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같은 장편소설이다. 단편인 줄 알았지만, 이야기는 보이지 않는 실로 얽혀져 있었고 그렇게 얽힌 전체의 인물들은 정세랑 작가가 구축한 하나의 세계를 이루고 있었다. 마치 어느 장면에서 카메라가 줌인(zoom-in)되며 한 인물, 혹은 한 가족을 비춘 뒤 서서히 옆으로 이동하면서 다른 인물, 혹은 다른 가족, 다른 이야기로 넘어가는 듯 했다. 즉 단편처럼 보이는 어느 한 세계도 단독적이지 않고 어딘가에 이어진 세계로써 존재하는 듯 했다. 그렇게 신기하고 매력적인 작품이었다.

A의 가족 이야기에서 시작되었다면, 그 다음엔 B, 그 다음에는 C 이렇게 이어지지 않는다. 피프티피플 세계 속 이야기는 병원 응급실에서 시작되는데 처음에서는 D라는 사건이 서술되지만 다음엔 D라는 사건을 해결한 E의 이야기, 그리고 E의 동료 혹은 교수인 F의 이야기가 나오고, 다시 F의 아내 이야기가 한참 뒤에 다시 나오는 식이다. 다시 D라는 사건이 벌어질 때 함께 응급실에 있었던 G의 이야기가 나오고, G의 친구의 동생인 H가 어딘가 뒤에서 다시 서술되는 식이다. 그렇게 얽히고 섥혀서 마치 거미줄처럼 약하지만 강한 하나의 촘촘하고 강한 세계가 구축되고 있었다.

어느 순간에는 인물의 관계도를 그려보고 싶단 마음이 굴뚝처럼 일어났다. 하지만 이미 읽은 부분이 절반이라서, 대충이라도 다시 읽기엔 부담스러웠고 또 주인공 외 잠깐 스쳐지나가는 사람들이 나올 것 같아 섣불리 시도할 수도 없었다.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인물 관계도가 더욱 필요하다는 생각이 간절해지긴 했지만, 어찌저찌 잘 참아내고 글을 마저 읽었다.

작가의 말을 통해 더 감동받기도 한다. 작가들의 마음은 늘 어찌 이리 고울까, 항상 생각한다. 마음을 잘 쓰고 마음의 소리를 잘 듣고 그 마음을 내어서 표현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럴 거라고 생각한다. 타인의 이야기와 아픔에, 나와 너의 이야기와 아픔에 쉽게 공감하고 위로하는 사람들이라 더 고맙고 감사하다. 짧은 이야기를 통해서도 애잔한 마음을 전해서 사람을 울리게 만드는 힘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 아파하는 마음을 혼자 간직하지 않고 글로 써서 더 나은 세계를 꿈꾸는 강한 마음을 지닌 사람들인 것 같다.

"... 늘 지고 있다는 느낌이 어렵습니다."

모든 곳이 어찌나 엉망인지, 엉망진창인지, 그 진창 속에서 변화를 만들려는 시도는 또 얼마나 잦게 좌절되는지, 노력은 닿지 않는지, 한계를 마주치는지, 실망하는지, 느리고 느리게 나아지다가 다시 퇴보하는 걸 참아내면서 어떻게 하면 지치지 않을 수 있을지 현재는 토로하며 물었다. 압축이 쉽지 않았다.

나는 작가가 구현해놓은 이 세계를 반의 반도 이해하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리뷰를 쓰기 위해 다시 앞을 살짝 넘겨보니 익숙한 이름들이 나와서 그제야 조금 더 이해의 폭이 넓어졌다. 책을 다 읽은 이후에도 다 읽은 것 같지 않고 더 읽어야만 할 것 같은, 나의 부족한 기억력이 안타까워지는 소설이었다.

다양한 사람들과 그들의 다양한 시각, 다양한 생각들과 직업과 가정형편 등의 사정이 나오면서 내가 몰랐던 세계에 대해서도 한층 더 알 수 있게 되었다. 단편보다 더 단편같은 짧은 이야기를 읽으면서도 그 장면들과 상황이 너무 선명히 그려져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히는 경험도 할 수 있었다. 감동적이고 너무 거대한 작품이지 않았나 싶다. 열심히 다 읽어도 차마 다 이해할 수는 없는 그런 작품.

서른은 사실 기꺼이 맞았다. 도무지 뭘 해야 할지 모르겠는 20대가 너무 힘들어서 서른은 좋았다. 마흔은, 마흔은 조금 다른 것 같다. 삶이 지나치게 고정되었다는 느낌. 좋은 수가 나오지 않게 조작된 주사위를 매일 던지고 있다는 느낌 같은 게 있다. 아직 중년처럼 보이진 않지만 중년인 것이다.

작품 배경이 뉴스에 나올만한 커다란 사건이면서 병원 응급실에서 마주할 수 있는 사건과 사람들의 이야기다보니 죽음에 연관된 이야기들이 종종 나왔다. 살면서 한번쯤은 생각해봐야 할 죽음이지만, 미처 그 생각을 해보기도 전에 사고로 안타깝게 생을 마감하게 되는 사람, 서서히 죽음에 점점 더 가까워지는 사람, 차라리 죽는 게 낫다고 생각해서 행동하는 사람의 경우도 나와서 마음이 아파질 때도 있었다.

죽음은 너무 가깝다. 언제나 너무 가깝다. 전철에서 지나치게 몸을 밀착하는 기분나쁜 남자처럼 가깝다.

MRI 기계에 들어가는건 관에 들어가는 기분이었다. 죽는 건 이렇게 춥고 좁은거겠지. 숨이 막히는 거겠지.

내가 개인적으로 공감을 많이 했던 이야기는 '김의진'의 이야기였다. 가장 마음에 남는 장소는 '베이글 가게', 중요하지 않은 줄 알았는데 거미줄의 중심부 실 같은 역할을 하던 소재인 '도마뱀', 마음이 시리고 울컥했던 이야기는 '정다운'의 이야기, 왠지 등장할 때마다 유쾌하고 시원한 기분이 들었던 이야기는 '진선미'씨의 이야기였다. 51명이 등장하면서 각 사람의 이야기는 아주 짧게 펼쳐질 뿐인데 이런 놀라운 서사를 전하고 그것들을 엮고 엮어서 하나의 큰 세계를 만들며 인상깊은 글을 쓰신 정세랑 작가님이 정말 대단하다고 느껴졌다. 이번 책은 대여를 해서 봐서 다시 한번 읽진 못하겠지만, 나중에 시간을 내서 꼭 다시 한번, 또 다시 한번 읽으면서 진지하게 감상을 해봐야겠단 생각이 들었고, 내 곁의 좋은 사람들에게 이 책을 선물하며 소개해주고 싶단 생각이 들었다.

"나중에 하나도 기억 못하겠지? 네가 자기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 우리가, 한 사람 한 사람이 기억하지 못하는 사랑의 기간들이 얼마나 길까.... 우리가, 한 사람 한 사람이 기억하지 못하는 사랑의 기간들이 얼마나 길까.

호감. 가벼운 호감으로부터 얼마나 많은 일들이 시작되는지.

가장 경멸하는 것도 사람, 가장 사랑하는 것도 사람. 그 괴리 안에서 평생 살아갈 것이다.


결혼식을 가장한 장례식이었다. 근사한 장례식이었다.

... 승희에게 고함을 질러댔다. 이혼하고 올 테니 제발 헤어기지 말아달라고 매달리듯 윽박질렀다. 유부남이었다니. 이런 남자들은 뚜껑 열린 맨홀처럼 인생에 잠복하여 어린 여자들을 삼킨다. 어리고 똑똑지 못한 여자들을 삼킨다.

고장 난 트렁크를 친절하게 들어주는 사람이 집에 가면 자기 가족에게 어떤 얼굴을 할지 아무도 알 수 없다. 거짓말 너머를 알고 싶지 않다. 이면의 이경(異) 따위, 표면과 표면만 있는 관계 속에서 살아가고 싶다.

나빠지는 것만 가득, 그런 생각이 들어 윤나는 속이 상했다. 완만하게 나빠지는 게 아니라 구덩이가 발밑에서 열리듯이 갑작스럽게, 격하게 나빠지고 있었다.

삶의 불공평함이 아득하게 느껴진다.

뚱뚱한 여자아이에게 친절한 나라는 별로 없지만 한국은 그중에서도 가장 혹독한 곳이 아닐까.

"있잖아, 마음에 갈증 같은 게 있는 사람은 힘들다?"
영린과 함께 산 지 얼마 안 되어 새엄마가 말했었다.
"네?"
"그런 사람은 항상 져. 내가 보기엔 네가 힘든 게 몸무게 때문도 아냐. 마음 때문이야."

어째서 고르는 족족, 혹은 영린에게 먼저 다가오는 족족 좋은 사람이 아니었을까. 영린은 스스로의 형편없음이 다른 사람의 형편없음을 끌어당기기도 하고 증폭시키기도 한다는 걸 깨달았다. 짧거나 긴 연애가 끝날 때마다 생활이 무너졌다.

괜찮아, 예뻐.
스스로 말해본 건 처음이었다.

결혼은 그 나름대로의 노력이 계속 들어가지만, 매일 안도하게 되는 순간들이 있었다. 마음을 다 맡길 수 있는 사람과 더이상 얕은 계산 없이 팀을 이루어 살아갈 수 있다는 점에서 말이다. 어둡고 어색했던 소개팅의 나날을 지나왔다는 점이 무엇보다 가장 큰 안도였다.

"사회생활을 오래 하다보면 사람에 대한 기준을 각자 세우게 되잖아요? 제 기준은 단순해요. 좋은 사람이냐 나쁜 사람이냐, 마음의 마개가 잘 닫혀 있느냐 덜컥거리며 쏟아지느냐. 상대방을 고려 않고 감정을 폭주시키는 걸 너무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는 사람이 의외로 많아요. 선하면서 스스로를 다잡는 사람, 드물고 귀해요."

그러고 있다보면 누군가를 만나고 싶은 욕구가 참을 수 없는 갈증처럼 들곤 했다. 몸의 욕구라기보다는 친밀감에 대한 욕구였다.

우리도 그렇게 변하면 어쩌지? 엉뚱한 대상에게 화내는사람으로? 세상은 불공평하고 불공정하고 불합리하고 그속에서 우리가 지쳐서 변하면 어쩌지?

그 젊음. 기억나지 않는 젊음.

"눈이 닮았네요."

"안 닮았는데요."
"닮았어요. 눈 안에 심지가 있어요. 가장 의지했던 딸인거 알지요?"
듣기 좋은 말을 잘하는 할아버지네, 승화는 웃었다. 오래된 상처를 그 말들이 연고처럼 덮었다. 승화는 한마디도 믿지 않고 동의하지 않으면서도 고마웠다.

"젊은 사람들은 착각을 해요. 노인들이 해답을 가지고 있다고 믿지. 별거 없어요."

"그냥…… 우리가 하는 일이 돌을 멀리 던지는 거라고 생각합시다. 어떻게든 한껏 멀리. 개개인은 착각을 하지요. 같은 위치에서 던지고 사람의 능력이란 고만고만하기 때문에 돌이 멀리 나가지 않는다고요. 그런데 사실은 같은 위치에서 던지고 있는 게 아닙니다. 시대란 게, 세대란 게 있기 때문입니다. 소 선생은 시작선에서 던지고 있는 게 아니에요. 내 세대와 우리의 중간 세대가 던지고 던져서 그 돌이 떨어진 지점에서 다시 주워 던지고 있는 겁니다. 내 말 이해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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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code 2022-06-20 00:0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뽕님 이렇게 서재에도 끊임없이 글을 쓰구 계셨군요ㅎ. 책도 일과 관련된것, 편중된 것만 읽다가 이리 뽕님 블로그나 서재에 들르면 눈 동그랗게 뜨고 글을 공유하며 즐겁게 읽어요^^ 이 책두 주문해서 읽어봐야겠어요. 오늘도 감사해요ㅎ. 뽕님 나름의 힘듦을 이리 늘 덤덤하게 항상 글로 서평으로 나눠주고 계신데 제가 늘 받고만 가네요ㅎ 지난 블로그에서 뽕님이 물어봐주신 소소한 행복.. 전 아마도 그냥 이리 이 모양대로 하루 하루 살아가고 있는 모습에서 안도를 찾으려하는게 아닐까.. 그리고 조금 욕심을 품는다면 늘 생각하고 있는 작은 바람 원래 염세적이면서 본질적인 제가 가진 작은 기대.그런게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뽕님 항상 평안한 모습이시길. 이번주도 응원합니다^^

milibbong 2022-06-26 21:35   좋아요 0 | URL
오랜만에 와주셨네요.. ^^ 두부님 오시기를 고대하며 천천히 천천히 저도 거북이처럼 느릿느릿 글을 옮겨적고 있었답니다. ㅎㅎ 오늘도 아주 오랜만에 이 곳을 방문해서 한참 글을 적지 않았다는 걸 깨닫고 책 리뷰를 남기러 왔어요 ^^ 하루하루의 삶과 안정과 안도... 저로서는 너무 부러울 뿐인걸요 ^^ 두부님 답고 너무 좋네요 ㅎㅎ 커피 한잔과 잠깐의 시간이 허락되는 주말에 아주 가끔씩 들러서 글귀 한구절씩 읽고서 기분전환 하고 가시면 그것만으로도 저는 충분히 좋습니다. ^^ 장마철 이제 시작인 것 같아요. 우산 잘 챙기시고~ 뜨거운 여름, 화이팅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