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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한 불행 - 부서지는 생의 조각으로 쌓아 올린 단단한 평온
김설 지음 / 책과이음 / 2023년 6월
평점 :
결혼도 모르고 자식도 모르고 인생의 고난도 아직 많이는 모르는 내가 감히 평할 수 없을 만큼 깊고 짙고 어둡고 힘든 결혼생활 이야기가 잔뜩 담겨있다. 결혼에 대한 이야기지만 절대 밝지 않다. 어두컴컴한 책 표지 속 가녀린 여자처럼, 저절로 한숨 짓거나 가슴을 쓸어내리며 눈물 짓거나, 기도밖에 할 수 없을 인생의 중차대한 변곡점이 될지도 모르는 결혼 생활에 대한 이야기. 삶의 지독한 구렁텅이에 대한 이야기. 결혼의 함정에 관한 이야기. 이렇게 얘기하면 누군가는 나에게 뭐라 할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정말 이 책을 이제 막 결혼하려거나, 결혼을 꿈꾸거나, 이혼을 했거나, 이혼 후 재혼을 하려거나, 이미 했을 그 모든 사람들에게 축복이자 추천의 말로 이 책을 전하고 싶다. (저주의 책이 아니니 오해없기를.)
비록 결혼은 하지 않았지만, 불행한 결혼생활의 표본을 작가님처럼 나도 부모님에게서 보았고, 아직도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보고 살 운명이기에, 지독하게 공감할 수 밖에 없었다. 읽으면서 저절로 감정이입이 되서 얼굴이 마구 구겨지기도 하고 입이 떡 벌어질 수밖에 없는 그런 이야기들. 이런 걸 어떻게 견디지, 하는 결혼해서 마주한 삶의 굴곡들과 진창들. 어둡고 힘든 이야기들이 가득한 책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어려운 결혼생활을 결국 받아들이며 삶의 한 부분으로 인정하고, 이제는 평온과 행복에 이르러가는 그 과정이 정말 대단하게 느껴졌다. 그래서 더욱 좋았다. 깨볶으며 잘 살고 있는 부부에게 건네면 조금 이상할 수도 있지만, 그래도 내 주위의 많은 사람들에게 꼭 추천하고 싶은 책이다.
부부 사이에 증오나 미움이 끼어들면 가정은 회의감으로 가득 찬 공간이 된다는 것. 나는 부모를 통해 그 중요한 사실을 알게 됐다.
사랑도 같은 맥락이다. 사랑이 지긋지긋하다거나 사랑을 믿지 않는다고 말했지만, 사실 나는 누구보다 사랑을 믿고 싶은지도 모른다. 약지 못하고 멍청한 나는 사랑이라는 놈이 몸집을 부풀리는 것을 감당하지 못할 게 불 보듯 뻔하니까, 지레 겁을 먹고 사랑 같은 건 믿지 않는다고 일찌감치 선언하는 것이다. 그렇게라도 해야 과거로 돌아가는 것을 막을 수 있고 다가오는 사랑 앞에 바리케이트도 칠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우연히 읽은 책에서 니체가 결혼할 때 자신에게 꼭 해야 할 질문을 알려줬다. "이 사람과 늙어서까지 대화를 잘 나눌 수 있을까?" 니체의 질문은 내게 도끼가 되었다.
사람들은 대부분 나쁜 사람에게 곤란을 당한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착한 사람에게 난감한 경우를 당하는 비율이 더 높다. 나쁜 사람은 피하면 되지만, 착한 사람은 피하기 쉽지 않다. 특히 여자를 곤란하게 하는 것은 착한 남자다. 자신이 착한 사람이라고 여기는 남자는 다른 사람의 삶에 툭 끼어들어 민폐를 끼친다.
나라고 바라는 게 없었을까. 책 읽기를 좋아하는 사람이기를, 술에 먹히는 사람이 아니라 술을 즐기는 사람이기를, 운전대를 잡으면 미친놈이 되지 말기를, 상식적인 사람이기를....... 밤새 희망사항을 삼켜도 남편은 달라지지 않았다.
나는 아내의 잔소리 때문에 못 살겠다는 남자를 보면 그 집의 무사태평이 그려진다. 오늘 점심 메뉴는 뭐였는지, 몇 시에 들어올 건지, 옷매무새가 좋니 나쁘니, 양복에서 낯선 여자의 향수 냄새가 나느니 등등 샅샅이 참견 안 하는 구석이 없는 아내가 집에 있다는 건 아직 행복하다는 증거라고 생각한다. 어떤 위기가 닥치면 여자는 오히려 관대해진다. 하루하루 사는 게 지겨워 죽겠는 판에 잔소리는 무슨 잔소리. 포기하게 되는 게 인지상정이다. 어릴 때는 관대함이 따뜻한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믿었다. 다 뭣 모르고 한 생각이다. 관대함은 많은 걸 기대하지 않으면 자연스럽게 생긴다.
상대에게 뭘 해서 상처를 주는 사람도 있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아서 상처를 주는 경우도 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이 주는 상처는 오히려 더 깊을 수 있다는 걸, 아무것도 하지 않는 남편에게 상처 받으며 알게 됐다.
"바꿀 수 있는 걸 바꾸는 용기와 바꿀 수 없는 걸 받아들이는 마음의 평정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 차이를 아는 현명함도 필요하다." 영화 <까밀 리와인드>에 나오는 대사다. 나는 영화의 주인공 까밀처럼 바꿀 수 있는 것과 바꿀 수 없는 것을 구분하는 영리함이 없다. 그러니 당장은 있는 그대로 운명을 받아들인다. 바꿀 수 없는 것을 받아들이면 마음에 여백이 조금 생기니까. 그 여백이 일단 숨은 쉬게 만들어주니까.
돈은 사람을 잡아채 흔들어 버린다. 오랜 시간 돈에 휘둘린 사람은 돈이 무섭다. 남의 돈은 더욱 무서워서 사람들에게 이유 없이 돈을 쓰게 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체념과 초월을 구분해서 적절히 받아들이니 인생살이가 조금은 편해졌다. 말이 좋아서 초월이고 체념이지 결국 포기다. ‘에라, 모르겠다. 사는 게 뭐 별거냐‘ 하고 포기하는 것이다. 살아보니 포기만큼 정신 건강에 좋은 게 없다. 그렇게 즐거운 포기를 하나둘 쌓으며 나이 들고 있다.
살아보니 부부는 서로 사랑하는 것과 동시에 미워하는 것이 당연했다. 이런 마음을 두려워하지 말았어야 했다. 올바르게 미워하는 일이 매섭게 대립하는 것보다 나았다.
살아보니 행복은 노력해서 얻는 게 아니었다. 철저히 계획해서 행복을 얻었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했다. 행복은 그저 어떤 행동이나 사건의 부속품 같은 거였다. 아무리 잡으려 해도 잡히지 않던 행복이라는 그것이 반쯤 감긴 내 눈에 슬쩍 내려앉고 있다.
습관적으로 쓰는 말 ‘평안하고 무탈하기를 기원합니다‘가 얼마나 귀하고 소중한 것인지, 요즘은 매일매일 마음으로 깊이 깨닫고 있다. 평안하고 무탈할 수 있다면 나는 무엇이든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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