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찔레꽃

                                                        최두석

 

보인다

눈 감아도 보인다 아스라이

찔레 꽃덤불 위로 피어오르는

지리산 아지랑이

 

아지랑이 사이로 어른대는

갈색 놀란 토끼눈

총소릴 들리고

더벅머리 쑥대머리 빨치산 사내들

삭정이로 불을 지피고

 

깜박이는 불빛 따라 접근한

국방군 부대

또 총소리 들리고

쓰러진 조선이나 한국의 사내

그들의 입에 눈에 흙이 들어가

꿈도 집념도 온갖 욕망도

바람에 날려보내고

 

지리산 등성이 여기저기 누운

산사람 혹은 국방군

그들이 뒤영켜 함께 피우는

찔레꽃

지리산 찔레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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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그렇게 미움과 증오로 죽고 죽이며 사라져가도 자연은 묵묵히 그들 모두를 넉넉하게 품고 있습니다.

오래 전에 보았던 지리산 피아골에 있는 충혼탑이 기억납니다. 빨지산과 토벌대 모두의 영혼을 위해 만들어졌다는...  어제는 현충일이었습니다.  양편 모두의 아픈 상처인 한국전쟁을 잊기보다는 잘 기억해서 다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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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6-08 02: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성에꽃>, 최두석, 문학과지성사, 뒷표지 글.

  얼마 전에 다섯 살 난 아들을 재우기위해 가슴을 토닥거리는데 아이의 입에서 불쑥 "아빠, 지나간 건 모두 꿈이야"라는 말이 튀어나와 그 말을 하게 된 이유를 생각해본 적이 있다. 잠들면 무슨 꿈을 꾸게 될지 궁금한 이 아이에게 꿈이란 단어는 실제로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는 의미로 쓰였을 것이다. 그리고 지나간 일은 꿈처럼 쉽게는 아니지만 세월을 두고 잊혀져간다. 다섯 살 이전의 일들은 대부분 되새길 수 없는 것으로 꿈처럼 잊혀질 것이다. 자신의 직접 체험이거나 주워들은 이야기들을 되새기며 사는가. 또한 자신의 직접 체험까지도 일생을 살면서 얼마나 많이 잊게 되는가. 그리고 결국 한 사람이 죽는다는 것은 그의 마음속에서 감겼다 풀렸다 하던 온갖 이야기의 실꾸리를 땅에 묻는 것이 된다.

  사람들은 이야기를 홀로 되새기거나 다른 사람과 주고받는 일종의 문학행위를 함으로써 이야기가 꿈처럼 잊혀지는 것을 막는다. 이야기의 생성 변형 및 교류는 인간에게 원천적이고도 보편적인  문학 행위이고 사람이 다른 동물들로부터 구분되는 고유한 특성이라고까지 말할 수 있을 듯하다. ----- '이야기 시론'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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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두석의 시집 "성에꽃"을 읽게 만든 이유는 시집 뒷표지에 적힌 위의 글때문이다. 문학과 지성사에서 출판된 시집을 고를때, 뒷표지의 글은 선택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물론 모든 시집을 다 읽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만은 그것은 나로서는 여러 가지 이유때문에 실현불가능한 일이다.

며칠째 꿈을 꾸며 잠을 잔다. 흐릿한게 남아있는 꿈에 대한 기억이 때로는 나의 하루 전체를 붙잡기도 한다. 일어나지 않은 일인데도 꿈은 나의 머릿속을 뛰어다니며 실제의 나의 삶에 관여하고 있다. 꿈을 해몽해준다는 사이트라도 들어가볼까. 프로이트의 말대로 내가 해결하지 못한 욕망이 끝내 정리되지 못하고 나를 괴롭히는 것인가.

아이의 말대로 지나간 것은 모두 꿈이다. 또한 꿈은 지나간 것이다. 꿈이 허상이면서도 나의 삶에 간섭하듯 지나간 것들은 모두 꿈이되어서 여전히 나의 삶을 간섭하고 있다. 그렇다면 내가 삶을 살아가는 일은 꿈을 남기는 일인가. 아, 꿈엔 나의 과거가 담기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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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4-06-02 23: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거 책내용은 꽤 심오한 이야긴데 제가 흥밋거리의 꿈이야기를 꺼내는 거 같아 뻘줌하네요. 사실 꿈이라는 게 굉장히 재밌는 거라는 생각이 들어요. 무기라곤 이성뿐이었던 인간들이 세상의 공포와 싸우면서 축적된 경험들의 어떤 에너지, 뭐 그런 기류가 꿈, 이라는 잠재의식으로 드러나는 거 같어요. 0.5 초전에 저희 가족들의 예지몽 얘길 썼다 무서워서 후딱 지웠어요. 사실 무서운 얘긴 아닌데 오밤중에 이 외딴 사무실안에 있으려니. 토..토..토요 미스테리, 뭐 그랑거 생각나고요..어, 근데 등 뒤의 달력이 팔락거리고...쭈빗! 앗싸! 차려억..옴마야~

비로그인 2004-06-02 23: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 한겨레 신문 보니까 문화란에 연극 기사가 떴더만요. [자전거] 보고 싶은데 익산엔 공연소식 없나..연극은 아니지만 홍신자님 퍼포먼스도 보고 싶네요. 홍신자님이 황병기 '미로'에서 그 울적한 울음을 운 여인인가, 아닌가? 암턴, 이거 쉴라고 맘 먹고 업종전환했는데 띠발...개뿔이나 쉬지도 몬 허고 문화는 쥐뿔! 거그다 임금삭감까지 되아부라서 저 낙동강 오리알 신세 되았네요. 쩝! 쉭쉭~

메시지 2004-06-03 10: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번 [자전거]는 거창버전으로 경상도 사투리로 진행된다고하네요. 오태석 님이 사투리에 관심이 많으신가봐요. [자전거]는 몇 년 전에 전주에서 전라도 사투리로 진행된적도 있어요. 작년엔가는 오태석 님이 제주도 사투리로된 4.3관련 연극도 공연했었고.[앞산아 당겨라 오금아 밀어라]였던가. 제목이 가물가물하네요. 전 인터넷에서 동영상으로 대충..... 가끔 EBS를 통해서 접하기도 하죠.
 


Peter Handke의 『관객모독』에 대하여

『관객모독』의 연극 목표는 연극관람자로서 아무 의식없이 연극을 관람하는 관객들에게 자신들이 누구이고  무엇때문에 이곳에 있는지를 인식시키며, 다른 한편으로는 이러한 인식의 과정을 확장시켜 아무 자극없고 변화없는 관객들의 일상속에서 자신들의 위치와 존재를 올바로 인식하게 하여 지금까지 의식하지 못했던 현실의 가능성을 보게 하거나 인식하게 하는 것이다.
한트케에게 있어 연극은 관객의 내적 유희공간을 창조하는 수단으로, 관객의 의식을 넓히고 심화시키는 수단으로 의미가 있다. 한트케는 자신의 연극을 서극이라고 한다. 연극을 보고 나서 관객은 각자의 '본극'에서 스스로가 서극에서 연극을 통해 느낀 것을 통해 좀 더 의식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럼 여기서 한트케가 작품속에서 관객을 의식시키기 위해 어떠한 방법을 사용하는지 살펴보자.
한트케는 이 극에서 관객을 이야기꾼들의 '상대역'으로 만든다. 이 극의 이야기꾼들은 무대위의 자기 동료를 향해서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직접적으로 관객을 향해서만 이야기한다. 이러한 이야기꾼들의 태도를 통해 관객들은 수용자로서의 전통적인 자신의 역할에 대해 낯설게 느끼게 되며, 이 낯설음을 통해 자신의 상황을 진지하게 다시 생각하게 된다. 즉 관객은 이 극에서 더 이상 전통적인 의미의 수용자가 아니라 공동제작자이다. 만일 관객이 이 극에서 무엇인가를 하거나 혹은 곰곰히 생각하도록 요구받지 않는다면 상연시 매우 지루하게 느낄 것이다. 왜냐하면 이 극은 어떤 특별한 줄거리나 흥미거리를 서술하지 않았고 또한 연기자와 연기자 사이의 어떤 갈등이나 대립을 묘사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야기꾼들은 관객에게 이 극의 촛점이 되어 줄 것을 요구한다.
한트케는 이 극에서 관객을 의식시키기 위해 '욕설'이라는 자극적인 방법을 사용한다. 관객을 모욕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관객을 직접 연극 속으로 끌어들이기 위해서이다. 욕설은 관객을 자기자신과 대면하게 한다. 관객들이 일상속에서 아무 생각 없이 사용한 욕설을 인용함으로써 관객들은 자기자신의 모습을 보게 된다. 욕설은 관객을 자기자신과 마주치게 하여 자의식에 이르게 하는 수단인 것이다. 이야기꾼들이 관객에게 직접 이야기하고, 심지어 욕설까지 하는 것은 관객을 자의식에 이르게 하기 위해서이다. 이 말은 한트케가 작품을 통한 관객의 변화를 믿고 있다는 것이다.
한트케의 『관객모독』의 서술동기는 그 시대의 연극에 반대하기 위한, 그 시대 연극의 모순을 드러내주기 위한 연극이다. 역할을 파괴하기 위하여 역할을 구성하거나, 연극을 파괴하기 위해 연극을 상연한다면 그 구성과 파괴의 관계는 단지 유희이외에는 아무 것도 아니다. 그런데 이 유희인 『관객모독』속에 현실이 상연된다. 자기의 시간의 흐름을 떠나 무대위의 시간속으로 이주하고자 했던 관객들은 무대위에서 현실과 마주침으로 인해 무대위에서 자신의 제 현실문제와 대면하게 된다. 그런데 이러한 현실의 제 문제에 대해 무대는 해결책을 제시하지 않고 관객의 주의만을 환기시킨다. 이 연극에는 사람들이 어떻게 극장에 가며, 그 곳에서 무엇을 기대하며 또한 그들이 극장에서 어떻게 행동하는지를 상세히 서술했다. 그런 의미에서 이 극은 전통적인 연극의 모든 것을 바꾸려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이미 하나의 '의식 Ritual'이 되어버린 극장에 간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관객에게 분명히 알리려 노력한다. 즉 우리를 규정화하는 모든 것들을 깨뜨리는 것이다. 이러한 규정의 틀을 파괴함으로 관객은 자신의 올바른 형상화를 위해 자유로워지며, 그 토대 위에 자신의 내적 자유와 동질성을 지킬 수 있는 것이다.

*참조: 전영록,'개방희곡으로서의 Peter Hnadke『관객모독』연구', 『독일어문학』제4-2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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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밀밭 2004-05-20 21: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처음 들려요.
관객모독 보았었는데 느낌이 독특하기는 했지만 크게 공감은 못했어요. 대사와 상황이 어긋나기도 하고, 대사의 톤에 따라 대사의 내용이 다르게 전달되는 것은 재미있었어요. 극 중에서 "현실이 어쩌고"하는 대사가 있는데 기주봉인가 하는 배우가 "현실이"만 강조해서 부르니까 꼭 사람 이름을 부르는 것 같았어요. 끝나기 전 10분 동안은 관객들에게 욕설을 퍼붓는데 당황스럽기 보다는 재미있기도 헀어요.
관객이 배우들에게 관찰당하는 느낌도 들고, 관객의 자리가 좀 불편해지기도 하는 연극이었는데, 사람들의 마음을 배반하는 전개가 매력인 것 같아요.

메시지 2004-05-20 22: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희곡을 먼저 접했어요. 거기서 번역에대한 불만이 무척 많았지요. 심한 번역투가 오히려 내용을 이해하는데 방해가 되었죠. 언어극이라고도 하는데 작가가 전하고자하는 언어에대한 생각이 잘 표현되지 못하는 것 같았죠. 독일어가 꽝이라 원서를 볼 능력은 없고, 불만으로만 남아있죠. 연출의 해석과 작업이 희곡을 무대 위에서 새로운 의미와 상황으로 거듭나게 한다는 것을 확실히 보여준 작품이라고 생각해요.

비로그인 2004-05-22 00: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나도 씨원하게 물베락 함 맞아봤음 좋겠어요. 왠지 그럴 듯 해 보여요. 모욕을 당하는 곳에서 자유를 찾을 수 있다니. 캬~

메시지 2004-05-22 00: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물뿌리고 욕합니다. 아주 징허게~~

푸른별 2004-05-24 22: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한트케의 희곡은 아직 읽어보지 못하고 민음사에서 나온 그의 산문집 "소망 없는 불행"을 읽어보았는데 희곡도 한번 찾아서 읽어봐야겠네요.
 

어제 비로소 미학오디세이3을 다 읽었습니다. 많은 분들이 이책을 읽고, 좋은 리뷰를 남기셨기에 쓸데없는 사족을 덧붙이는 것 같아 리뷰는 쓰지않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읽는 책이 서양미술사입니다.

이 책은 어떤 시인이 희곡을 쓰겠다는 제게 꼭 읽어보라고 권해서 진즉에 사놓고는 그 두께와 무게에 눌려서 망설이고 있었죠. 600쪽이 넘는 책에대한 힘든 추억도 있었고 (600쪽이 넘는 책을 A4 한 장에 요약하라는 리포트를 몇 번 써 본 이후로...... 물론 공부는 엄청됩니다. 힘들어서 그렇지)

미술, 음악은 제가 학창 시절부터 피하고 싶은 과목이었습니다. 사실 요즘도 이 분야에 대해서는 피하고 싶어했습니다. (앗, 트라우마다!) 그런데 학교에서의 배움과는 달리 지금 접하는 미술과 음악은 점점 친숙한 느낌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연극과 관련해서 필요한 분야이기에 정보를 얻을 목적으로 다가섰는데 조금씩 그 자체의 미에 빠지기 시작한거죠. (삐약삐약, 첫 봄나들이를 시작하는 병아리의 심정으로 이들 분야에 다가가고 있죠) 그래서 집어든 책이 서양미술사입니다. 읽는 속도나 양에 욕심부리지 않고 천천히 감상을 해 볼 계획입니다.

도움이 될 만한 책이 있으면 소개해주십시오. 당장은 아니더라도 꾸준히 볼 계획이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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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4-05-11 21: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를 7개월간에 걸쳐 읽었숨돠. 박상륭의 [죽음의 한 연구]를 2년 동안 읽었숨돠. [세계철학사1, 2, 3]권을 15년이 다 가도록 못 읽고 있슴돠. 크하하..개인적으로 [서양미술사]! 아주 빨리 읽은 검돠! 열띰히 보고, 그리고 읽으세욧!

메시지 2004-05-11 23: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열띰히 일겠슴다. 끙끙~~~ 열띰~~~ 끙끙 ~~~열띰~~~ 무거운 책이라 힘도 좀 써야겠네요.ㅋㅋ

panda78 2004-05-15 15: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미술에 대해 아는 것은 없지만, <명화를 보는 눈><명화로 읽는 성서> <서양화 자신있게 보기><르네상스의 초상화 또는 인간의 빛과 그늘><그레이트 아티스츠>를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혹 기회되시면 한 번 보셔도 후회하진 않으실 듯. 재미도 있고 분량도 적당한 책들이라 금방 읽으실 수 있으실 거에요. ^^;;
 

후배의 결혼식이 있어서 순천에 다녀왔습니다. 순천에 가려면 여수행 기차인 전라선을 타야합니다. 전라선을 타야할 경우에는 그 여행의 목적과 상관없이  마음이 설레입니다. 창 밖의 풍경이 절경이거든요.

남원까지는 책을 보면서 갔습니다. 대체로 비슷비슷한 농촌 풍경에는 많이 익숙해진 터라 활자를 더듬느라 피곤해진 눈의 휴식을 위해 잠깐 처다보는 정도로도 충분하거든요.

그러나, 남원을 지나면서 전 책을 내려놓고 창 밖의 풍경으로 눈을 돌립니다. 지리산의 끝자락쯤이 될까싶은 푸른 산들이 짙은 안개를 품고 있는 평화로우면서도 장엄한 장면들이 계속 펼쳐집니다. 그러다 보면 기차는 긴 터널 몇 개를 치나 어느새 섬진강을 끼고 달립니다. 그 잔잔해 보이는, 크지도 넓지도 않은 편안한 섬진강의 흐름은 수수한 삶의 모습을 닮았다는 생각을 하다보면 기차는 강가에 새워진 괴목역을 지나 구례구역에 도착을 합니다. 求禮口. 예를 구하는 입구라고 풀이를 해야하나. 갑자기 옷매무새라도 잘 다듬어보게 하는 이름입니다. 산과 강이 조화를 이루는 풍경을 따라가는 전라선은 여수라는 바다에 이르러서야 마침표를 찍습니다. 순천에서 내려야 했기때문에 바다에 대한 그리움은 해소하지 못했지만 만족한 여행이었습니다.

전라선에 대한 몇 가지 특징을 소개합니다. (물론 저의 개인적 견해이며 꼭 전라선에만 적용되는 것은 아닙니다. )

1. 섬진강의 풍경과 지리산 자락의 푸른 산을 볼 수 있습니다. 날씨에 따라서는 많은 안개를 만날 수 있습니다. 구름 속의 산책.

2. 맨 뒤 칸에 타면 자신이 타고가는 기차를 바라볼 수 있습니다. 기차가 산과 강을 피해가다보니 곡선이 많습니다. 기차가 둥근 곡선을 그리면서 달릴 때 창 밖으로 달려가는 기차의 앞부분을 볼 수 있습니다. 기차 안에서 내가 탄 기차가 달려가는 모습을 보는 그 느낌.

3. 유난히 긴 터널이 많습니다. 어두워짐과 밝음의 변화도 재미있습니다. 물론 개그프로에서처럼 기차 안이 몽땅 깜깜해지지는 않지만 긴 터널이 보여주는 창 밖의 긴 어둠은 산 속에 있다는 두려움과 신비감을 느끼게 해준답니다.

오래 전에는 일출을 보기 위해 문득 여수행 기차를 탄 적이 몇 번 있었죠. 그런데 단순히 여수만이 목적은 아니였던 것 같습니다. 현실에 매몰되어 살다가 오래간만에 탄 전라선때문에 기쁜 날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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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4-05-10 13: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겨울에 전라선을 타도 아늑하고 정겹고요, 지금 신록이 우거진 5월에 전라선을 타면 그 아름다운 절경에 마음을 뺏깁니다. 저도 늘 책을 읽으면서 출발하는데 고마 창밖 풍경 덕에 시선을 옮기게 되요. 창가에 기대 턱을 괴고 스쳐지나가는 나뭇잎 하나하나에서 미묘한 해방감과 설레임도 느끼게 되구요. 참 아름답고 정겨운 땅이라는 걸 새삼 확인할 수 있습니다. 단지, 스쳐지나가는 기차 안에서 바라보는 이방인의 눈으로..물론, 풍경 속 안에는 담배 한 갑, 운동화 한 켤레, 조기 한 줄을 사려는 삶의 투쟁이 뜨겁겠지만..고속열차는 많은 우리의 것을 놓치게 할 거 같아 타지 않게 되더라고요. 엉덩이가 아프고 좀 지루하더라도 일반열차가 좋아요!

메시지 2004-05-10 13: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복돌님의 글을 보다가 제글에서 빠진 내용 하나가 생각났습니다. 기차가 남도지방에 가까와질수록 창 밖으로 밭에 놓여있는 무덤들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삶과 죽음이 동일한 공간에서 머무르고 있는 것이죠. 제주도에서 밭사이에 자리잡은 무덤을 본 적이 있는데 남도에서도 그런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자신의 일생이 담겨있을 그 흙에 묻힌 그 분들의 삶이 세간의 주목을 끌지는 못했지만 아름다웠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사실 그 안에 계신 분이 어떤 분인지 잘 알지도 못하면서.
제 외할머니의 무덤은 호남선을 타고가다보면 창 밖으로 보인답니다. 그래서 남다르죠.

비로그인 2004-05-10 18: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라게요. 메시지님 야글 듣고 봉께 참말로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공간이구만요. 외할머님 무덤을 보실 때마다 애틋허시겄어요. 모진 고통속에서 뒤돌아보면 참으로 잔잔하게 흘렀을 듯 싶은 으른들의 삶일 거 같어요. 글고 봉께 저두 고향 밭머리에다 묻어달라고나 할까봐요. 사실 전 화장제도에 찬성하기 때문에 조카들한테 죽으면 꼭 화장시켜 달랬거덩요. 이미 남에게 넘어간 밭이지만 밭 근처로 강물이 흐르고 우거진 풀숲이 있는데 거그다 확 뿌려 달라고 해야지..아항, 알겠어요. 삶도 마찬가지지만 죽음이래두 미리미리 누울 자릴 준빌 해두어야겄구만요. 정직한 땅에 뿌려지는 긴데 그 땅에 부끄라븐 사람이 되선 안 될 거 같은디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