던 것은 아니다.  로빈슨이 강요하는 규칙과 예의, 법률 등은 방드르디에게 모두 무의미한 것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이제 로빈슨 표류기와 확 달라지는 부분은, 뜻밖의 사고로 수십 년 간 일군 그 역작의 '문명'이 깡그리 무너져 사라지면서 생긴다.  하루 아침에 모아둔 재산과 만든 집과, 일군 농토가 다 사라졌다.  처음 섬에 도착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무'로 돌아간 것이다.

빠른 체념은 오히려 절망을 이기게 도와주었다.  이제 로빈슨은 방드르디를 하인처럼 취급하지 않는다.  자기와 마찬가지로 '자유인'으로 대한다.  거기에는 그가 잃어버린 '문명'의 역할이 크게 자리했다. 그는 더 이상 잃을 것도 없지만 가진 것도 없으니까.

로빈슨은 방드르디로부터 야생에 던져진 채 생존하는 기술과 자연친화적으로 사는 지혜를 배우기 시작한다.  뜻밖에도 전혀 친해질 수 없을 것 같던 그것들이 몸에 익기 시작하고 오히려 자연스럽게 동화되어간다.  둘 사이에 마찰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들은 슬기로운 가족과 친구로서의 관계를 잘 이어간다.

그런데 여기에 반전이 생긴다.  솔직히, 방드르디로부터 로빈슨이 큰 영향을 받을 거라고는 짐작했는데, 거기에 한 번의 쇼킹한 사건이 또 생길 줄은 몰랐다.  그래서 더 흥미진진했고, 충격적인 결말에 아연실색했다.  독자의 재미를 위해서 그 부분은 얘기 안하련다. ^^

책은 모두의 동의를 얻을 수 있는 결말을 끌어냈다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고개를 끄덕일 수 있는 여지를 충분히 안겨주었다.  책 마지막에는 책을 얼마만큼 진지하게 읽었는지 테스트할 수 있는 객관식/주관식 문제도 있고, 무인도에 떨어졌을 때 어떻게 살아남을 것인가, 무엇을 가져갈 것인가, 어떤 생각들을 할 것인가 등등 구체적인 질문들이 담겨 있다.  귀찮다고 덮을 일이 아니라 진지하게 고민을 해본다면 자신의 삶과 우리의 문명과 우리가 잡고 있는 이 사회 속의 '관계'에 대해 깊은 성찰을 끌어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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씩씩하니 2007-02-02 11: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구 궁금해라,,,님...너무 멋진(!) 리뷰에요...
읽구 싶어져요,,,

마노아 2007-02-02 11: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씩씩하니님 감사해요^^ 저도 기대했던 것 이상으로 재밌게 보았답니다. ^^

마노아 2007-02-02 13: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속삭이신 님, 사실은 궁금했어요^^ 제가 궁금해할 거라고 짐작하셨군요! ^^

marine 2007-02-02 16: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갑자기 파리대왕이 생각나네요 15소년 표류기를 비튼 책이거든요

마노아 2007-02-02 23: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헉, 마린님 댓글을 보고 번뜩 생각이 났어요. "로빈슨 표류기"가 아니라 "로빈슨 크루소"였죠. "15소년 표류기"랑 제목이 섞였네요^^ 근데 15소년 표류기 어릴 적에 읽었는데 내용이 기억이 나질 않아요...ㅡ.ㅜ 파리대왕도 궁금하군요. 언젠가 봐야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