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화,홍련 [dts] - (2disc) 할인행사
김지운 감독, 염정아 외 출연 / 메트로DVD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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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내가 이 영화를 왜 봤더라...... 그래, 맞다. 학원에 다니던 시절 언제부터인가 출입문 너머로 보이는 맞은 편 반의 문에는 영화 팜플렛이 한 장씩 붙기 시작했다. 뭐 딱히 일주일에 한번씩 정기적으로 교체되는 건 아니었지만, 그 반의 아무나 영화를 보고 오면 자기가 가져온 팜플렛으로 갈아붙이는 것 같았다. 누구와도 마음을 열지 않았던 나는 누구에게 그런 궁금함을 물어보지도 못했으니까...... 마침 난 그 문이 맞바로 보이는 출입문 바로 앞 분단의 두번째 줄에 앉아있어서 하루에도 꽤 긴 시간을 그 팜플렛들과 눈을 마주쳐야 했다. 하지만 딱히 내가 영화관까지 찾아가서 본격적으로 대화를 나누고 싶게 만드는 녀석은 없었다.

 그건 딱히 내가 처음 혼자 서울로 올라올 때, 부모님도 나도 서로 믿지 않았던, '공연 찾아다니지 않고, 오직 공부!'라는 약속에 대한 죄책감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해서 평소 영화라면 '지식인, 또는 지식인이 되고자 하는 자의 소양'으로써의 일종의 허영심을 충족시키는 대상으로 생각하면서, 가끔 아름답고 멋진 배우들에게 감탄하고, 내 발로는 찾아가기 힘든 배경들에 혹하고, 오직 머리 속에서만 왔다갔다하는 내 온갖 상념들의 구체적인 현현에 감탄하던 그 영화에의 애정이 고갈되어서도 아니었다. 그저 그건 자괴감이었다...... 그저 지난 3년 동안 원없이 -물론 내 기준이 아니라 우리 어머니 관점에서- 논 결과가 이 모양이라는 생각에 난 다른 건 몰라도 영화만큼은 보지 않으리라고 스스로를 들들 볶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결국 자연스럽게 영화에 애정이 식고 말았다. 그냥 그런 매체 정도로......(참고로 난 책에 대해서는 그 방법이 절대 불가능했다. 수없이 시행해보려 노력했으나, 절대로......)  워낙 가리는 장르, 스토리, 기타 잡다한 부분이 많은 탓에 평소 영화를 많이 보는 편도 아니었고, 내 기억이 맞다면 고3 때 본 영화는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을 2번 본 것뿐이었지만, 좌우지간에 어쩌다보니 그렇게 되었다. 영화라는 장르가 본 후의 충격이 꽤나 오래가고 시설도 좋은 서울의 극장에서 한번 보기로 하면 끝이 없으리란 막연한 자제감으로.

 그러다가 어느 날은 또다시 맞은편 문짝의 팜플렛이 바뀌었다. 제목부터 봤을 때는 기도차지 않았다. '장화 홍련'. '이게 뭐야? 요즘이 어느 세상인데 이런 제목의 영화를 지었지? 무슨 월하의 공동묘지도 아니고, 무슨 싸구려 컴퓨터그래픽으로 말초신경이나 자극해줄 생각인가? 지겹다, 지겨워.' 대충 이랬다. 아마 처음에는 그 제목의 유치함과 고풍스러움에 기가 질려서 그 밖의 부분은 자세히 보지도 않았던 것 같다. 그래서 점심시간에 반의 여자아이들이 코엑스몰 메가박스에서 장화 홍련 무대인사 할 때 문근영이 온다고 난리를 할 때도 무덤덤하게, 혹은 약간은 경멸스럽게 받아들였다. 사실 난 그때까지 문근영이 누군지도 잘 몰랐으니까^^;.(오히려 나로 하여금 이 영화를 보게 하는 데 영향을 끼쳤던 내가 아는 배우라고는 무표정하게 서있었던 아버지 역의 김갑수였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그 포스터 전체를 바라보게 되었다. 뭐 난 항상 그 포스터를 맞바로 보는 자리에 있었으니까. 그리고 생각했다. 내가 봐야 할 영화라고, 반드시. 아버지의 얼굴은 근엄하고, 어머니의 얼굴은 화사하다. 배경이 되는 벽지도 딸들이 앉아 있는 쇼파도, 부티와 무게감이 가득하다. 어느 쪽으로 봐도 적어도 중산층, 아니 그 이상은 될 법한 가정의 가족사진 풍경이다. 그런데 피투성이의 딸들. 그들이 차려입은 고운 순백의 옷은 이미 선혈로 물들어 있었다. 그게 내 모습이었다. 그래서 난 그 영화를 봐야만했다.

 남들이 보기 좋은, 남들이 선망까지는 하지 않더라도 괜찮게 생각할 법한 집안에서 온갖 사람들과 시시때때로 겪어야하는 감정의 싸움은 어린 나이라고 해서 비껴가는 것이 아니다. 그 결과는 바로 그녀들처럼 피투성이가 된 순백의 성의(聖衣)다. 항상 남들에게는 행복한 척 여유로운 척, 고상한 척 도도한 자세를 유지하는 수많은 집안들이 결국은 저렇게 자신들의 백의는 피에 물들다 못해서 새까맣게 변하고, 그들의 어린 자녀들은 서서히 그런 부모를 따라가고 있다. 물론 부모님 모두에게서 명석함과 현명함을 배운 것과는 별개로, 아버지에게서 지금에야 알 것 같은 항상 한 발짝 물러서는 처신의 묘와 내가 평생 동안 안고 갈 책에 대한 사랑을 물려받았으며, -아버지는 그런 책 사랑을, 지방 유지로써 남부럽잖게 호화찬란한 우리 집안의 전성기를 누렸던 자신의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았다.- 어머니에게서는 나이를 먹어 갈수록 그 현명함에 감탄케 하는, 타인에 대한 물 흐르는 듯한 예절바른 태도와 아름답고 예쁜 것들에 대한 사랑을 배웠다.(그런데 계모로 나오는 염정아가 남동생 내외를 불러놓고 저녁을 먹는 자리에서 보여주는 그 대화 장면의 경박함과 괴기스러움을 어머니는 때로 가까운 사람들끼리 있는 자리에서 때때로 드러내고는 한다. 그래서 어머니가 '타인'에 대해 유달리 예절바르다고 한 것이다. 별로 사이가 가깝지 않은 타인에 대해.) 하지만 그 대가가 결코 적지 않았다. 나도 내 옷을 피로 물들여야 했다. 난 어쩌면 남들보다 꽤나 빨리 그 사실을 알아차린 축에 속할 지도 모른다. '그 남자 그 여자'의 유키노처럼 난 초등학생 시절부터도 다른 아이들과는 달리 내가 순수한 존재로 보이는 것에 즐거움을 느꼈을 뿐, 순수함을 포기한 지는 오래였다. 그 또한 바로 그 중산층 가정의 부모 덕이었다.

 하지만 이 순수함이 때로는 그 껍질을 깨고 말 그대로 핏빛으로 울음을 터뜨릴 때도 있다. 바로 그 부모의 폭력을 깨닫고 만 그 순간, 남들에게 보기 좋은, 객관적 기준의 완벽함을 끝끝내 이루기 위해서 자신에게 가해진 부모의 억압을 인지한 순간 그들은 분노한다. 영화 속의 아버지는 건강이 좋지 않은 부인의 간병에 지친 나머지 전부터 알고 지내던 그녀의 간병인과 외도를 한다. 그리고 결국 부인이 자살하자, 그 간병인과 기다렸다는 듯이 재혼한다. 그렇다. 실질적으로 보편적인 중산층 가정의 모델에서 아버지는 말 그대로 경제력과 바깥 일을 책임지는 가장이자 중심축으로써의 상징적 의미 -일종의 제사장과 같은- 역할을 제외한다면 집안에서 하는 일은 거의 없다. 바로 부인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부인이 부재한다면 그의 그러한 위엄 있고, 품위 있는 생활은 어려워진다. 그에게 딸린 두 딸자식은 어찌할 것이며,-하나 데리고도 고생하는 '저지걸'을 보라!- 왠지 '남들 보기에도' 아직 중년인데 짝 잃은 외기러기로 보이는 것이 자존심 상한다. '중, 산, 층' 인데. 물론 부부생활이라던가 말 그대로 사랑도 한 원인일 수 있겠지만, 부모들은 남들이 쌓고 또 그들이 쌓은, 그리고는 자발적으로 갇힌 중산층의 환상에서 끝내 자유롭지 못하다. 결국 아버지는 스스로 자신의 권력을 거세한 셈이다. 딸 둘 딸린 홀아비가 경제력을 쥐고 있다고 한들 자기가 좋아서 결혼한 새 부인에게 무슨 큰 소리를 칠 것이며, 딸들이 극구 말린 결혼을 한 아비가 그 딸들에게는 무슨 큰 소리를 칠 것이랴. 결국 그가 이 영화 속에서 무력한 것은 말 그대로 자의 반, 타의 반이다. 그리고는 기껏 딸들에게 말한다는 소리는 이 모양일 것이다. "밥 안 굶고, 남들 부러워하는 재력에, 부모에, 교육 교양까지 길러줬으면 됐지, 무슨 말이 그리 많니?"라고.

 더구나 이 영화에서는 더욱 비극적으로 새로 들어온 어머니는 한 술 더 떠서, 완전히 앞서말한 중산층이라는 환상의 성 속의 자발적 유폐자의 절정이라 할 만하다. 화장대에서 의붓딸 들볶을 궁리하다가 남편 발소리에 침대에 다소곳이 누워서 책 읽는 척하는 건 기본이고 -물론 그나마 상식인에 가까운 남편은 그런 부인의 증상을 낱낱이 알기에 무뚝뚝하게 약을 챙겨준다.^^;-, 자기 혼자 애지중지 하는 노란색 카나리아에, 그 새 때문에 의붓딸을 잔인하게 괴롭히고도 다음날 아침에 우아하게 마시는 한잔 차까지, 그녀는 사실 우리나라를 비롯해 일본 등 여러 나라들이 공유하고 있는 중산층 환상의 원형인 영국 빅토리아 시대의 귀족  시민의 삶과 그 위선상 자체를 선망하는 듯 했다.       

 사실 그녀가 선망하는 그런 삶 속에는 의붓딸 따위는 있을 자리가 없다. 물론 아끼고 잘 키워서 남들의 존경을 받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만, 이왕이면 내 핏줄로 아들, 딸 골고루 낳아서 사랑 듬뿍 주고 남편에게 대우받고 남들에게 선망 받을 수 있는 것아 더 기분 좋은 일이다. 근대 이후에 나온 독일의 그림 동화를 비롯한 각종 동화를 보면 알 것이다. 하나같이 남부럽지 않게 잘 사는 집안에서, 의붓자식 몇 있는 걸 밥 한끼를 제대로 안 먹이고 못 잡아먹어서 안달복달하는 모습들을. 사실 그들로서는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다. 보편적이기에 완벽한 그들 머리 속의 중산층 가정의 이상형에는 오직 같은 핏줄로 이어진 부모와 자식들의 벽난로 옆에서의 오붓한 티타임이 있을 뿐이며, 그 사이에 끼고자 하는 반 쪽짜리 이물질은 아무리 참으려 해도 견딜 수 없는 것이다.

 그 속에서 가장 잔혹하게 희생된 것이 동생인 수연(홍련)이다. 끝끝내 누구에게도 자신의 신음을 전하지 못하고, 그냥 그대로 시들어간다. 많은 이들이 말하는 대로 계모로 나오는 엄정화의 수연에 대한 학대가 결국은 자신이 수연을 지켜주지 못한 데 따른 언니인 수미(장화)의 강박관념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해도, 실은 수연이 살아있다면 그와 같은 계모의 폭력을 피할 수 있었을까? 아마 결코 그럴 수 없었을 것이다. 오히려 계모인 그녀는 결혼하기도 전에 수연을 제거함으로써 결혼 이후에 충분히 자신을 거스를 수 있는 수미를 무력화시켜 버릴 수 있었다. 의도하지 않은 결과이기는 했지만.      

 그런 수미의 진실을 안 이후부터 이 영화는 나를 더욱 슬프게 만들었다. 지금의 폭력도 모자라서 과거의 폭력의 기억까지 짊어진 채 괴로워 할 수밖에 없는 한 소녀의 몸부림은 실은 그 어떤 공포보다도 무서운 것이었으며, 그것이 내 경험과도 연결되어 있는 것이었기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모를 비난하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았다. 이뤄질 수 없는 환상에 사로잡힌 그녀가 보여준 혹함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최후의 승자여서도 아니고, 그녀의 잘못이 없어서도 아니다. 그건 단 한가지 이유로만 정당화 될 수 있다. 수미와 수연 자매가, 그리고 내가 겪은 그 모든 아픔에도 불구하고, 난 그 꿈을 포기할 수 없기 때문이다. 때로는 위선적이고 가식적이지만 본질적으로는 품위 있고, 우아하며 교양 있다고 믿고만 싶은, 우리 부모의, 그리고 나의 '중산층' 아니 그 이상을 향한 꿈을.

 난 그러한 부모의 꿈속에서 많이 힘들었고, 지금도 쉽지만은 않다. 그렇지만 그러한 경험 속에서 나는 나름대로 피하고 참아서 끝내 살아남는 법을 조금씩 배워나갔고, 그와 동시에 어쩌면 이제는 부모들이 요구했던 수준을 넘어서 지식의 본질적인 체계에 다가가고 싶어할 정도의 교양을 축적하고 있다.(본질적으로 중산층, 상류층이 갖춰야할 교양은 어느 정도 그 선이 정해져 있는 법이다. 그 선을 넘어서면 그것은 중산층, 상류층으로써의 자격을 갖춘다는 의미가 아닌, 그 지식 자체로 계층의 상승을 노린다는 점을 뜻한다, 쉽지는 않지만......) 어쩌면 이미 나는 그 꿈을 포기할 수 없는 위치에까지 이르러 버렸는지도 모른다. 택한 방법이 다르다고 해서 내가 장화 홍련 속에서의 계모와 또는 우리나라의 수많은 부모들이 추구하는 목적과 별다른 것을 추구할 수는 없게 되었다는 말이다.

 결국 모든 것은 후반부에 낱낱이 드러난다. 스토리의 모호함이 완전히 벗겨진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그 뿌리는 파헤친 셈이다. 늦가을 초겨울의 갈대밭과 그 옆의 저수지, 그리고 그 풍경과 어울리는 노란색 옷을 차려입은 자매, 잠시 후 수연의 가녀린 외침, 한 순간의 수모를 견디지 못해 미래를 담보한 협박을 현재의 괴로움으로 오해해버리고, 눈을 치켜 뜬 채 홀가분한 양, 등을 돌리는 수미. 두 번 다시 집으로 돌아오지 않을 듯한 도도하고 분노에 찬 그녀의 거침없는 걸음은 갈대밭 너머로 향하고, 살의(殺意)를 품은 계모는 그 등뒤에서 하얀색 창문을 닫아건다.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수미의 걸음 뒤로, 두 번 모두 볼 때마다 내가 눈물을 흘리지 않는 것이 원망스러울 정도로 애처로운 이병우의 선율과 함께 그렇게 처연히 시들어 가는 연꽃....... 그렇다. 한 순간의 기억이, 내가 돌이킬 수 없는 그 단 한순간의 기억이 사람을 미치게, 미치고 싶게 만들 수도 있다. 그 때 조금만 더 자상하게, 조금만 더 주의 깊게, 조금만 더, 조금만 더……. 미국 9.11 테러 이후에 미국인들 사이에서는 가족, 친지들의 죽음에 절망한 나머지 '만약 안 그랬다면(If not)' 증후군이 유행했다는 데, 이제는 비로소 그들의 심정을 절실하게 이해할 수 있다. 충분히. '나를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게 만드는 삶의 순간들이 있다. 그때 왜 그랬을까. 그는 내게 왜 그런 짓을 했을까 하는, 기억을 돌이키고 싶지 않고 결과를 돌이킬 수 없어 사람을 옭아매는 순간들 말이다.' 김지운 감독의 말이다. 그래서 난 그 두 자매 모두를 가엾게 여길 수밖에 없었다. 결국은 서로를 그리다 서로가 죽어 가는 모습을 눈물 흘리며 지켜봐야 했던, 죽음의 기억과 그 슬픔에서 헤어나오지 못했던 그 소녀들을 말이다.   

 개봉 이후에 영화의 흐름에 대한 여러 가지 해석이 나왔던 이 영화의 경우에는 특히나 관객에 따라 여러 가지 의견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적어도 내가 보기에 이 영화를 관통하는 그 큰 슬픔과 그 원인을 말하기 위해서는 그동안 우리가 사로잡혀 왔던 중산층에 대한 환상을 말하지 않을 수는 없을 듯했다. 그것이 내 개인적 경험에서 기인한 바가 크다고 할지라도 말이다. 물론 나는 이 영화에서처럼 잔혹한 폭력에 시달리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이 영화가 내가 그동안 안고 살아온, 아니 앞으로도 안고 살아갈 어두운 감정에 대한 놓쳐서는 안 될 본질적인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고 믿는다. 중요한 것은 육체적인 상처가 아니라 정신적인 고통과 그 정도의 문제, 그리고 치유의 과정이며, 때로는 지극히 개인적으로 보이는 그 문제가 모든 사람을 공포스럽게, 비참하게, 슬프게 만들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말로 드러내기 힘든 감정의 복잡함을 섬세하게 표현한 이 영화는 요즘까지도 우리 영화계를 풍미하고 있는 단어인 웰 메이드(Well-Made) 영화의 시작이자, 그 대표라고 할 만하다. 김지운 감독과 임수정, 문근영, 염정아, 김갑수 네 배우의 뛰어난 연기는 기본이고, 영화의 공포와 슬픔을 드러내는데 탁월한 효과를 발휘한 장소 설정, 아름다움과 부유한 분위기 속에 감도는 왠지 모를 어두운 분위기를 훌륭히 드러낸 고풍스러운 세트 디자인과 소품 활용 등 그동안 소홀히 생각하고 또 다루어졌던 부가적인 연출에서의 공력과 아울러, 시종일관 영화 속의 공포, 슬픔, 분노를 넘나들며 그 강약까지도 자유자재로 지배한, 정말이지 슬퍼서 아름답다고 할지 아름다워서 슬프다고 해야할지 알 수 없는 이병우 음악감독의 OST -물론 그 본인이 어느 정도 인정했듯이 그 매력의 이면에는 대중가요적인 선율의 영향이 있다.- 까지 모든 것이 자~알 만들어진 영화였다.

 마지막으로 아직까지 DVD플레이어도 없는 내가 결국은 사버리고야 말았던 '장화홍련' 초회 한정판의 DVD에 들어 있던 -그래봐야 감독, 배우의 랜덤 사인도 못 받았다. ㅜ ㅜ- 컷필름 조각이 끼워진 두꺼운 종이판 -영화 포스터가 그려져 있다- 에는 이런 문구가 써있다.
'Every family has its dark secre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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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파리 2004-06-06 11:14   좋아요 0 | URL
저두 ost가 참 맘에 들었습니다. 극장에서 봤는데, 제 양쪽에 친구들이 무섭다구 제 팔을 붙드는 바람에... 한 고생 했지요.^^

로렌초의시종 2004-06-03 22:46   좋아요 0 | URL
그렇죠? 역시 이병우 씨의 영화음악은 영화의 본질을 꿰뚫고 있는 것 같아요. 전 혼자 봤답니다^^;
 
일식
히라노 게이치로 지음, 양윤옥 옮김 / 문학동네 / 1999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내가 아는 중세(中世)는 이미 어두움이었다. 이 책의 저자도 그런 내 생각과 같았는지 바로 그 시대를 다룬 그의 첫 소설의 제목을 바로 일식으로 정했다. 찬란한 빛의 순간에 갑자기 덮치는 어둠, 일식. 수백년 동안 유럽 대륙의 평화를 지켜주던 로마 제국의 멸망 이후 신의 이름으로 찾아온 천여년 간의 어둠. 그 어둠 속에서 어느 누가 헤메고 있었을까? 작은 프랑스 산골에도 한 수도사, 니콜라가 있었다. 그는 그 어둠 속에서 보고 말았다. 일식의 그 찬연(燦然)한 어둠 속에서 태어난 남과 여의 일체, 영과 육의 하나됨, 신과 인간의 일치의 상징, 안드로규노스를...... 그 순간, 신의 신실(信實)한 아들인 그 역시 결국은 피에르가 창조한 그 신의 화신에게 경배하고 말았다. 그것은 단지 그 한순간의 실수였을 수도 있고, 아니면 그 후 그의 일생 전체를 관통하는 또다른 믿음으로 남았을는지도 모른다.
 
 바로 그 안드로규노스의 창조자인 피에르 뒤페, 자신이 신봉하는 믿음의 결정체로써 시대가 부정하는 또다른 신을 스스로 빚어낸 그야말로, 어쩌면 그 시대에 신의 손에서 벗어난 유일한 인간이었을 것이다. 끊임없이 자신을 지탱해 줄 절대자의 존재를 필요로 했던 니콜라는 그런 그의 피조물인 안드로규노스에게 자신의 뒤섞인 혼을 내던진 채 교접하고 말았다. 아무도 알지 못하는 그의 마음 속을 오직 니콜라만이 유일신의 품에 안긴 채로 읽어내고 있었다. 오직 황금에의 열망으로 안드로규노스의 손을 잡고 끝을 알 수 없는 불 속으로 스스로 뛰어든 피에르. 그에 비하면 그런 그를 바라보는 니콜라는 신과 성 토마스 아퀴나스의 손을 갓난 아기처럼 굳게 잡고 비로소 그 이교(異敎)의 어둠에 뭣 모르고 걸어 들어가는 위태위태한 모습이었다. 게다가 질기다고 밖에 할 수 없는 자신만의 신학적 가치에 대한 고집스러움과 피에르에게서 받아왔던 철학적인 호의마저도 깡그리 잊은 듯이 그의 이단 재판을 앞두고 서슴없이 떠나는 의외의 냉정함에서 그는 역시 신의 어린양이었다. 그 자신에게 피에르의 변호에 나서야 할 다소의 이유와 책임이 있었음에도 말이다. 배울 점은 너무 많은 이였지만 역시 그는 마녀와 떼기 힘든 사이였다는 달콤한 자기 변호를 빼놓지 않은 것은 오히려 니콜라 자신이 그만큼 피에르에 대한 책임을 느끼고 있다는 반증에 다름 아니었다.
 
 확실히 그는 나에게까지 진심을 숨기고 있었다. 안드로규노스의 구석구석을 섬세한 손길로 애무하던 피에르의 모습을 마녀와의 의식(儀式)으로 몰고 가던 그의 깊은 심연 속에 감춰진 것은 다름 아닌 안드로규노스라는 자신만의 신을 창조해버린 피에르에 대한 질투였다. 니콜라는 인정할 수 없었을 게다. 누가 뭐래도 그에게는 하나의 신이었던 안드로규노스가 한낱 인간의 손에서 태어났다는 사실을. 그리고 오직 그만이 그 신을 경배할 수 있다는 사실을. 그 존재는 오직 자기 자신의 것이어야만 했을 게다. 아무도 알아서는 안되었다. 이것은 신에의 죄악이었다. 그렇게 침묵 속에 외쳐대는 질투의 끝에 숨겨진 것은 바로 만인의 유일신(唯一神)이 아니라 니콜라, 그 자신만의 신으로 은밀한 곳에 봉헌된 안드로규노스였다. 그 질투를 참아내고 마냥 우습게만 보였던 기욤이 피에르를 고변할 때까지 기다린 니콜라의 인내심은 굳이 감출 필요도 없었고 말이다. 감추고 싶었던 그의 모든 것은 빛으로써 가려졌다. 태양은 그 모든 추악함을 일식의 어둠으로써 축복하고 신비로움으로 채워주었다. 이면(裏面)에 숨어야만 했던 그 모든 신의 이름으로.
 
 지식도 그 무엇도 아닌 티끌만한 나의 그 무엇으로 풀어낸 일식, 저 뒤의 태양의 광채에 아로새겨진 이 암호를 난 스스로도 비웃을 수 밖에 없다. 사전 한권쯤은 옆에 두고 정성스레 찾아가며 읽었어야 할 책이었지만 이 책과 날 끝없는 거리감에 내던지는 것 같아서 싫었다. 사실 원본은 읽지 않아서 알 수 없으나 참으로 어정쩡한 상태의 글이었던 것도 사실이다. 중요한 어구에는 역주가 있었지만 간간이 나오는 형용사를 놓치기는 아쉽고 찾기는 귀찮았다. 역자의 후기에도 있듯이 이 책이 우리나라에서는 한글의 위대함 덕에 초라하기만 한, 장중한 의고문(擬古文)이 아닌 단순히 현학적인 천박함을 군데군데 드러낸 채로 남은 것은 아쉽기 짝이 없는 일이다. 책 속으로 깊숙이 들어서면 결국에는 불분명한 역할로 묻혀버린 인물들이 혼란스러웠을뿐더러 영(靈) 육(肉)의 일치와 분열의 초석이 다져지는 시대의 중심을 당대 철학의 중심지였던 이탈리아의 니콜라가 아닌 프랑스의 벽촌에서 광신자와 배교자 사이에서만 헤메는 니콜라로 삼은 것도 그 뜻을 좁힌 것만 같아서 서운했다. 사실 이런 데뷔작은 꿈에서도 쓸 수 없는 나이지만 나 역시 그가 드리운 일식의 신비롭기 그지없는 검은 장막을 사랑했기에 하는 말이다. (2000. 4. 6.~10, 2000. 4. 10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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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찰순례 3
최완수 / 대원사 / 199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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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느덧 막바지에 이른 이 순례에 아쉬움을 느끼며, 지난 여정도 다시금 되새겨 보았다. 마지막이라 생각하니 절의 모습 마다마다가 절실한 신앙심의 후광을 입어 깨치지 못한 나그네의 마음에 놓칠 수 없는 가르침을 남겼다. 특히 초기 남선종(南禪宗)의 중심지인 쌍봉사는 쇠락해가던 신라 말기의 사상계를 혁신한 곳이라는 역사적 의의가 요즘같은 변혁기에는 더욱 돋보여서 내 관심을 끌었다. 변혁기는 사상으로써 시작된다. 변혁 후의 새로운 사회에 대한 이론적 배경의 제공을 위한 것이다. 박혁거세 이래로 천년을 버텨온 신라의 말기 역시 그랬다. 문무왕의 통일 후, 중앙귀족세력의 비호를 받으며 성장한 교종(敎宗)이 쇠퇴하고, 나날이 그 세력을 떨치는 지방 호족 세력의 지원을 받으며 급부상한 새로운 종파가 바로 선종(禪宗)이었다. 다시 보면 통일의 태평성대라고 할 수 있는 시절에 교종이 흥성하고 피가 피를 부르는 혼란기에 선종이 흥성하기 시작한 것은 두 종파의 성격과도 뗄 수 없는 연관이 있다. 교종은 말 그대로 경전의 해석과 강독을 중심으로 하는, 지식인 곧 교육을 받은 이들만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었으므로 교화의 폭이 좁았다. 이 좁은 '폭'이야말로 오늘날 교종적인 목소리가 우리 불교 안에서 호소력을 갖지 못하는 이유이다. 이에 비하여 선종은 불립문자의 종지(宗旨)에서도 알 수 있듯이 교종과의 차이가 분명했다. 더구나 즉심시불(卽心是佛)이라는 말로 성불하는 데 있어서 무엇보다도 마음이 중요함을 밝힘으로써 수도의 근본을 잡았다고 말하기에 모자람이 없었다. 물론 교종의 수행이 잘못된 것은 아니다. 개인적으로는 문자라는 뚜렷한 기준이 존재하는 교종의 수행방식이 나에게 더 적합하리라고 생각하고 있다. 항상 글이라는 걸 읽으며 행복을 느껴온 나로써는 그 행복의 끝에 있는 깨달음도 역시 글을 통해서 얻고 싶다는 것이 솔직하지만 역시 아직은 깨닫지 못한 생각이기 때문이다. 다만 불교의 궁극적 목적인 깨달음의 성취를 위해서 교종은 '글'이란 수단을 강조했지만 선종은 무엇보다도 깨달음이 내재된 마음만을 유일무이한 수단이자 목표로 내세운 것이다. 지난날 먼저 깨달은 이들을 경전에서 살피고 그로써 자신의 깨달음을 이루려는 교종이 피동적이라면 오직 개인의 피나는 정진에 깨달음의 모든 것을 맡기는 선종은 능동적이었고, 바로 그 개인의 정진을 강조하기 위해 자연 교종이 강조하는 경전을 무시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 교종과 선종의 대립 이유이자, 숙명이었다. 그래서인지 역대의 고승들이 남긴 일화를 보아도 선종의 고승들은 성품이 더 괴팍한 듯 했다. 바로 경전에 대한, 먼저 깨달은 이에 대한 무시와 선종 자체의 능동성, 적극성이 결합해서 오늘날까지도 우리 같은 속세의 중생들의 입에서도 회자되는 선사들의 기괴한 언행으로 남은 것이 아닐까? 좁은 우리나라에서도 신라 시대 국교였던 불교에 속해 있는 여러 종파 가운데 하나둘에 이렇듯 정치 사정까지 연계될 정도로 한 때 종교는 그들이 늘 말하는 '절대자', '깨달은 자', 그 자체로써 빌린 권위를 제것인양 말하던 때가 있었다. 겨우 몇 장의 지면으로 만나 본 남도의 절 쌍봉사는 이렇듯 그 역사적 의의에 걸맞게, 지나는 나그네에게 시사하는 바가 많았다. 이 또한 명찰을 순례하는 여러 기쁨 중 하나로 남기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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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찰순례 2
최완수 / 대원사 / 199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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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을 읽는 동안 전 편에서 느낀대로 시문서화, 조각, 건축의 총체라고 할 수 있는 사찰 기행문은 그만한 자질과 경륜이 필요하다는 것을 절감했다. 오래된 것이라 해서 맹목적으로 칭찬하지 않고, 새로운 것이라하여 무조건 천박한 취향이라고 비웃지 않는, 시대도, 그 무엇도 아닌 오직 문화재 자체만을 바라보는 감식안은, 다름 아닌 자질과 그 속에서 길러지는 경륜의 뒷받침이 있어야만 하는 것이니 말이다. 더구나 요즘같이 절마다 앞다투어 새로운 불사를 벌이는 때일수록 필요한 것이 이런 감식안을 소유한 전문가다. 절마다 나름대로 깃들어있는 특성을 무시하고 무조건 크고 화려하게만 세우려는 허욕보다는 미래에 또다른 문화재로 남을 수 있도록 신앙심과 장인정신을 아울러 발휘할 수 있도록 인도하는 것이 바로 배운 이, 학자의 역할이라고 생각했다. 그 중추에 서있는 이가 지은이라는 사실을 답사가 더할 수록 체득했음은 물론이다. 그런 지은이와 함께 이번에도 여러 명찰을 참례하였다. 전생과 현생의 무명(無明)으로 말미암아 지옥에서 고통받는 중생까지도 모두 구하기 전에는 성불하지 않으리라 서원한 지장보살 도량인 고창 선운사는 나도 자주 찾는 우리 고장의 명찰이라 더욱 유심히 보았다. 지장보살의 거룩한 서원은 그 존상에서부터 정성으로 수놓아졌다. 때문에 세우신 바 서원의 위대함이 더욱 절실하게 다가왔다. 또한 지장보살 외에도 천장, 인장의 두 보살을 더 모시는 삼장 신앙이 유행하였고 도솔암 내원궁의 주존 보살이 지장보살이 아니라, 천장보살이란 것도 알게 되었다. 불교 교리에 정통하신 지은이에게서만 배울 수 있는 고견임에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이제 눈을 돌려 타 지방의 명찰을 살피니 부처님과 보현보살의 동물인 코끼리, 그 중에서도 왕이라는 상왕산(象王山)의 개심사(開心寺)가 있었다. 더군다나 절이 소재한 고장의 이름도 충남 서산(西山)이었다. 부처님이 서역에서 오셨다고 했으니 이 절은 여러모로 불교와 깊은 인연을 지닌 셈이다. 비록 모든 것이 하나하나 만들어진 것이라해도 이렇게 이름 하나하나가 서로 깊은 인연을 맺는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니 말이다. 이렇듯 이름들도 잘 지었지만, 그에 못지 않게 좋은 것은 일찍이 유홍준 교수의 책에서도 익히 보았던 수수하지만 사람을 잡아끄는 맛이 있는 경치였다. 절의 이름에 매력을 느끼고 찾아가서 그 경치를 보면 누구나 속세의 먼지에 찌든 마음을 열고 말끔히 씻어낼 테니 말이다. 이렇듯 첫 인상(?)이 좋은 개심사였다. 그래서인지 개심사에서 나는 오히려 직접 가서는 보기가 힘든 진보(珍寶)를 보는 영광을 얻었다. 바로, 무려 10.1m에 이르는 대영산 괘불탱이었다. 그 장엄함도 장엄함이려니와 개인의 자격으로 가서는 보기가 쉽지 않은 이 작품을 지면을 통해서나마 보게 해주신 지은이에 대한 감사와 이러한 신심의 결정체라 할 만한 작품을 이루어낸 오롯한 신앙심에 대한 감탄을 금하기 어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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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찰순례 1
최완수 지음 / 대원사 / 199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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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절은 언제나 찾아간 이의 마음을 평안하게 감싸주는 곳이다. 그러나 이러한 해탈의 도장을 자주 찾지 못하는 것이 저마다 하루하루를 바쁘게 사는 오늘, 우리의 아쉬움이다. 나 역시 그런 아쉬움에서 벗어나지 못하던 차에 시중에 있는 다양한 사찰 순례기 중에서도, 우리나라의 저명한 미술사가 이신 최완수 선생님께서 쓰신 이 책을 읽게 되었다. 다행히 내 선택은 어긋나지 않았다. 이 책은 단순히 절의 풍광(風光)과 지은이의 감흥만을 기록한 것이 아니라, 그 절의 창건 및 중창 시의 미술사조와 시대 배경까지 날카롭게 서술하는 데서 전문가의 면모가 확연히 드러났다. 특히 절과 전각들의 얼굴이라고 할 현판(懸板)에 대한 이야기까지도 세세히 기록하셔서 서예 분야에 소견이 얕은 나에게는 큰 도움이 되었다.

 이렇듯 이 책은 절이라는, 시(詩) 문(文) 서(書) 화(畵), 조각, 건축 등이 모인 종합 문화재에 대한 지식을 매우 충실하게 소개한 점이 특기할 만 했다. 그러나 한정된 지면에 많은 것을 소개한 탓인지 지은이 개인의 감상은 상당히 축소되었다. 본디 자신의 감정 드러내기를 꺼리는 선비 정신의 발현일까? 여정과 견문에 밀려서 같이 느끼고 싶은 감상의 자리가 줄어든 것이야말로 이 책의 가장 큰 아쉬움이다. 이런 허전함을 안고 떠난 길이었지만 그 여로(旅路)에서 얻은 배움만큼은 가벼운 것이 아니었다. 그 중에서도 많은 가르침을 주었던 곳으로는 조선의 실학 부흥을 위해 힘썼던 정조(正祖)가 비명에 떠난 부친, 사도세자(思悼世子)를 위한 원찰(願刹)로 세운 용주사가 있었다. 오늘날 우리나라에서 널리 읽히는 부모은중경의 대부분이 바로 이곳 용주사 판(版)이라는 것도 효의 결정체로써의 이 절의 성가(聲價)를 높이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더군다나 이 절의 대웅전에 모셔진 삼계여래탱화가 전에 단원 김홍도 탄신 250주년 기념전에서 감상한 작품이어서 더욱 반가웠으며, 그림에 쓰인 서양화법이 정조의 영도 아래 실학의 물결이 넘실대던 당시 시대상의 훌륭한 반영임을 비로소 알 수 있어서 기뻤다.

 이 곳을 떠나니 우리나라 최대의 비구니 강원이라는 청도 운문사가 있었다. 흔히 '사연 있는 여자' 정도로 생각하는 여승들도 교과 과정부터 심지어는 방학에 이르기까지 일반 학생들과 다름없다는 사실을 알고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 곳에서 무엇보다도 절실하게 느낀 점은 관점의 차이였다. 바로 유홍준 교수가 생각 난 탓이었다. 그는 자신의 저서에서 운문사의 새벽 예불을 절찬한 바 있었는데 이 책에서는 그에 대해서 일절 언급이 없었다. 일순 서운했으나 그 후 생각한 것은 제도권과 비(非) 제도권이라는 두 학자의 근본적인 성향 차이였다. 유 교수는 대게 비 제도권 쪽의 입장에 있었고, 사찰 답사에 있어서도 제도권에서 확립한 정형화된 지식과 풍경보다는 그들이 지나친 유물과 경관을 자신의 축으로 삼았다. 반면 지은이는 제도권, 곧 그동안의 전통에 충실했으며, 그 자신이 바로 새로운 전통이었다. 다르게 생각한다면 유 교수는 그 자신이 이야기했듯이 불교에 관심이 없었으나 지은이는 그에 통달한 이였다. 그래서인지 절을 볼 때도 유 교수는 그 아름다움을 보다 폭넓은 시야로써 찾았고, 지은이는 오직 그 절 자체에서 찾았다. 누가 낫다고는 할 수 없다. 다만 배우는 이로써는 그 두 가지 모두를 배우고 갖추기 위해서 애쓰며, 배우는 것을 즐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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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4-05-13 16:37   좋아요 0 | URL
종교를 떠나 사찰은, 왠지 모를 맘의 더께를 덜고 싶을 때 발걸음하고 싶은 곳이죠.
그냥 사찰에 들러 풍경 소리에 귀기울이고 , 스님들의 예불 소리에 숙연해 지고, 불당에서 퍼져오는 은은한 향내에 취해 보고, 그리고 탱화가 주는 흡입력에 잠시 이 세상이 아닌 곳에 와 있다는 느낌을 안고 오는 것만으로도 족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아는 것만큼 보인다고....사찰에 대한 전문적 지식을 갖추고 사찰에 들렀을 땐 또 다른 차원의 세계를 만나게 되리라 확신합니다.
불교 사상과 미술에 관심이 있어서인지...님의 리뷰, 더 반갑고 유익하네요. 유홍준 교수의 집필관과 저자의 그것을 비교 분석하신 점..리뷰의 백미같아구요. 잘 읽고 갑니다.

2004-05-13 16:39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