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흔히 세상을 개혁함으로써 보다 조화롭고 행복한 삶을 실현시킬 수 있다고 생각한다. 현실 부정의 문학은 이 믿음 위에서 출발하여 마음에 드는 이상적인 세계를 세울 때까지 현실을 개조하려는 노력을 계속해나갈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자아을 부정함으로써 보다 크고 참다운 나에 이르려는 노력 역시 문학에 팔요하다고 나는 느끼고 있다. 나의 변모는 곧 세계의 변모를 가져오기 때문이다.

 세계는 나를 내포하고 나는 세계를 내포하는, 모든 것이 하나라는 관점에서 나는 자아와 현실을 부정하면서 詩의 길을 가고자 한다. 이 길이 나에게는 이상적인 中道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최승호, [고슴도치의 마을], 뒷표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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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사는 일과 시를 쓰는 일은 별개라고 생각한 적이 있다. 그러나 역시 시인에게있어서 시를 쓰는 일은 세상을 사는 일과 같은 의미이라는 것을 알았다. 너무 많은 욕심일지는 모르나 아름답고 건강한 사람들이 아름답고 건강한 시를 썼으면 좋겠다.

나의 개혁이 세상을 개혁하고, 나의 타락이 세상을 타락시킨다는 것을 가슴에 새기고 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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쎈연필 2004-06-09 14: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최승호 시인을 여전히 좋아합니다. 그 시집의 뒤표지에 실린 앞부분은 윗글에선 생략되었군요. 플라톤의 <국가>에 나오는 동굴의 비유를 아주 쉽게 풀어 쓴 글이라서 인상이 깊었죠. 플라톤의 말을 인유해 온 것은 아마도 플라톤의 시인추방론을 염두에 뒀기 때문이겠죠. 이상향을 위해서 시인을 추방하라... 그것은 곧 윗글의 자기 부정으로써의 보다 크고 참다운 나에 이르는 노력이 필요한 문학이겠지요. 역시... 최승호는 멋있는 인간입니다...

메시지 2004-06-09 20: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최승호의 시를 좋아합니다. 시인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구요.
자몽상자님께서 쓰신 글을 보고 찾아보니 뒷표지가 아니라 뒤표지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빠진 윗글이 동굴의 비유를 풀었다는 것도 몰랐었구요.
저는 앞에 생략된 부분을 보면서 장용학의 소설 <요한시집>의 토끼이야기가 연상되었습니다. 토끼가 대리석의 스펙트럼이 일궈내는 동굴 안의 일곱색깔을 버리고 동굴 밖을 찾아 헤매다가 드디어 동굴 밖에 나오는 순간 강한 빛에 눈이 멀었습니다. 집으로 돌아가는 입구를 잊을까봐 그곳에 머물렀던 토끼는 결국 그곳에서 죽고 그 자리에 버섯이 피어나는데 그 버섯을 자유버섯이라고 부른답니다. 많은 동물들이 그 자유버섯을 보고 위안을 얻는다고 합니다. 동굴 밖의 진짜 빛을 찾으려는 토끼를 시인으로, 그 자리에 남은 자유버섯을 시인이 쓴 시로 대응된다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비로그인 2004-06-10 02: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최승호님, 잘 쓰시더라고요. 작품들이 마치 샤갈이나 클레의 그림을 보는 듯한 느낌이었는데. 전작은 아니고 오래전에 사 둔 초반에 발행했던 시집, '대설주의보' 요것만 집에 있어요. 나머지 시들은 간간 계간지에 실린 거 몇 번 보고 그랬었는데. 암턴, 사람들이 바라는 이상향은 존재할 수 없을 거에요. 그것은 정말 다가서려 하면 멀어지는 무지개와 같은 것인지도 몰라요. 우리가 세계를 개혁하는 것은 부조리하게 어긋난 모든 것을 맞추려하는 것이면서 동시에 예방하는 차원...아, 이거 사무실인데 집에 가기 싫어 여그서 또 잘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