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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집순이로 알차게 살았습니다 - 침대와 한 몸이 된 당신을 위한 일상 회복 에세이
삼각커피 지음 / 카시오페아 / 2020년 3월
평점 :
제목만 봐도 내 얘기('집순이')였다. 가볍게 읽을 수 있었지만, 실제 이 모든 걸 직접 겪었을 당사자의 무게는 절대 가볍지 않았을 것이다. 작가가 힘들었던 때를 난 누구보다도 깊이 이해할 수 있었다. 그래서 이 책이 가벼운 이야기처럼 보일 수 있다는 게 안타깝다.
아는 동생이 걸핏하면 내게 브런치(자신의 글,사진 등의 작품을 독자에게 오픈하는 플랫폼)를 권했다. 글을 제대로 써보라는 것이었다. 자꾸 권하는 게 싫어서 쳐다보지도 않았는데, 브런치 글을 검수하는 담당자들이 꽤 까다롭게 통과를 시켜서 그 플랫폼이 신인작가가 데뷔하는 통로로 이용된다고 들었다. 이 작가도 그랬다. 서점 가면 쏟아져나오는 이름 모를 닉네임의 다양한 에세이들이 바로 브런치를 통해 나오는 것이었다.
내가 브런치에서 이 글을 봤으면 훨씬 더 재밌게 읽었을지도 모르겠다. 근데 확실히 책의 무게로는 가볍긴 하다. 딱 그런 공간에서 공유되기 좋은 정도랄까. 물론 그 플랫폼을 통해 다양한 책들이 출간되어 많은 사람들에게 책이라는 보편적 매체로 접근되는 건 감사한 일이다. 살짝 아쉬움이 남긴 하지만, 가끔은 가볍게 읽을 책도 필요하니까 그런 의미에선 적잖이 공감도 되고 좋았다.
모두들 누군가와 함께 즐거운 마음으로 외출하는 꽃 피는 봄날. 나는 시간, 날씨 개념을 모두 잊은 채 혼자 방 안에 누워 아무것도 하지 않고 말 그대로 ‘그냥‘ 있었다. 겨우 숨만 쉬고, 밥만 먹고, 잠만 가면서.
몸도 아프고 마음속도 우울한데 돈까지 없는 ‘최악의 상황‘이었다. 일부러 웃으려고 얼굴 근육을 움직여도 미소가 지어지지 않았다. 솔직한 심정으로는 누군가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싶을 정도로 상황이 절박했다.
10년 전, 5년 전 나와 비슷했던 사람들도 어느새 자리를 잡고 짝을 만나 행복을 찾아갔다. 창 너머 보이는 사람들 역시 앞을 향해 나아가는데, 어째서 나는 왜 10년 전 모습 그대로 멈춰버린 걸까. 앞으로 가지도 못하고 뭘 해야 하는지, 어디로 가야 하는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내가 생각하고 있는 게 과연 정답인지조차 알 수 없었다.
‘사실은 이렇게 태어난 것도, 살아 있는 것도 싫은데. 나도 누군가에게 화내고 맘껏 울고도 싶은데... 탓할 사람이라도 있으면 좋을 텐데...‘
모두 다 타고 남은 자리에 그을음 같았던 날들이었다. 아무런 희망도, 꿈도, 의지도 생기지 않았다. 이대로 잠든 채 생이 끝나도 괜찮을 것만 같았다. 이 엉망진창인 생을 끝내는 것이 유일한 답 아닐까? 내 죽음에 슬퍼할 사람도 있겠지만, 시간이 지나고 나면 자연스레 모두 잊고 자기 삶을 살아가기 바쁠 것이다.
몸이 아파서 우울한 걸까, 우울해서 무기력한 걸까. 무기력해서 아무것도 못하니, 미래가 보이지 않아 우울한 걸까. 누워만 있다 보니 몸이 아파진 걸까.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지 무엇도 판단할 수 없었다.
요즘 정신과를 다니는 사람이나 상담 후기가 많아져서 거부감은 많이 줄었지만, 사실 그보다 금전적인 문제가 가장 큰 걸림돌이었다. 고정 수입이 없는 상태에서 돈이 계속해서 나가고, 더욱이 심리 상담을 받으면 한 번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여러 번 받아야 할 텐데, 그러면 얼마가 들지 모르니 부담스러웠다. 살아가려는 의지를 다잡으면서도 돈은 아까웠나보다.
주방에 소리 없이 몰래 들어가 저녁에 먹었던 잔반을 뒤지다가 먹을 게 없으면 조용히 편의점에서 먹을 것을 사 와 뭔가에 홀린 사람처럼 허겁지겁 먹어치웠다. 입에 들어오는 음식이 주는 쾌락은 마약처럼 굉장했다. 머릿속으로는 ‘지금 먹으면 살 진짜 많이 찔 텐데. 소화시키고 자려면 또 늦게 자야 하는데‘라고 생각하면서도 손과 입은 계속 음식을 향했다. 다 먹어버리고 나서야 자책하기 일쑤였다.
가끔 화장실에 갈 때에만 거울에 비친 꾀죄죄한 내 모습과 마주한다. 거울 속의 내가 나를 바라보고 또 외면하는 유일한 목격자다.
잘 보일 사람이 없으니 다 늘어나고 구멍 난 옷을 입고 기름진 머리로 하루 온종일 보냈다. 귀찮다고 이틀 이상 머리를 감지 않고 묶고만 있었다. 그 상태에서 매일 헌옷을 입거나 잠옷 차림으로 있다 보니 꾀죄죄한 모습이 내 고정 이미지가 된 것처럼 ‘그래, 이게 나야. 원래 꾀죄죄하고 볼품없는 존재인걸‘이라고 나를 단정했다.
‘아무것도 아닌 일상이지만, 이런 일상이라도 잘 살아내는 것이 내 일이야!‘
오늘만이라도 오늘부터라도 못나게 느껴져 모질게 꾸짖기만 했던 나를 사랑하고 싶다.
전에는 다른 사람이나 상황을 탓하다가도 스스로를 위하는 일이라 여기며 나 자신을 모질게 채찍질할 때가 많았다. 그러나 이제는 결과를 최대한 담담히 인정하고 나를 믿고 지지하는 쪽으로 바뀌었다. 나라도 내 편을 들어주고 싶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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