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과 바닐라
정한아 지음 / 문학동네 / 2021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책에서 손을 뗀지 무려 3개월만이다. 이렇게 시간이 흘렀었나. 처음 한달은 읽을 만한 책도, 빌리거나 얻을 루트도 마땅치 않아 지켜만 보던 시기였다. 이후에는 머리를 다쳐서 회복하는 데 오랜 시간이 흘렀고, 책 읽는데 시간을 보낼 만큼 마음의 여유나 몸의 여력도 없었다. 3개월이 지나고 나서야 이제 겨우 단편소설 한 권을 읽었다지만, 다시 책을 읽을 수 있게 되서 너무 좋았다.

 정한아 님과 그녀의 책은 처음 접했다. 그런데 읽으면서 뭐랄까 공감도 많이 가고 여러가지 생각도 하게 되는 그런 소설이었다. 여자라서 작품의 느낌에 크게 공감할 수 있었던 것일까. 특별히 그런 건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여자로서 갖는 위치라든가 꼭 겪어야 할 인생의 과제라든가, 그안에 숨겨져있을 마음을 짐작하는 데 어려움이 없었다는 건 맞는 것 같다.

 꾹꾹 눌러담고 잘라낸 문장 속에서 작가로서 또 엄마로서 갖게 된 마음과 그녀의 생활을 알게 되었다. 얼마나 힘들었을지 얼마나 서글프며 또 기쁘고 불안했을지, 감히 가늠이 안되지만 그런 마음들이 묘하게 더 내 마음에 와닿았다. 언젠가 서점에서 작가의 이후 작품을 만나게 된다면 더욱 반갑게 마주할 수 있으리라, 이번 만남이 끝이 아닐거라 믿으며 응원해본다. 


나중에 연주는 미연에게 부산에서 뭔가 섭섭한 일이 있었느냐고 물었다. 미연은 침묵했다. 그녀는 그 여행에서 하나도 기억에 남는 것이 없었다. 다만 첫날 연주가 입고 있던 코트만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어린 새의 솜털처럼 빛나던 코트, 미연은 그날 자신의 무거운 검정색 패딩을 팔에 걸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것들이 정말 관계를 멀어지게 했을까? 그녀는 쉽게 대답할 수 없었다. 그들이 이제 너무 달라졌다는 사실만 더듬더듬 되뇌었을 뿐이다.

"아이를 키우는 일은…… 그런 것에 익숙한 사람은 아무도 없어. 누구나 처음부터 배워나가는 거야.

언제까지나 과거에 사로잡힌 채 살아갈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비록 모든 아름다운 것이 과거에 있다 할지라도.

"없는 게 더 나은 가족도 있어." 그것은 내가 입버릇처럼 하던 말이었다. 그런데 왜 그의 ‘없다‘는 말이 가슴에 와 박혔는지 모를 일이었다.

나는 노인이 아니다, 라고 할머니는 종종 말했다. 돈을 버는 사람, 자기 삶의 수단을 가진 사람은 쉽게 쓰러지지 않는다고.

나는 할머니의 모습을 휴대폰 카메라에 담고 싶었지만 인생에서 정말 중요한 것이 그렇듯 그 순간은 금세 사라져버렸다. 나는 그것이 두고두고 아쉬웠다.

아무것도, 한 발자국 걸어가는 것도 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주 무거운 옷을 입은 것처럼, 온몸이 물에 젖은 솜처럼 늘어졌다.

그녀의 투병을 지켜본 사람들은 모두 그에게 감탄했다. 그녀도 그가 애써줬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때로는 제발 입을 다물어줬으면 했다. 그가 하는 말은 조금도 위로가 되지 않았다. 그녀는 그가 아닌 누군가가 옆에 있어줬으면 했다. 그녀와 함께 추락하고, 함께 부서지고, 함께 신음하는 누군가, 그녀의 고통을 이해하고 공감해줄 누군가가.

아니, 피가 말라 죽는 기분이 어떤 건지 너는 몰라. 자신의 몸에서 풍기는 악취를 맡는 기분이 어떤 건지. 온몸에 생긴 푸른 반점을 발견하는 기분이 어떤 건지, 팔다리가 조각나는 듯한 고통이 어떤 건지, 너는 몰라, 정말 무서운 건 자신의 몸에서 일어나는 일이라는 걸, 너는 모르지.

자신의 민낯을 가리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것도, 다른 사람의 민낯을 보면서 허둥대는 것도 아직은 힘에 부쳤다. 예전에는 어떻게 이들과 조화를 맞추었는지 까마득하기만 했다.

어느 날부터 내가 그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의 지친 얼굴이 나를 발견하고 환하게 밝아지는 순간, 그 순간이 점차 나를 길들였다. 나는 그를 구해주고 싶었고, 그가 나를 구해주기를 바랐다.

나는 야윈 그의 어깨에 기대 눈을 감았다. 죽어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적당히 연명하다가 어느 순간 숨이 끊어지면 그뿐이라고, 부모 없이 할머니의 손에서 자란 탓인지, 나는 늘 그런 생각을 하며 살았다. 너무 일찍이 노인이 되는 법을 배운 것이다.

문은 지금껏 내가 만난 남자들과 달랐다. 내성적이고, 그늘이 짙었다. 그런 문이 내 손을 잡고서 무섭다고 말했을 때, 단단한 둑처럼 막아놓은 마음이 무너져내렸다. 나는 그와 함께 끝까지 가고 싶었다. 영원히 도망치고 싶었다.

그곳에서 보았던 밤하늘, 별, 그리고 옆에 있는 문의 체온, 그것은 내가 인생에서 유일하게 진실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들이었다. 하지만 다음 순간 눈을 떴을 때, 전부 사라지고 없었다. 아예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사라져버렸다. 남아 있는 것은 나, 곤혹스러운 나의 존재뿐이었다.

나는 그에게 들어야 할 이야기가 있었다. 왜 그런 식으로 나를 떠났는지,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 따뜻한 포옹 한 번 없이 왜 그렇게 도망치듯 사라져버렸는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