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상에서 만나요
정세랑 지음 / 창비 / 2018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정세랑 님의 작품은 처음 읽어봤다. 그런데 정말 기발한 상상력에 놀랐다. 단편들이 엮여있다보니 그 와중엔 내용보다 통통튀는 묘사가 더 마음에 드는 글도 있었지만, 어쩜 이렇게 귀엽고 발칙한 상상력으로 글을 엮어냈는지 매번 놀라게 됐다. 특히 나는 상상력과는 거리가 먼 부류라, 이렇게 환상적인 이야기를 현실에서 이질감 없이 풀어내는 모습이 인상깊었다. 이 책의 단편들을 엮어내는데 총 9년이 걸렸다는데, 그동안 내 취향과 다르다고 해서 너무 쉽게 책을 평한 것 같아 왠지 반성하게 되었다.  


집에 오는 길에 열여덟번째 여자는 세상이 얼마나 불공평한지를 심각하게 생각했다. 축의금 같은 사소한 문제부터 시작해 훨씬 큰 문제로 이어질 것이다. 결혼은 겉의 포장을 걷어내면 결국 법의 문제, 제도의 문제, 보호의 문제이니 말이다.

"요즘은 내가 원했던 것도 사실 결혼이 아니라 법의 보호를 받는 동거가 아니었나 싶더라고."
결혼한 지 가장 오래된 친구가 말했을 때였다.
"근데… 나는 사실 결혼이 하고 싶어. 그 사람이랑 보란 듯이 식도 올리고 싶어. 가족들이랑도 교류하고."
동성애자인 친구가 머쓱해하며 털어놓았다.
"뭐? 왜? 결혼 완전 피곤하고 촌스러운데, 싫은 친척이 두배로 생기는 거라고."
... "나도 좀 해보고 싫어하는가 할게. 동거도 좋고, 시스템 안에 들어가는 것도 좋지만 일단 외치고 싶어. 우리 둘이 계속 함께하기로 정했다고. 그 결정으로 우리둘이 고립되는 게 아니라 연결망 속에 놓이고 싶고."

"그럼 우리 결혼할까?"
"결혼하고 무슨 상관이야?"
"그래도 결혼하면 굳이 애써 만나지 않아도 겨울 내내 껴안고 있을 수 있지 않을까?"
"그럴까?"
그래서 두 사람은 결혼을 했다. ... 맨살과 맨살 사이의 온기, 그것을 위해.

결혼의 여러가지 속성에 대해 미리 알았던 편이지만, 이토록 빛잔치가 될 줄은 상상하지 못했다. 빚을 기억하느라 드레스의 디자인 같은 것은 하얗게 잊고 말았다.

사람들이 얼마나 쉽게 선을 넘는지 새삼 놀라웠다. 당신은 나에게 그런 질문을 던질 만큼 가깝지 않아요, 하고 대답하고 싶은 걸 매번 참았다.

두번은 넘어갈 수 없었다. 둘 다 일하는데 식사 준비를 여자가 하는 건 여자의 자발적인 기여일 뿐이었다. 남자가 뭔가 크게 착각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남자가 잠결에 실수로 여자를 때렸다. 팔꿈치로 눈두덩을 힘껏친 것이다. 여자는 멍이 들었다.
"미안해, 정말 미안해, 좀비 꿈을 꿨어."
남자는 공포영화를 잘 못 보면서도 즐겨 보는 편이었다. 이해할만한 일이었지만 여자는 화가 났다. 3일쯤 화가 풀리지 않았다.
4일째가 되어서야 여자는 깨달았다. 여자는 화가 난 것이 아니었다. 두려운 것이었다. 그때까지 인식하지 못했지만 두 사람 사이엔 압도적인 힘의 차이가 있었다. 나중에 남자가 머리를 다치거나 치매에 걸리면 어떡하지? 성격이 변해서 때리고 목을 조르면 어떡하지? 최악의 상상들이 연이었다.

"입을 모아 내가 부족한 존재라 해서 정말 부족한 줄 알았어. 결혼을 해야 어른 취급받는 건 너무 이상하지 않니? 그래서 착각한게 아닐까, 꼭 해야 하는 숙제로, 너는 나처럼 생각하지 마. 요즘 비혼 이야기 많이 나오는 거 반갑고, 나도 이런 시대를 기다릴걸 그랬다 싶어."
"언닌 가진 게 있어서 쉽게 말하는 거야."
"그래? 속 편한 소린가?"
"모르겠어. 나도 이 생각 저 생각 많이 하는데, 사회가 너무 기혼자 중심인걸."
"사회는 바뀔 수도 있어. 생각보다 빨리."
"어쨌든 지금은 숙제를 해오지 않은 학생에게 지나치게 가혹한 옛날 선생님 같잖아."

"나처럼 가부장이 아닌 사람이 어딨다고?"
"당신 한 사람으로 결정되는 게 아니야. 예를 들어 지난 제사 때 생각해봐. 나는 조퇴하고 가서 아홉시간 일했지. 당신은 퇴근하고 와서 한시간, 절 몇번 하고 과일 집어먹고 사촌동생들이랑 논 게 다잖아."
"그럼 두 사람 다 조퇴했어야 했다고?"
"내 말은 그런 시간들이 계속, 평생에 걸쳐 쌓인다는 거야. 쌓이다. 보면 큰 차이가 나는 거고, 생각해보면 이상하지 않아? 당신 할아버지 제사잖아? 난 만난 적도 없는 분이야. 왜 효도를 하청 주는데?"
"하청이라고까지 말하면......"
"아홉시간 일한 며느리들은 제사 지낼 때 아무도 절도 안하고 뒤에 멀뚱멀뚱 서 있지."
"몇년 전에 며느리들도 절하는 걸로 바꿀까 했었는데 큰어머니 무릎도 안 좋으시고……"
"어쨌든 그게 가부장제야. 당신 눈에는 안 보여도 내 눈에는 보여. 내 눈에만 보이는 게 아주 많아."

"이런 결혼식은 처음 봐. 양쪽 집안 다 한 재산 챙기겠구먼."
그런가, 그게 본질인가. 여자는 아득하게 생각했다. ‘화환은 정중하게 거절합니다‘라는 문구를 청첩장에 쓰려 했을 때 아버지가 지우게 한 게 새삼 다시 떠올랐다.

"불행은 보이지 않는 모퉁이 너머마다 서 있다가 지나가는 사람을 놀래키고, 인생은 그 반복일 뿐이라고 누가 그랬어. 그 말이 맞는 거 같아. 우리 둘은 이제 불행 공동체가 된 거라고."

슈거파우더로는 거의 모든 걸 덮을 수 있지. 사람들의, 관계의 가장 저열하고 싫은 부분까지도 말이야.

"그만둬버려. 굶어죽기야 하겠냐? 이제 경력이 있으니까 또 금방 취직될 거야."
주변 사람들의 그런 말에 설득될 때도 있었지만, 나는 두려움을 이겨내지 못했어. 서른개쯤 넣으면 하나쯤 다음 단계로 통과되는 이력서를 가지고 두려움이 없었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겠지.

국제암연구소에 의하면 심야노동은 2급 발암물질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돌연사의 원인으로는 몇위쯤 될까. 언니는 입사 이래 줄야근을 했지만 누구나 그렇게 살기 때문에 티도 나지 않았다.

짝사랑은 모멸감을 잘 견디는 사람만이 할 수 있었다.

"언제든지."
여자친구가 말했다. 언제든지 돌아오라고? 전화하라고? 메일 쓰라고? 나는 의미를 알 수 없었다. 그럴 땐 똑같이 말하는 게 제일 좋다.
"언제든지."
나도 말했다.

비교하지 않으려 해도 비교하게 되었다. 다른 사람들의 삶은 근사하고 자신만 지옥에 버려진 듯한 날들이 이어졌고, 짓무른 마음을 들키지 않으려 애썼지만 종종 들켰다.

‘싱글로도 커플로도 살기는 녹록하지 않다. 둘 중 어느 쪽을 고른다 해도 그 나름의 장단점이 있어서다. 이때 중요한 것은 삶의 가중치를 어디에 두느냐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