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럿의 윤리적인 무관심으로 해서 정의가 밟히는 일이 있어서는 안될거야. 걸인 한 사람이 이 겨울에 얼어 죽어도 그것은 우리의 탓이어야 한다.

                                                                                        황석영, '아우를 위하여' 중에서

-----------------------------------------------------------------------------------------------

1992년 여름, 황석영의 <객지>를 읽었다.

그리고 2004년 무더운 날,

다시 읽게 되었다.

여전히 날카로운 빛을 내는 언어들이

덮어놓고 싶은 부끄러움을

다시 일깨워 놓는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후배의 자취방이 있는 흑석동의 사진입니다. 서울의 주요 건물들은 평지에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모여사는 마을은 대부분 산자락에서 자리를 잡기 시작하여 산위로 위로 뻗어올라간 모양을 하고 있습니다. 인간이 원래 산과 친숙해서 마을이 그렇게 형성되었다면 좋으련만, 건물들에게 인간의 자리를 내어주고 산으로 쫓겨나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서인지 정겨운 모습만은 아닙니다. 흙냄새를 찾기가 어려운 것은 평지나 산 위 사람의 집이나 마찬가지더군요.




중앙대학교 정문에서 상도역으로 가기위해 넘어가야하는 고갯길입니다. 처음에는 버스를 타려고 했다가 마음을 고쳐먹었습니다. 느리고 더뎌도 걷는 것이 많이 생각하고 사소한 것도 볼 수 있기때문입니다. 비탈길에 아슬아슬하게 주차된 차들과 건설 현장들을 아슬아슬하게 바라보며 걷다가 뜻밖에 길을 만났습니다. 떨어진 잎들로 자연스럽게 어지러진 바닥을 밟으며 길게 드러워져 푸른 지붕을 얹어주는 나무들 아래를 지나면서 기분이 한결 좋아졌습니다.


 


댓글(5)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superfrog 2004-06-14 11: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반갑네요.. 친정집이 흑석동 근처거든요.. 흑석동 중대 앞도 술마시러 자주 다녔어요..^^

비로그인 2004-06-14 12: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걸으시면서 안더우셨나요?? 더위가 장난이 아니라던데요~

메시지 2004-06-14 12: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중대 앞에 항아리라는 가게에서 막걸리에 파전을 맛있게 먹었어요.
저는 걷는 거 좋아합니다. 물통하나 들고 손목에 착용한 보호대로 땀을 닦으며 잘 걸어다니죠.

sweetmagic 2004-06-15 19: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걷는 거 좋아해요~~항아리!!! ㅎㅎㅎ 저도 가봤어요ㅋㅋㅋ

icaru 2004-06-18 15: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저도 반갑네요...!! 두번째 사진의 길...ㅎㅎ 특히 익숙하네요...
 

                       개 미

                                                     - 강 연 호 -

 

절구통만한 먹이를 문 개미 한 마리

발 밑으로 위태롭게 지나간다 저 미물

잠시 충동적인 살의가 내 발꿈치에 머문다

하지만 일용할 양식 외에는 눈길 주지 않는

저 삶의 절실한 몰두

절구통이 내 눈에는 좁쌀 한 톨이듯

한 뼘의 거리가 그에게는 이미 천산북로이므로

그는 지금 없는 길을 새로 내는 게 아니다

누가 과연 미물인가 물음도 없이

그저 타박타박 화엄 세상을 거너갈 뿐이다

몸 자체가 경전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저렇게

노상 엎드려 기어다니겠는가

직립한다고 으스대는 인간만 빼고

곤충들 짐승들 물고기들

모두 오체투지의 생애를 살다 가는 것이다

 

그 경배를 빗밟지 마라

 

------------------------------------------------------------------

지금 내게 필요한 것은

삶에 대한 진실한 몰두


댓글(1)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마녀물고기 2004-06-12 00: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잠에 대한 진실한 몰두, 가 아니고요? 몸 자체가 경전이란 저 쉰의 말에 으스스 한기 느낀 적 있었는데.. 여튼, 충일한 나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세상의 모든 뿌리는 젖어 있다

                                                           - 강연호 -

 

문든 떨어진 나뭇잎 한 장이 만드는

저 물 위의 파문, 언젠가 그대의 뒷모습처럼

파문은 잠시 마음 접혔던 물주름을 펴고 사라진다

하지만 사라지는 것은 정말 사라지는 것일까

파문의 뿌리를 둘러싼 동심원의 기억을 기억한다

그 뿌리에서 자란 나이테의 나무를 기억한다

가엾은 연초록에서 너무 지친 초록에 이르기까지

한 나무의 잎새들도 자세히 보면

제각기 색을 달리하며 존재의 경계를 이루어

필생의 힘으로 저를 흔든다

처음에는 바람이 나뭇잎을 흔드는 줄 알았지

그게 아니라 아주 오랜 기다림으로 스스로를 흔들어

바람도 햇살도 새들도 불러모은다는 것을

흔들다가 저렇게 몸을 던지기도 한다는 것을

기억한다, 모든 움직임이 정지의 무수한 연속이거나

혹은 모든 정지가 움직임의 한순간이듯

물 위에 떠서 머뭇거리는 저 나뭇잎의 고요는

사라진 파문의 사라지지 않은 비명을 숨기도 있다

그러므로 그러썽한 시선으로 바라보지 않아도

세상의 모든 뿌리가 젖어 있는 것은 당연하다

 

------------------------------------------------------------------

공허하게 텅빈 정신이 알 수없는 감정에 젖어들다가 문득 떠오르는 말

세상의 모든 뿌리는 젖어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우리는 흔히 세상을 개혁함으로써 보다 조화롭고 행복한 삶을 실현시킬 수 있다고 생각한다. 현실 부정의 문학은 이 믿음 위에서 출발하여 마음에 드는 이상적인 세계를 세울 때까지 현실을 개조하려는 노력을 계속해나갈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자아을 부정함으로써 보다 크고 참다운 나에 이르려는 노력 역시 문학에 팔요하다고 나는 느끼고 있다. 나의 변모는 곧 세계의 변모를 가져오기 때문이다.

 세계는 나를 내포하고 나는 세계를 내포하는, 모든 것이 하나라는 관점에서 나는 자아와 현실을 부정하면서 詩의 길을 가고자 한다. 이 길이 나에게는 이상적인 中道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최승호, [고슴도치의 마을], 뒷표지에서

----------------------------------------------------------------------------------------------

세상을 사는 일과 시를 쓰는 일은 별개라고 생각한 적이 있다. 그러나 역시 시인에게있어서 시를 쓰는 일은 세상을 사는 일과 같은 의미이라는 것을 알았다. 너무 많은 욕심일지는 모르나 아름답고 건강한 사람들이 아름답고 건강한 시를 썼으면 좋겠다.

나의 개혁이 세상을 개혁하고, 나의 타락이 세상을 타락시킨다는 것을 가슴에 새기고 살아야겠다.


댓글(3)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쎈연필 2004-06-09 14: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최승호 시인을 여전히 좋아합니다. 그 시집의 뒤표지에 실린 앞부분은 윗글에선 생략되었군요. 플라톤의 <국가>에 나오는 동굴의 비유를 아주 쉽게 풀어 쓴 글이라서 인상이 깊었죠. 플라톤의 말을 인유해 온 것은 아마도 플라톤의 시인추방론을 염두에 뒀기 때문이겠죠. 이상향을 위해서 시인을 추방하라... 그것은 곧 윗글의 자기 부정으로써의 보다 크고 참다운 나에 이르는 노력이 필요한 문학이겠지요. 역시... 최승호는 멋있는 인간입니다...

메시지 2004-06-09 20: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최승호의 시를 좋아합니다. 시인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구요.
자몽상자님께서 쓰신 글을 보고 찾아보니 뒷표지가 아니라 뒤표지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빠진 윗글이 동굴의 비유를 풀었다는 것도 몰랐었구요.
저는 앞에 생략된 부분을 보면서 장용학의 소설 <요한시집>의 토끼이야기가 연상되었습니다. 토끼가 대리석의 스펙트럼이 일궈내는 동굴 안의 일곱색깔을 버리고 동굴 밖을 찾아 헤매다가 드디어 동굴 밖에 나오는 순간 강한 빛에 눈이 멀었습니다. 집으로 돌아가는 입구를 잊을까봐 그곳에 머물렀던 토끼는 결국 그곳에서 죽고 그 자리에 버섯이 피어나는데 그 버섯을 자유버섯이라고 부른답니다. 많은 동물들이 그 자유버섯을 보고 위안을 얻는다고 합니다. 동굴 밖의 진짜 빛을 찾으려는 토끼를 시인으로, 그 자리에 남은 자유버섯을 시인이 쓴 시로 대응된다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비로그인 2004-06-10 02: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최승호님, 잘 쓰시더라고요. 작품들이 마치 샤갈이나 클레의 그림을 보는 듯한 느낌이었는데. 전작은 아니고 오래전에 사 둔 초반에 발행했던 시집, '대설주의보' 요것만 집에 있어요. 나머지 시들은 간간 계간지에 실린 거 몇 번 보고 그랬었는데. 암턴, 사람들이 바라는 이상향은 존재할 수 없을 거에요. 그것은 정말 다가서려 하면 멀어지는 무지개와 같은 것인지도 몰라요. 우리가 세계를 개혁하는 것은 부조리하게 어긋난 모든 것을 맞추려하는 것이면서 동시에 예방하는 차원...아, 이거 사무실인데 집에 가기 싫어 여그서 또 잘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