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전한 행복
정유정 지음 / 은행나무 / 2021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역시는 역시였다. 정유정 님은 정말 대단하다. 작가의 능력이란... 새삼 감탄하게 되었다. 정유정 님이 집필하실 땐 아예 '그 사람'이 된다고, '싸이코패스'로 집필기간 내내 살아왔다고 말씀하시는 인터뷰를 본 적이 있는데 정말 그런 것만 같았다. 이 작품에서는 더더욱 그런 것 같이 느껴졌다. 심지어 화자의 입을 빌어 작품이 쓰여지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초반에는 왠지 예전처럼 잘 집중할 수가 없었는데, 정확히 딱 책의 중반부를 넘어가면서부터 초반부터 암시되었던 무시무시한 악의 모습이 점차 그려지기 시작했다. 전작을 읽을 때도 그러했나 지금은 잘 기억이 안나지만, 이번엔 유독 전율이, 공포에 의한 전율이 강하게 느껴졌다. 차이가 뭘까 라고 생각해보자면 아무래도 증오의 '대상'에서 오지 않았을까 싶다. 세상 누구보다 가까웠던, 또 가까워지고 싶었던 사람들이지만 결국 불행의 가능성이 되어버린 사람들. 그리고 누구라도 그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도 오싹했다.        
 공교롭게도 작품을 시작하는 시점에서 '엄여인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당시엔 끔찍한 이야기로만 엄여인 이야기를 들었고 바로 기억속에서 제거해버렸는데,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왠지 그 이야기가 계속 생각이 나면서 비슷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둘 다 인간이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싶어 진절머리를 치게 만든다는 점에서도 비슷했고 말이다. 끔찍한 만행을 벌이면서도 결국 '나'밖에 생각하지 못하고, '내'가 피해자라고 인식하는 끝장면에서는 결국 소름이 오소소 돋아났다. 인간에겐 행복할 권리도 있지만 타인의 행복에 대한 책임도 함께 있다는 작가님의 마지막 말이 마음에 계속 울린다. 


"행복한 순간을 하나씩 더해가면, 그 인생은 결국 행복한 거 아닌가."
"아니, 행복은 덧셈이 아니야."
그녀는 베란다 유리문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마치 먼 지평선을 넘어다보는 듯한 시선이었다. 실제로 보이는 건 유리문에 반사된 실내풍경뿐일 텐데.
"행복은 뺄셈이야. 완전해질 때까지, 불행의 가능성을 없애가는 거."

시간은 그녀에게 어떤 것도 주지 않았다. 대신 원치 않은 진실을 가르쳤다. 내일은 바라는 방향에서 오지 않는다는 것. 간절히 원한다 하여 이뤄지는 게 아니라는 것도.

안다는 건 모르는 상태로 돌아갈 수 없다는 걸 의미했다. 그중 어떤 유의 ‘앎‘은 ‘감당‘과 동의어였다.

다만 아무것도 받아들일 수 없는 때가 있다. 농담도, 비난도, 배려도, 위로도, 그 어떤 것도 원하지 않는 때.

그러게. 여기서 뭘 하고 있을까. 어쩌다 삶이 여기까지 왔을까. 무엇을 그리 잘못 살았기에.
컴컴한 허공으로 들어선 느낌이었다. 발 디딜 곳 하나 없고 앞이 보이지도 않는 곳으로 무작정 들어선 기분이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녹즙 배달원 강정민
김현진 지음 / 한겨레출판 / 2021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소설을 읽으면서 눈물 훔쳐본지가 언제인지 모른다. 이 책은 나에게 그런 책이 되었다. 사실 울 만한 내용이 아닐 수도 있다. 다소 도톰한 책 내용 대부분이 반복되는 일과와 술 얘기만 계속되기 때문에 누군가에겐 지루한 책일 수도 있다. 읽으면서 다 읽지 않아도 내용을 알 것 같단 생각까지 들었으니까. 그런데 김현진 작가는 이야기를 꾸준하면서도 완곡한 방식으로 끌고 나갔다. 사람들이 읽기를 포기하지만 않으면 이야기와 함께 더 몰입할 수 있도록 다부지게 이야기를 펼쳐주었다. 이야기가 끝을 향해 달려갈수록 나는 더 눈과 코가 시큼해졌고, 아주 만족스럽게 책장을 덮을 수 있었다. 또한 단순히 녹즙 이야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인생, 우정, 가족, 실패, 사회, 이슈, 현실, 사랑, 유머(?) 등 많은 주제를 어우르며 이야기를 전해주었다. 기억력이 좋지 않아 언젠간 지금 느꼈던 세세한 감동을 잊을 수도 있겠지만, 그때 또다시 책을 읽더라도 다시 재밌게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아, 그러고보니 책을 읽으며 깔깔깔 엄청 많이 웃기도 했다. 좋은 책이었다.  
 


의사는 나를 파악하고 싶다고 했지만 나는 나 자신을 파악하고 싶지 않다. 나 자신이 어떤 인간인지 알아봤자 좋은 일이 뭐가 있단 말인가. 의사에게 들키고 싶지 않다. 내가 의학용어로 말하자면 ‘양가감정‘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술을 끊고 싶다. 그렇지만 두렵다. 술을 끊으면 도대체 무슨 낙으로 산단 말인가. 끊고 싶으면서도 끊고 싶지 않다. 끊고 싶다. 그렇지만 끊고 싶지 않다.

과하다 싶을 때 그만둘 수 있다면, 나도 여러분처럼 스스로를 대강만 미워할 수 있을 텐데.

자기보다 한참 어린 걸 그룹 보면서 침이나 질질 흘리질 않나. 왜 남자들은 자기 외모와 상관없이 모든 여자들을 평가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는 걸까? 대부분의 동물은 교미를 하고 싶은 수컷 쪽에서 구애를 하고 자신을 화려하게 꾸미거늘, 왜 인간 수컷은 그러지 않는 걸까.

하긴 남자와 대화할 때 많은 말은 필요 없다. 그냥 웃거나, 아 정말요, 그런 이야긴 처음 들어봐요, 그래서 어떻게 됐어요? 이 정도만 있으면 모든 게 매끄럽게 흘러간다. 남자들은 사실 여자가 어떻게 생각하는지, 무슨 의견을 가지고 있는지 요만큼도 궁금해하지 않는다.

... 내가 사랑하는 것들. 나를 죽일 것을 알면서도 거둘 수 없는 이 미친 짓. 언제나 숨이 막히는 세상에서 유일하게 나를 안아주는 너. 간이 나빠지고 얼굴색이 나빠지고 평판이 나빠지고 지갑 형편이 나빠지고 건강이 나빠지고 인간관계가 나빠져도, 차마 놓을 수 없는 유일한 사랑.

마땅한 일자리도 별로 없고, 있다 해도 사람들이 너무 몰리고, 이놈의 삶이란 게 만만한 구석이 있어야지.

... 사실 나는 섹스 따위 하지 않아도 상관없다. 단지 누군가에게 안겨 잠이 들고 싶을 뿐이다. 타인의 온기와 다정함 속에서 안심하고 잠들고 싶을 따름이다. 하지만 남자란, 자주지 않으면 절대로 자고 가지 않는다.

"요즘 세상에 어느 며느리가 시부모 아프다고 간병해주거나 노후를 책임지겠어? 그래서 딸이 ‘가성비‘가 좋다고 생각하게 된 거지. 아들보다 돈 적게 들여 키워도 나중에 며느리가 안 해주는 돌봄 노동을 딸이 대신 해주잖아. 자발적으로 결혼 안 하고 ‘비혼‘으로 부모하고 살면서 실질적으로 부양하는 딸들도 생기니까, 딸이야말로 투자 대비 효율이좋다는 걸 알게들 된 거지."

"아 진짜. 줄 것처럼 해놓고, 존나 비싸게 구네."
그래, 이거다. 대한민국 남자들이 게일 분노하는 것. ‘가성비‘가 안 맞을 때, 내가 얼마나 돈도 쓰고 공도 들였는데 이제 와서 감히 거부를 해? 여자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본인의 억울함이 우선이 된다. 아마 법으로 고소할 수 있다면 그들은 기어코 그런 여자를 재판에 회부하고야 말 것이다.

어떻게 해야 할까. 어떻게 살아야 할까. ... 도대체 어디로, 어디로 가야 하는 걸까.

... 나에게는 적당히가 없다. 필름이 끊길 때마다 수치스러워서 죽고 싶다. 하지만 술이 주는 위로 없이 어떻게 이 세상을 견딜 수 있을까. 맨정신으로 살기엔 하루하루가 너무 버겁다.

삶이란 놈이 냉정해서, 유예기간을 주지 않아요. 이미 시작되어버린 지 오래되었어요. 그걸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돼요. 어른이니까요. 정면으로 맞서지 않으면 모래에 닭처럼 고개를 처박고 이건 진짜 내가 아니야, 하고 스스로에게 계속 거짓말하게 돼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편애하는 문장들 - 지극히 사소한 밑줄로부터
이유미 지음 / 큐리어스(Qrious) / 2021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지극히 사소한 밑줄로부터'. 그렇다. 이 책은 작가 이유미 님이 개인적으로 편애하는 문장들을 가져와서 그 글을 읽었을 때 생각나는 이야기나 기억 등을 풀어낸 글이다. 간결한 일상어로 편하게 쓰여진 글이라 누구나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다. 그 글에 동감하는지 아닌지는 나중 문제로 한다면 말이다.
 즉 이 글은 책 전체에서 작가가 임의대로, 취향대로 '지극히 사소한' 일부만을 발췌한 거다. 책에도 개개인의 취향이 있으니 그 속의 일부에 대해선 공감 여부가 더 크게 갈릴 수도 있을 것 같다. 실제로 이유미 님은 작가이다보니 다양하고 수많은 책들을 접한 후 그 중 일부를 책으로 냈을텐데, 나는 내 편향적 독서 취향이 뚜렷하다보니 전체적인 글에 크게 마음을 뺏기거나 하지는 않았다.  
 요새들어 여성작가들이 엄마로써의 삶에 대해, 그와 동시에 작가라는 일을 하는 고단함 혹은 그런 삶에 대해 쓴 글이 많아졌다고 느낀다. 대부분의 여자들이 일종의 통과의례처럼 지나게 되는 과정이지만, 수많은 워킹맘들이 그렇듯 작가와 엄마의 삶을 살아내는 것도 무척이나 퍽퍽할 것같다고 느꼈다. 물론 이유미 님은 그 와중에 적절히 '나는 나, 너는 너'의 균형을 잡아가려 노력하시는 듯하지만 실상 그렇게 안되는 경우도 많으니까 안타깝기도 하다. 나이가 들면 들수록 내가 평생 경험해보지 못할 제 2의 삶에 대해, 아무리 이해하려 노력해봐도 그 공감의 끝에 다다를 수 없다는 게 아쉬울 때가 있다. 


하고 싶었던 일이든 아니든, 그 일이 나를 정말 불행하게 만든다면 그만두어야 한다. 세상에 나를 망치는 데도 버텨야 할 만큼 중요한 일이란 건 결코 없으니까. 일을 하며 그 정도까지 불행해진다면 그렇게 얻은 성취감이나 돈으로 아무리 퉁을 쳐 봐야 퉁이 안 될 테니까. - 김신지, 평일도 인생이니까

모든 시즌을 통틀어 공간의 크기와 열악함, 연령대, 주조연, 지적 수준, 성격을 막론하고 남성 인물은 전부 자신의 일에 바로 몰입할 수 있는 책상 하나쯤은 갖고 있었다. 반면 여성 인물의 방 풍경은 많이 다르다. 책상 자체가 없고, 필요할 때는 화장대가 그 역할을 대신했다. - 이자연, 어제 그거 봤어?

답은 아주 명료하다. 화장대의 기능을 떠올려 보면, 여자라면 당연히 꾸미길 좋아할 거라는 믿음이나 혹은 그래야 한다는 통념이 서사적 논리를 뛰어넘어 TV 안에서 살아남은 것이다. - 이자연, 어제 그거 봤어?

‘일보다 사람을 먼저 보는 자세‘가 진짜 일을 잘하는 비결이라는 것을 말이다. 우리의 일은 언젠간 끝이 나지만, 사람과의 관계에선 끝맺음이라는 게 없는 법이다. - 강지연, 이지현, 일꾼의 말

"응, 난 당사자가 아니잖아. 자기 살고 싶은 대로 사는 걸 구경하는 재미로 부모 노릇 하는 거지, 애 낳아서 내가 나서서 성공시키려는 거면 애를 왜 낳아? 그 정성을 가지고 차라리 내가 직접 성공하거나 코치 같은 직업을 가져서 제자를 기르지."
(중략)
"그럼, 쟤는 나중에 뭐 해먹고 살지?""그걸 왜 우리가 걱정해? 본인이 걱정할 때까지 기다려야지. 우리가 먼저 걱정하면 자기가 걱정을 왜 하겠어? 인간은 편하게 살려고 태어난 존재잖아. 스스로 불편해질 때까지 내버려두자." - 박혜윤, 부모는 관객이다

먹고 사는 게 해결되지 않는다면 그건 만족스럽지도 즐거운 일도 아닌 게 되어버린다. - 이보람, 적게 벌고 행복할 수 있을까

A씨는 폭설이 내린 다음날 남자친구와 거리를 걷다가. 길가에 놓인 아담한 눈사람을 사정없이 걷어차며 크게 웃는 남자친구를 보고, 결별을 결심했다. 이유를 구구절절 설명하진 않았다. 저 귀여운 눈사람을 아무렇지 않게 파괴할 수 있다는 게 놀라웠고, 진심으로 즐거워하는 모습이 소름끼쳤으며, 뭐 이런 장난 가지고 그리 심각한 표정을 짓느냐는 듯 이죽거리는 눈빛이 역겨웠다. 눈사람을 파괴할 수 있다면 동물을 학대할 수 있고 마침내 폭력은 자신을 향할 거라는 공포도 입에 담지 않았다. 단지 둘의 사이가 더 깊어지기 전에 큰 눈이 와주었던 게 어쩌면 다행이었단 생각이 들 뿐이었다. - 이적 인스타그램

처음부터 잘하는 사람은 없다. 누구든 잘하고 싶은사람은 꾸준히 열심히 하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 편성준, 부부가 둘 다 놀고 있습니다

외출할 때 좋은 옷을 골라서 입는 건 당연하지요. 하지만 아무도 보지 않는 집에서 자신을 위해 멋을 내는것, 그것만으로도 어깨가 펴지고 기분이 밝아지며 생활이 훨씬 윤택해진 기분이 듭니다. - 이치다 노리코, 어른이 되어 그만둔 것

그렇게 된 게 씁쓸하다기보다 누구나 다 얼떨떨하고 어색한 상태로 인생의 새로운 구간에 도착하고 낯선 역할을 맡아 수행하는 거라고, 경주는 자신이 달라졌고 자신의 어떤 부분은 돌이킬 수 없다는 걸 받아들이게 되었다. - 서유미, 우리가 잃어버린 것

나는 생각했다. 아프더라도 우리 슬픔, 건드리는 편이 낫다고. 생각날 때마다 서랍을 열어 꺼내 쓰는 무언가처럼 자주 열었다 닫았다 확인하고 꺼내 써야 하는 마음이라고.
슬픔이 필요한 순간이 있다. 나와 내 곁에 사람들이 선명하게 살아있다는 사실을 깨닫기 위하여. 매일 새로운 아침을 맞이하는 일이 얼마나 고마운 것인지 잊지 않기 위하여. -고수리, 우리는 이렇게 사랑하고야 만다

"널 그렇게 힘들게 한 사람이 네 인생에서 최고의 남자일 리 없어. 잊지 마. 넌 더 좋은 사람을 만나게 돼 있어."

그런데 주 여사가 어느 날은 그런다. "늙으면 죽어야 돼. 쓸모가 없잖아." 이제는 나이 먹으니까 짐이 된다고, 짐이 되는 존재는 싫다고. 그런 말이 어딨어, 할머니. 주 여사의 대부분의 삶은 누군가를 양육함에 있었다. 그들이 모두 어른이 되자, 주 여사는 더 이상 밥 안치는 법도 세탁기 돌리는 법도 알려줄 데가 없게 되었다. "할머니는 딸이랑 사위한테 시간을 준 거잖아. 우리 엄마 아빠가 나에게 해줘야 할 일을 할머니가 대신해준 거니까, 할머니는 쓸모를 충분히 적립해둔 거야. 그러니까 쓸모없다는 소리는 안 해도 돼." - 김경희, 할머니의 좋은 점

젊을 때는 무엇이든 최선이 아니면 직성이 풀리지 않았어요. 하지만 최선이 안 될 때는 차선이라도 괜찮다고 여기는 태도가 때로는 필요하더군요. (중략) 중요한 건 최선을 알고 난 후에 ‘그럼 내가 할 수 있는 차선은?‘ 하고 생각해보는 거예요. - 이치다 노리코, 어른이 되어 그만둔 것

때로는 걱정한다는 이유로 모든 위로의 말을 꺼낼 필요가 없다. 상처를 상기시켜주기보다 조심스레 덮어주는 것도 위로의 제스처가 될 수 있다.

인간의 뒷모습이 인생의 앞모습이라는 것을. 자신의 뒷모습을 볼 수 없는 인간은 타인의 뒷모습에서 인생의 얼굴을 보려 허둥대는 것이다. - 신형철,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몸은 열을 내거나 통증을 느끼게 해서 몸의 주인에게 확실하게 메시지를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식사와 생활습관, 휴식, 마음가짐 등등 바꿔야 할 것이 있다는 것을 지금이 그때라는 것을 말이지요. - 히로세 유코, 나를 믿으며 살아도 괜찮아요

오늘 무엇이 좋았고 힘들었는지 요즘 무슨 생각을 하며 사는지 시시콜콜 나누고 싶었다. - 서유미, 우리가 잃어버린 것

포기할 건 포기하자. 못하는게 있으면 잘하는 것도 있지. 대단한 걸 잘하려고 하지 말자. 작은 일이라도 당신을 기쁘게 하는 일이 분명히 있다. 그것에 만족하면 삶이 풍요로워진다. 큰일은 잘하는 사람이 따로 있다. 나 같은 사람은 작은 일을 하며 소소하게 기뻐하면 된다.

나 혼자가 아니라는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얼마나 든든하던지. 날 이해해주는 한 사람만 있어도 살만하다더니. (...) 어떻게 모두가 나를 이해해줄 수 있을까? 단 한 명이라도 나와 비슷한 형편에 있는 누군가가 내 처지를 알아주면 그걸로 충분하다.

마음속을 들여다보면 제각기 고민도 있겠지만, 그러나 이렇게 공연을 보고, 돈가스를 먹고 (그후 케이크도), 올해도 좋은 한 해 보내자고 서로 웃으며 집으로 돌아온다. 그럴 때면 ‘인생의 의미‘ 같은 것을 조금쯤 발견한 것 같은 기분이 든다. - 마스다 미리, 전진하는 날도 하지 않는 날도

부럽다는 감정을 내가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가에 대한 에너지로 쓴다면 그리 해롭지는 않을 것이다. 마음을 다해 차분하고 싶고 심각할 정도로 즐겁고 싶다. -김사월, 내가 원하는 새벽으로

행복의 척도는 필요한 것을 얼마나 많이 가지고 있느냐에 있지 않다. 없어도 좋을 불필요한 것으로부터 얼마만큼 홀가분해져 있느냐에 따라 행복의 문이 열린다. - 법정, 스스로 행복하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술과 바닐라
정한아 지음 / 문학동네 / 2021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책에서 손을 뗀지 무려 3개월만이다. 이렇게 시간이 흘렀었나. 처음 한달은 읽을 만한 책도, 빌리거나 얻을 루트도 마땅치 않아 지켜만 보던 시기였다. 이후에는 머리를 다쳐서 회복하는 데 오랜 시간이 흘렀고, 책 읽는데 시간을 보낼 만큼 마음의 여유나 몸의 여력도 없었다. 3개월이 지나고 나서야 이제 겨우 단편소설 한 권을 읽었다지만, 다시 책을 읽을 수 있게 되서 너무 좋았다.

 정한아 님과 그녀의 책은 처음 접했다. 그런데 읽으면서 뭐랄까 공감도 많이 가고 여러가지 생각도 하게 되는 그런 소설이었다. 여자라서 작품의 느낌에 크게 공감할 수 있었던 것일까. 특별히 그런 건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여자로서 갖는 위치라든가 꼭 겪어야 할 인생의 과제라든가, 그안에 숨겨져있을 마음을 짐작하는 데 어려움이 없었다는 건 맞는 것 같다.

 꾹꾹 눌러담고 잘라낸 문장 속에서 작가로서 또 엄마로서 갖게 된 마음과 그녀의 생활을 알게 되었다. 얼마나 힘들었을지 얼마나 서글프며 또 기쁘고 불안했을지, 감히 가늠이 안되지만 그런 마음들이 묘하게 더 내 마음에 와닿았다. 언젠가 서점에서 작가의 이후 작품을 만나게 된다면 더욱 반갑게 마주할 수 있으리라, 이번 만남이 끝이 아닐거라 믿으며 응원해본다. 


나중에 연주는 미연에게 부산에서 뭔가 섭섭한 일이 있었느냐고 물었다. 미연은 침묵했다. 그녀는 그 여행에서 하나도 기억에 남는 것이 없었다. 다만 첫날 연주가 입고 있던 코트만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어린 새의 솜털처럼 빛나던 코트, 미연은 그날 자신의 무거운 검정색 패딩을 팔에 걸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것들이 정말 관계를 멀어지게 했을까? 그녀는 쉽게 대답할 수 없었다. 그들이 이제 너무 달라졌다는 사실만 더듬더듬 되뇌었을 뿐이다.

"아이를 키우는 일은…… 그런 것에 익숙한 사람은 아무도 없어. 누구나 처음부터 배워나가는 거야.

언제까지나 과거에 사로잡힌 채 살아갈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비록 모든 아름다운 것이 과거에 있다 할지라도.

"없는 게 더 나은 가족도 있어." 그것은 내가 입버릇처럼 하던 말이었다. 그런데 왜 그의 ‘없다‘는 말이 가슴에 와 박혔는지 모를 일이었다.

나는 노인이 아니다, 라고 할머니는 종종 말했다. 돈을 버는 사람, 자기 삶의 수단을 가진 사람은 쉽게 쓰러지지 않는다고.

나는 할머니의 모습을 휴대폰 카메라에 담고 싶었지만 인생에서 정말 중요한 것이 그렇듯 그 순간은 금세 사라져버렸다. 나는 그것이 두고두고 아쉬웠다.

아무것도, 한 발자국 걸어가는 것도 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주 무거운 옷을 입은 것처럼, 온몸이 물에 젖은 솜처럼 늘어졌다.

그녀의 투병을 지켜본 사람들은 모두 그에게 감탄했다. 그녀도 그가 애써줬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때로는 제발 입을 다물어줬으면 했다. 그가 하는 말은 조금도 위로가 되지 않았다. 그녀는 그가 아닌 누군가가 옆에 있어줬으면 했다. 그녀와 함께 추락하고, 함께 부서지고, 함께 신음하는 누군가, 그녀의 고통을 이해하고 공감해줄 누군가가.

아니, 피가 말라 죽는 기분이 어떤 건지 너는 몰라. 자신의 몸에서 풍기는 악취를 맡는 기분이 어떤 건지. 온몸에 생긴 푸른 반점을 발견하는 기분이 어떤 건지, 팔다리가 조각나는 듯한 고통이 어떤 건지, 너는 몰라, 정말 무서운 건 자신의 몸에서 일어나는 일이라는 걸, 너는 모르지.

자신의 민낯을 가리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것도, 다른 사람의 민낯을 보면서 허둥대는 것도 아직은 힘에 부쳤다. 예전에는 어떻게 이들과 조화를 맞추었는지 까마득하기만 했다.

어느 날부터 내가 그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의 지친 얼굴이 나를 발견하고 환하게 밝아지는 순간, 그 순간이 점차 나를 길들였다. 나는 그를 구해주고 싶었고, 그가 나를 구해주기를 바랐다.

나는 야윈 그의 어깨에 기대 눈을 감았다. 죽어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적당히 연명하다가 어느 순간 숨이 끊어지면 그뿐이라고, 부모 없이 할머니의 손에서 자란 탓인지, 나는 늘 그런 생각을 하며 살았다. 너무 일찍이 노인이 되는 법을 배운 것이다.

문은 지금껏 내가 만난 남자들과 달랐다. 내성적이고, 그늘이 짙었다. 그런 문이 내 손을 잡고서 무섭다고 말했을 때, 단단한 둑처럼 막아놓은 마음이 무너져내렸다. 나는 그와 함께 끝까지 가고 싶었다. 영원히 도망치고 싶었다.

그곳에서 보았던 밤하늘, 별, 그리고 옆에 있는 문의 체온, 그것은 내가 인생에서 유일하게 진실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들이었다. 하지만 다음 순간 눈을 떴을 때, 전부 사라지고 없었다. 아예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사라져버렸다. 남아 있는 것은 나, 곤혹스러운 나의 존재뿐이었다.

나는 그에게 들어야 할 이야기가 있었다. 왜 그런 식으로 나를 떠났는지,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 따뜻한 포옹 한 번 없이 왜 그렇게 도망치듯 사라져버렸는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옥상에서 만나요
정세랑 지음 / 창비 / 2018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정세랑 님의 작품은 처음 읽어봤다. 그런데 정말 기발한 상상력에 놀랐다. 단편들이 엮여있다보니 그 와중엔 내용보다 통통튀는 묘사가 더 마음에 드는 글도 있었지만, 어쩜 이렇게 귀엽고 발칙한 상상력으로 글을 엮어냈는지 매번 놀라게 됐다. 특히 나는 상상력과는 거리가 먼 부류라, 이렇게 환상적인 이야기를 현실에서 이질감 없이 풀어내는 모습이 인상깊었다. 이 책의 단편들을 엮어내는데 총 9년이 걸렸다는데, 그동안 내 취향과 다르다고 해서 너무 쉽게 책을 평한 것 같아 왠지 반성하게 되었다.  


집에 오는 길에 열여덟번째 여자는 세상이 얼마나 불공평한지를 심각하게 생각했다. 축의금 같은 사소한 문제부터 시작해 훨씬 큰 문제로 이어질 것이다. 결혼은 겉의 포장을 걷어내면 결국 법의 문제, 제도의 문제, 보호의 문제이니 말이다.

"요즘은 내가 원했던 것도 사실 결혼이 아니라 법의 보호를 받는 동거가 아니었나 싶더라고."
결혼한 지 가장 오래된 친구가 말했을 때였다.
"근데… 나는 사실 결혼이 하고 싶어. 그 사람이랑 보란 듯이 식도 올리고 싶어. 가족들이랑도 교류하고."
동성애자인 친구가 머쓱해하며 털어놓았다.
"뭐? 왜? 결혼 완전 피곤하고 촌스러운데, 싫은 친척이 두배로 생기는 거라고."
... "나도 좀 해보고 싫어하는가 할게. 동거도 좋고, 시스템 안에 들어가는 것도 좋지만 일단 외치고 싶어. 우리 둘이 계속 함께하기로 정했다고. 그 결정으로 우리둘이 고립되는 게 아니라 연결망 속에 놓이고 싶고."

"그럼 우리 결혼할까?"
"결혼하고 무슨 상관이야?"
"그래도 결혼하면 굳이 애써 만나지 않아도 겨울 내내 껴안고 있을 수 있지 않을까?"
"그럴까?"
그래서 두 사람은 결혼을 했다. ... 맨살과 맨살 사이의 온기, 그것을 위해.

결혼의 여러가지 속성에 대해 미리 알았던 편이지만, 이토록 빛잔치가 될 줄은 상상하지 못했다. 빚을 기억하느라 드레스의 디자인 같은 것은 하얗게 잊고 말았다.

사람들이 얼마나 쉽게 선을 넘는지 새삼 놀라웠다. 당신은 나에게 그런 질문을 던질 만큼 가깝지 않아요, 하고 대답하고 싶은 걸 매번 참았다.

두번은 넘어갈 수 없었다. 둘 다 일하는데 식사 준비를 여자가 하는 건 여자의 자발적인 기여일 뿐이었다. 남자가 뭔가 크게 착각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남자가 잠결에 실수로 여자를 때렸다. 팔꿈치로 눈두덩을 힘껏친 것이다. 여자는 멍이 들었다.
"미안해, 정말 미안해, 좀비 꿈을 꿨어."
남자는 공포영화를 잘 못 보면서도 즐겨 보는 편이었다. 이해할만한 일이었지만 여자는 화가 났다. 3일쯤 화가 풀리지 않았다.
4일째가 되어서야 여자는 깨달았다. 여자는 화가 난 것이 아니었다. 두려운 것이었다. 그때까지 인식하지 못했지만 두 사람 사이엔 압도적인 힘의 차이가 있었다. 나중에 남자가 머리를 다치거나 치매에 걸리면 어떡하지? 성격이 변해서 때리고 목을 조르면 어떡하지? 최악의 상상들이 연이었다.

"입을 모아 내가 부족한 존재라 해서 정말 부족한 줄 알았어. 결혼을 해야 어른 취급받는 건 너무 이상하지 않니? 그래서 착각한게 아닐까, 꼭 해야 하는 숙제로, 너는 나처럼 생각하지 마. 요즘 비혼 이야기 많이 나오는 거 반갑고, 나도 이런 시대를 기다릴걸 그랬다 싶어."
"언닌 가진 게 있어서 쉽게 말하는 거야."
"그래? 속 편한 소린가?"
"모르겠어. 나도 이 생각 저 생각 많이 하는데, 사회가 너무 기혼자 중심인걸."
"사회는 바뀔 수도 있어. 생각보다 빨리."
"어쨌든 지금은 숙제를 해오지 않은 학생에게 지나치게 가혹한 옛날 선생님 같잖아."

"나처럼 가부장이 아닌 사람이 어딨다고?"
"당신 한 사람으로 결정되는 게 아니야. 예를 들어 지난 제사 때 생각해봐. 나는 조퇴하고 가서 아홉시간 일했지. 당신은 퇴근하고 와서 한시간, 절 몇번 하고 과일 집어먹고 사촌동생들이랑 논 게 다잖아."
"그럼 두 사람 다 조퇴했어야 했다고?"
"내 말은 그런 시간들이 계속, 평생에 걸쳐 쌓인다는 거야. 쌓이다. 보면 큰 차이가 나는 거고, 생각해보면 이상하지 않아? 당신 할아버지 제사잖아? 난 만난 적도 없는 분이야. 왜 효도를 하청 주는데?"
"하청이라고까지 말하면......"
"아홉시간 일한 며느리들은 제사 지낼 때 아무도 절도 안하고 뒤에 멀뚱멀뚱 서 있지."
"몇년 전에 며느리들도 절하는 걸로 바꿀까 했었는데 큰어머니 무릎도 안 좋으시고……"
"어쨌든 그게 가부장제야. 당신 눈에는 안 보여도 내 눈에는 보여. 내 눈에만 보이는 게 아주 많아."

"이런 결혼식은 처음 봐. 양쪽 집안 다 한 재산 챙기겠구먼."
그런가, 그게 본질인가. 여자는 아득하게 생각했다. ‘화환은 정중하게 거절합니다‘라는 문구를 청첩장에 쓰려 했을 때 아버지가 지우게 한 게 새삼 다시 떠올랐다.

"불행은 보이지 않는 모퉁이 너머마다 서 있다가 지나가는 사람을 놀래키고, 인생은 그 반복일 뿐이라고 누가 그랬어. 그 말이 맞는 거 같아. 우리 둘은 이제 불행 공동체가 된 거라고."

슈거파우더로는 거의 모든 걸 덮을 수 있지. 사람들의, 관계의 가장 저열하고 싫은 부분까지도 말이야.

"그만둬버려. 굶어죽기야 하겠냐? 이제 경력이 있으니까 또 금방 취직될 거야."
주변 사람들의 그런 말에 설득될 때도 있었지만, 나는 두려움을 이겨내지 못했어. 서른개쯤 넣으면 하나쯤 다음 단계로 통과되는 이력서를 가지고 두려움이 없었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겠지.

국제암연구소에 의하면 심야노동은 2급 발암물질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돌연사의 원인으로는 몇위쯤 될까. 언니는 입사 이래 줄야근을 했지만 누구나 그렇게 살기 때문에 티도 나지 않았다.

짝사랑은 모멸감을 잘 견디는 사람만이 할 수 있었다.

"언제든지."
여자친구가 말했다. 언제든지 돌아오라고? 전화하라고? 메일 쓰라고? 나는 의미를 알 수 없었다. 그럴 땐 똑같이 말하는 게 제일 좋다.
"언제든지."
나도 말했다.

비교하지 않으려 해도 비교하게 되었다. 다른 사람들의 삶은 근사하고 자신만 지옥에 버려진 듯한 날들이 이어졌고, 짓무른 마음을 들키지 않으려 애썼지만 종종 들켰다.

‘싱글로도 커플로도 살기는 녹록하지 않다. 둘 중 어느 쪽을 고른다 해도 그 나름의 장단점이 있어서다. 이때 중요한 것은 삶의 가중치를 어디에 두느냐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