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 Homecoming K-픽션 8
천명관 지음, 전미세리 옮김 / 도서출판 아시아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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끔찍한 디스토피아. 영어 연습을 할겸 K-Fiction Series를 빌렸고, 이 소설에 대한 아무런 사전적 정보가 없었다. 하지만 첫 장을 읽기 시작하면서 영어 읽기는 포기하고 단숨에 다 읽어버렸다. 소설의 내용도 공포스러웠지만 이런 몰입감을 아주 가볍게 선사하는 작가님의 필력도 무서울 정도였다. 

  나영석 PD가 '삼시세끼' 등 예능을 준비할 때 주목하고 구상하려 했던 건 'affordable fantasy'라고 했다. 사람들이 원하는 건 그냥 판타지가 아니라 'accecible' fantasy이고, 그것 때문에 '삼시세끼'(를 비롯한 나영석표 예능작품들)가 많은 사람들의 호응을 얻으며 히트를 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의 방점은 'affordable, accecible'에 찍혔다. 스치듯 들었던 그 얘기가 갑자기 생각난 건, 이 책을 읽으며 느꼈던 공포감, 전율, 두려움 같은 것들이 충분히 'imaginable, affordable, accecible'하기 때문이었다. 여느 SF소설에서 마주할 법한 그런 느낌이 아니었다. 그래서 책을 읽고 나서는 한동안 뭐라 말할 수 없는 감정 혹은 충격에 휩쌓였던 것 같다. 

  무려 MB가 영감을 준 이 책의 스토리. 과연 우리는 이 현실을 바로잡을 수 있을까. 지금의 현실이 더 나은 미래을 향해 나아가도록 방향키를 바꿀 수 있을까. 많은 걱정과 한숨이 생겼지만, 그의 강력한 스토리텔링을 느끼고 기쁜 것도 있어서 다소 씁쓸한 미소가 지어졌다. ;)


‘회사원이 되기 위해선 대학을 가야했고 그래서 다들 기꺼이 끔찍한 학창시절을 견뎌냈다. 하지만 그 달콤한 꿈은 이제 악몽이 되어 실업의 공포와 비정규직의 절망만이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과연 희망은 있을까?‘ - 창작노트 중

The world of "Homecoming" represents not some remote future, but a clear sense of present reality. - 정은경, ‘21세기 자본‘에 새겨진 조감도 (작품 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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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한 불행 - 부서지는 생의 조각으로 쌓아 올린 단단한 평온
김설 지음 / 책과이음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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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도 모르고 자식도 모르고 인생의 고난도 아직 많이는 모르는 내가 감히 평할 수 없을 만큼 깊고 짙고 어둡고 힘든 결혼생활 이야기가 잔뜩 담겨있다. 결혼에 대한 이야기지만 절대 밝지 않다. 어두컴컴한 책 표지 속 가녀린 여자처럼, 저절로 한숨 짓거나 가슴을 쓸어내리며 눈물 짓거나, 기도밖에 할 수 없을 인생의 중차대한 변곡점이 될지도 모르는 결혼 생활에 대한 이야기. 삶의 지독한 구렁텅이에 대한 이야기. 결혼의 함정에 관한 이야기. 이렇게 얘기하면 누군가는 나에게 뭐라 할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정말 이 책을 이제 막 결혼하려거나, 결혼을 꿈꾸거나, 이혼을 했거나, 이혼 후 재혼을 하려거나, 이미 했을 그 모든 사람들에게 축복이자 추천의 말로 이 책을 전하고 싶다. (저주의 책이 아니니 오해없기를.)

  비록 결혼은 하지 않았지만, 불행한 결혼생활의 표본을 작가님처럼 나도 부모님에게서 보았고, 아직도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보고 살 운명이기에, 지독하게 공감할 수 밖에 없었다. 읽으면서 저절로 감정이입이 되서 얼굴이 마구 구겨지기도 하고 입이 떡 벌어질 수밖에 없는 그런 이야기들. 이런 걸 어떻게 견디지, 하는 결혼해서 마주한 삶의 굴곡들과 진창들. 어둡고 힘든 이야기들이 가득한 책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어려운 결혼생활을 결국 받아들이며 삶의 한 부분으로 인정하고, 이제는 평온과 행복에 이르러가는 그 과정이 정말 대단하게 느껴졌다. 그래서 더욱 좋았다. 깨볶으며 잘 살고 있는 부부에게 건네면 조금 이상할 수도 있지만, 그래도 내 주위의 많은 사람들에게 꼭 추천하고 싶은 책이다. 



부부 사이에 증오나 미움이 끼어들면 가정은 회의감으로 가득 찬 공간이 된다는 것. 나는 부모를 통해 그 중요한 사실을 알게 됐다.

사랑도 같은 맥락이다. 사랑이 지긋지긋하다거나 사랑을 믿지 않는다고 말했지만, 사실 나는 누구보다 사랑을 믿고 싶은지도 모른다. 약지 못하고 멍청한 나는 사랑이라는 놈이 몸집을 부풀리는 것을 감당하지 못할 게 불 보듯 뻔하니까, 지레 겁을 먹고 사랑 같은 건 믿지 않는다고 일찌감치 선언하는 것이다. 그렇게라도 해야 과거로 돌아가는 것을 막을 수 있고 다가오는 사랑 앞에 바리케이트도 칠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우연히 읽은 책에서 니체가 결혼할 때 자신에게 꼭 해야 할 질문을 알려줬다.
"이 사람과 늙어서까지 대화를 잘 나눌 수 있을까?"
니체의 질문은 내게 도끼가 되었다.

사람들은 대부분 나쁜 사람에게 곤란을 당한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착한 사람에게 난감한 경우를 당하는 비율이 더 높다. 나쁜 사람은 피하면 되지만, 착한 사람은 피하기 쉽지 않다. 특히 여자를 곤란하게 하는 것은 착한 남자다. 자신이 착한 사람이라고 여기는 남자는 다른 사람의 삶에 툭 끼어들어 민폐를 끼친다.

나라고 바라는 게 없었을까. 책 읽기를 좋아하는 사람이기를, 술에 먹히는 사람이 아니라 술을 즐기는 사람이기를, 운전대를 잡으면 미친놈이 되지 말기를, 상식적인 사람이기를....... 밤새 희망사항을 삼켜도 남편은 달라지지 않았다.

나는 아내의 잔소리 때문에 못 살겠다는 남자를 보면 그 집의 무사태평이 그려진다. 오늘 점심 메뉴는 뭐였는지, 몇 시에 들어올 건지, 옷매무새가 좋니 나쁘니, 양복에서 낯선 여자의 향수 냄새가 나느니 등등 샅샅이 참견 안 하는 구석이 없는 아내가 집에 있다는 건 아직 행복하다는 증거라고 생각한다. 어떤 위기가 닥치면 여자는 오히려 관대해진다. 하루하루 사는 게 지겨워 죽겠는 판에 잔소리는 무슨 잔소리. 포기하게 되는 게 인지상정이다. 어릴 때는 관대함이 따뜻한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믿었다. 다 뭣 모르고 한 생각이다. 관대함은 많은 걸 기대하지 않으면 자연스럽게 생긴다.

상대에게 뭘 해서 상처를 주는 사람도 있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아서 상처를 주는 경우도 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이 주는 상처는 오히려 더 깊을 수 있다는 걸, 아무것도 하지 않는 남편에게 상처 받으며 알게 됐다.

"바꿀 수 있는 걸 바꾸는 용기와 바꿀 수 없는 걸 받아들이는 마음의 평정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 차이를 아는 현명함도 필요하다."
영화 <까밀 리와인드>에 나오는 대사다. 나는 영화의 주인공 까밀처럼 바꿀 수 있는 것과 바꿀 수 없는 것을 구분하는 영리함이 없다. 그러니 당장은 있는 그대로 운명을 받아들인다. 바꿀 수 없는 것을 받아들이면 마음에 여백이 조금 생기니까. 그 여백이 일단 숨은 쉬게 만들어주니까.

돈은 사람을 잡아채 흔들어 버린다. 오랜 시간 돈에 휘둘린 사람은 돈이 무섭다. 남의 돈은 더욱 무서워서 사람들에게 이유 없이 돈을 쓰게 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체념과 초월을 구분해서 적절히 받아들이니 인생살이가 조금은 편해졌다. 말이 좋아서 초월이고 체념이지 결국 포기다. ‘에라, 모르겠다. 사는 게 뭐 별거냐‘ 하고 포기하는 것이다. 살아보니 포기만큼 정신 건강에 좋은 게 없다. 그렇게 즐거운 포기를 하나둘 쌓으며 나이 들고 있다.

살아보니 부부는 서로 사랑하는 것과 동시에 미워하는 것이 당연했다. 이런 마음을 두려워하지 말았어야 했다. 올바르게 미워하는 일이 매섭게 대립하는 것보다 나았다.

살아보니 행복은 노력해서 얻는 게 아니었다. 철저히 계획해서 행복을 얻었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했다. 행복은 그저 어떤 행동이나 사건의 부속품 같은 거였다. 아무리 잡으려 해도 잡히지 않던 행복이라는 그것이 반쯤 감긴 내 눈에 슬쩍 내려앉고 있다.

습관적으로 쓰는 말 ‘평안하고 무탈하기를 기원합니다‘가 얼마나 귀하고 소중한 것인지, 요즘은 매일매일 마음으로 깊이 깨닫고 있다. 평안하고 무탈할 수 있다면 나는 무엇이든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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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학의 눈으로 보면 녹색지구가 펼쳐진다 - 지구환경의 미래를 묻는 우리를 위한 화학 수업 내 멋대로 읽고 십대 7
원정현 지음 / 지상의책(갈매나무)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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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소년을 위한 화학 수업. 청소년 책이지만, 어른이 읽기에도 충분히 좋은 책이다. 마치 글쓴이가 청소년들에게 직접 수업을 하는 것처럼 상냥하고 따스한 어투의 존댓말로 설명해주시고 그만큼 더 쉽게 풀어서 설명해주셔서 좋았다. 나중 되면 다 까먹을 화학식과 설명이긴 하지만, 보다 잘 이해하기 위해 천천히 씹어서 소화시키느라 꽤 오랫동안 곱씹으며 읽었다. 알고 있던 내용도 있지만 미처 알지 못했던 내용들도 많아서 놀랍기도 했고, 이 지구환경이 새삼 더 많이 걱정스러워지기도 했다. 원래도 낭비가 심한 편은 아니었지만, 이 책을 읽고 있는 동안엔 유독 더 내 생활과 주변에서 편함과 바꿔쓰는 플라스틱 소모품들에 마음을 쓰게 되었던 것 같다. 환경을 생각하는 현명한 소비자가 되도록 다시 마음을 가다듬어야겠다. 



‘우리가 저녁 반찬으로 먹을 고등어구이 속에 세슘이 잔뜩 들어 있다고 생각해보세요. 우리 몸은 세슘을 칼륨으로 착각해서 열심히 받아들이겠죠. 인체로 들어온 세슘은 근육이나 피하 지방에 쌓입니다.
문제는 세슘 중에서도 원자량 137인 세슘, 즉 세슘-137이 우리 몸 안에서 핵분열을 한다는 사실이에요. 몸 안으로 들어온 세슘-137은 핵분열하는 과정에서 방사선과 에너지를 방출합니다. 몸 안에서 마치 원자폭탄이 터지는 것과 똑같은 현상이 일어나는 셈이죠. 세슘-137이 방출하는 방사선은 우리 세포 속 DNA 구조에 변형을 일으키고 DNA의 화학적 성질을 변화시킵니다. 그 결과 우리 몸에서는 각종 암이 유발될 수 있어요.‘

‘세계보건기구에 의하면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이 버려진 쓰레기 품목 2위가 담배 용품이었다고 해요. (* 1위는 일회용 음식 포장재이다.) 누군가가 버린 담배꽁초(즉, 미세 플라스틱)를 조개류나 어류가 삼키고, 조개류나 어류가 삼긴 미세 플라스틱이 다시 우리 몸 안에 들어온다고 생각해보세요. 유쾌하지만은 않은 상상일 것입니다.
자연에는 쓰레기가 없지만, 인간이 만들어 쓰고 버린 쓰레기는 사라지지 않고 지구의 어딘가에 가닿습니다. 태평양 거대 쓰레기 지대와 미세 플라스틱은, 쓰레기가 내 눈앞에 보이지 않는다고 하여 끝난 것이 결코 아님을 보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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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을 아는 사람 - 유진목의 작은 여행
유진목 지음 / 난다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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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세이의 홍수 속에서 누가 진짜 작가의 무게를 간직한 사람인지 구별해내기가 더욱 어려워졌다. 특히나 여행 에세이는 더욱 좋아하지 않는다. 여행지는 여행지 자체로도 특별하고, 가지 않은 사람이 여행을 떠난 사람의 낭만과 감성을 동경하는 것은 어느 정도 당연하기 때문이다. 이 책이 여행에 대해 말할지는 몰랐다. 나는 그저 작가와 그녀의 전작들에 주목했고, 그녀의 '살고 싶지 않은 마음'을 들여다본 적이 있기 때문에 이 책을 골랐는데 결과는 아주 만족스러웠다. 비슷비슷한 여행지의 사진과 여행 이야기를 보고도 별로 라고 느끼지 않을 수 있단 걸 알게 됐다. 이런 책이 진짜 자신의 이야기가 담긴 여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녀가 나만큼이나, 아니 나보다 훨씬 더 '죽음' 혹은' 죽음을 선택할 수 있기'를 갈망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그것까진 아직 잘 모른다. 나는 그녀를 책 몇 권을 통해서만 듬성듬성 알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곳에 적힌 그녀의 이야기에 아주 충분히 공감이 되었고, 나 또한 그런 심정을 알기 때문에 나도 그녀처럼 어디론가 가고 싶단 생각까지 들었다. 어차피 곧 죽을 거라면. 

  살면서 죽음을 외면하며 사는 것보다 언젠간 받아들여야 할 관문으로 마주할 필요는 있겠지만, 늘 죽음을 원하는 마음으로 사는 사람의 힘듦은 차원이 다를 것이다. 그녀를 통해 조금이나마 그 힘듦을 엿봤기에 그녀를 위로하고 싶었고, 나 또한 늘 그런 마음이었기에 책을 읽으면서 조금이나마 위로를 받을 수 있었다. 하노이에 있으면서 조금은 가벼워졌을 그녀의 슬픔과 삶을 응원한다. 나도 언젠가 나만의 하노이를 찾아 떠날 수 있길.  



어째서 계속해서 살아가야 하지? 나는 여지껏 대답하지 못하고 계속해서 살아왔다. 아무 이유 없이 살아야한다니.

사람이 너무 죽고 싶은데 그것을 참으면 계속 자게 된다. 평소에 아무리 자려 해도 잠이 오지 않아 꼬박꼬박 수면제를 먹는 사람이 하루에 스무 시간 정도는 거뜬히 잘 수 있게 된다.

그저 살아 있으면 좋겠다. 살아 있는 것을 흉내 내느라 스스로 지치지 않았으면 좋겠다. 죽고 싶다는 생각은 그만하면 좋겠다. 빨래를 개서 가지런히 제자리에 놓고 방문을 닫으면 좋겠다. 화분에 물을 주면 좋겠다. 밥을 짓고 설거지를 하면 좋겠다. 저녁약은 안 먹어도 되면 좋겠다. 아침약을 먹고 하루를 잘 보내면 좋겠다.

매일 시를 쓰면 좋겠다는 욕심은 갖지 말도록 하자. 어느 날은 쓸 수 있고 어느 날은 쓸 수 없음을 받아들이자. 쓸 수 없는 날에는 남의 좋은 것을 보도록 하자. 무엇이 좋은지 또 무엇이 나쁜지 분별하도록 하자. 그리고 나도 좋은 것을 만들자. 부디 그렇게 하자. 다시는 그렇게나 오래 잠들지 말자.

나는 마음이 아닌 소명을 따라 움직이는 사람을 동경한다. 루틴을 거스르지 않는 사람을 동경한다. 자기 마음을 들여다보는 대신에 세상을 통찰하는 사람을 동경한다. 타인의 슬픔을 제 것으로 가지는 사람을 동경한다.

나는 슬픔이 없는 사람을 경멸한다. 아니, 슬픔을 모르는 사람을 경멸한다. 슬픔을 모르는 사람은 매사에 무례하다. 슬픔을 모르기 때문이다. 슬픔을 모르는 사람은 매사에 자신이 옳다. 슬픔을 모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슬픔은 중요하다. 슬픔이 있는 사람은 무례하지 않다. 슬픔이 있는 사람은 자신의 틀림을 가늠해본다. 슬픔이 있는 사람은 모든 말을 내뱉지 않는다. 슬픔이 있는 사람은 적절히 타인과 거리를 둔다. 슬픔이 있는 사람은 타인을 해하지 않는다. 슬픔이 있는 사람은 매사에 조심한다. 슬픔이 있는 사람은 공감할 줄 안다. 그래서 슬픔이 있는 사람은 조용히 타인을 위로한다.

사람들은 각자의 슬픔을 품고 살아간다. 슬픔은 없애버려야 할 것이 아니다. 상처는 낫고 슬픔은 머문다. 우리는 우리에게 머물기로 한 슬픔과 함께 살아가야 한다. 슬픔은 삶을 신중하게 한다. 그것이 슬픔의 미덕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하노이의 ‘무엇- 없음‘에 나는 매료되었다. 파리가 날아다니는 노점에 혼자 앉아 하염없이 커피를 마시는 것. 그냥 아무데로나 걷는 것. 감탄할 풍경보다는 가지 말아야 할 곳을 분별하는 것. 먼지가 쌓이고 곰팡내가 나는 기념품을 구경하는 것. 사고 싶은 것이 없어 그냥 나오는 것. 빈 손으로 걷는 것. 길바닥에 맨발로 앉아 있는 사람을 보는 것. 가까이 다가가 단숨에 셔터를 누르는 것. 눈을 마주치고 함께 웃는 것.

불행한 사람에게 희망은 없는 것만 못하다. 그러나 불행이 그저 있는 것처럼 희망도 그저 있다.

필름을 인화하면 내가 속했던 순간의 한 조각을 가질 수 있다. 이 순간들은, 사진은, 나보다 이 땅에 오래 남을 것이다. 사진의 위안은 이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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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벽한 케이크의 맛 마음산책 짧은 소설
김혜진 지음, 박혜진 그림 / 마음산책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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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완벽한 케이크의 맛이었다. 

  책에 대해 붙이고 싶은 설명들과 해석할 수 있는 많은 말들을 머리 속에 담아두고 있었지만, 책을 덮으며 '완벽한 케이크의 맛'이었다고 느낀 후 작가의 말을 다시 한 번 읽어보니 어떤 사족도 붙일 필요 없이 모든 것이 더할 나위 없어졌다. 그저 이 책을 추천만 할 수 있을 뿐.

  김혜진 작가 님은 내가 좋아하는 분이다. 그녀가 쓰는 글의 온도는 내가 필요로 하는 온도와 맞아 있고, 그 분의 글을 통해 항상 위로와 공감을 느껴왔다. 이번 책에 함께 해주신 박혜진 그림 작가 님도 책에 완벽함을 더해주셔서 너무 좋았다. 

  이 책에서 그려진 '말'은 곧 '선(벽)'의 문제이다. 어떤 생각과 말은 말해져서 관계의 선이 되고 벽이 된다. 완벽한 케이크에도 선이 있다. 위 아래 층이 섞일 수 없도록 하는 한 겹 한 겹의 층(layer). 우리가 사는 사회도 이런 선들과 벽으로 가득 채워져 있다. 내가 뱉은 말, 내가 보인 태도, 그 층과 벽에 어떤 순간엔 가슴이 턱 막히고 나의 뒤를 돌아보게 되기도 하지만, 하려다 '삼킨' 말들도 분명히 존재했다. 서로의 가슴에 켜켜이 쌓인 '하지 않은' 말들과 보이지 않은 태도들. 층층이 쌓인 선(layer)들을 끌어안아 감싸주는 우리의 말들이 케이크의 맛을 완벽하게 어우러지게 만들며, 그 케이크를 입 안에 넣는 순간의 분위기까지 따스하게 만들어주는 것 같다. 



나도 모르지. 진짜 왜 그랬는지 모르겠어.
그럼 그냥 너도 모르겠다고 해. 다들 모르겠다고 한다며?
너의 그 말이 머릿속에서 어떤 장면들을 불러온다. 이를테면 인턴이 하겠지, 하고 내가 내버려두었던 일들. 괜찮겠지, 하고 내가 넘겨버렸던 일들. 밥을 먹거나 커피를 마시는 것처럼 매일 반복됐던 일들. 대단한 일이 아닌 사소한 일들. 그래서 모른 척 했던 일들. 나중엔 아주 당연하게 여겼던 일들. 도대체 이렇게까지 소란을 떨 필요가 있을까 싶던 일들.

그런데 모른다고 하면 모르는 게 되나?

십 년은 서로에 대한 기억을 간직할 수 있는 시간인 동시에 서로에 대한 기억을 지울 수 있는 시간이었다. 뭔가는 고스란히 남고, 또 뭔가는 흔적도 없이 사라질 수 있는 시간. 두 사람 사이엔 이제 그런 여백 같은 시간이 흐르고 있는 셈이었다.

그래, 조만간 또 봐.
수지는 손을 흔들며 미란의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그 조만간이 일 년이 될 지, 이 년이 될지, 다시 십 년이 될지 장담할 순 없었다. 그리고 다시 만날 땐 서로의 기억에서 또 얼마간 비켜난 모습이 되어 있을 거였다.
그럼에도 수지는 미란을 다시 만나고 싶었다. 오늘 자신이 만난 건 미란뿐만이 아니라 지난 시절 자신의 모습이기도 하다는 것을, 과거의 나를 만나는 건 그 시절을 함께 지나온 누군가를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미란을 통해 실감한 덕분인지도 몰랐다.

그가 포크로 잘라낸 케이크를 입에 넣는다.
하지 않아서 좋았던 것, 하지 않았으므로 그가 지킬 수 있었던 것,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가 잃지 않았던 모든 것. 케이크의 맛은 그 모든 것을 한꺼번에 응축시켜놓은 것처럼 아주 진하고 깊다.

너에 대해 우리가 습관처럼 했던 말들, 자연스럽게 주고받던 대화들, 우리는 쉽게 잊었고, 어쩌면 너에게는 오래 남았을 어떤 말들이 구체적으로 되살아난다.

인경 씨는 어떤지 모르겠지만 전 금요일에 집에 혼자 있는 게 싫더라고요. 누구든 만나봐야 똑같겠지, 별로겠지 생각하면서 혼자 있는 거. 좋은 건 아닌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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