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루마블 위픽
이종산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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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위픽 시리즈의 판형은 물론 분량과 좌측 정렬의 본문 디자인 같은 모든 요소들이 이미 흥미로웠다. 예측하기가 어려웠다고 말해야 할까.

 

 책의 외형요소들부터 전형적이지 않았고, 내용도 그러했다. 여성들 간의 사랑 이야기라는 아주 기본적인 얼개만 파악했고, 이 작가가 능히 다룰 주제라고 생각하며 들였던 기억이 난다. 장소는 전주 남부시장 청년몰의 책방토닥토닥이었다.


얼마나 깊게 빠지든 모든 사랑은 지나간다. 지나고 나면 아무것도 아니다. 푸른은 그렇게 생각했다. 오랫동안 그렇게 생각해왔다. -9쪽

“그래, 그럼 평생 이렇게 갇혀 있든가. 나도 시계에 갇혀 있나 이 방에 갇혀 있나 그게 그거야.시계보단 여기가 낫지. 너랑 나랑 평생 여기서 둘이 살자.어차피 금방 굶어 죽을 거라 같이 오순도순할 시간이 그리 길진 않겠지만.” -27쪽

 

 씨네21의 누군가는 별 넷 이상을 줄 법한 단편영화처럼, 어차피 길지 않아서 여백이나 비약을 굳이 아끼지 않는 밋밋한 전개일까 싶었다. 대화보다 독백이나 관찰이 더 많은 전개라거나. 처음 몇 페이지 정도는. 지레짐작이 틀려먹었다는 생각까지는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고, 역시 표리일체라고 안도했다. 은유와 여백으로 시처럼 전개되는 거의 모든 영상 작품을 좋아하지 않는다. 이 작품이 다행히 그렇지 않았던 덕에, 이 설정으로 이 분량에서 이 서사라면 대체 어떻게 전개될지 궁금해져 버렸다.


“자전거를 타고 전 세계를 도는 거예요. 말도 자전거 모양으로 하고, 도시마다 있는 자전거 타기 좋은 길도 소개하고요. 방금 떠오른 거라 아직 구체적인 건 더 생각해 봐야겠지만, 재밌을 것 같지 않아요?”

푸른의 이야기를 듣고 구슬도 표정이 밝아졌다.

“좋은데요? 자전거를 타고 돌아다니면서 별장이나 호텔을 짓는 대신 공공건축물을 지어도 좋겠어요. 미술관이나 도서관 같은 거요. 복지 센터도 좋고요. 도시에 건축물을 지으면 거기에 게임 참여자의 이름이 붙는 거죠.” -55쪽

 

 잡지 ‘캐치’의 기자와 디자이너인 두 사람, 푸른과 구슬의 사랑 이야기는 그 자체로 블루마블이자 부루마불이다. 두 사람만 잡지의 창간 기념 이벤트로 보드게임을 개발하는 과정, 그렇게 엮인 상황에서 구슬에게 전부터 호감이 있던 푸른의 사랑을 떠미는 뜻밖의 보드게임, 이 두 보드게임의 결과로 전개되는 푸른과 구슬의 관계까지, 이 세 개의 축이 모여서 하나의 거대한 보드게임을 이룬다. 완결성 있는 소품, 소품이라는 점을 의식하지 않고 소품으로서 완성되는, 그래서 가장 소품다운 소품이란 이런 작품일 것이다.


“어쩌면 신들이 장난을 친 걸지도 모르겠네요.

신들의 장난. 푸른은 구슬의 말뜻을 금세 알아들었다. 푸른이 구슬에게 고백한 직후에 일부러 ‘고백하기가 나오도록 장난을 친 거라면? 그럴 수도 있었다. 충분히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거지 같은 보드게임을 만든 자들이라면. -123~124쪽

 

 세 개의 축이 서로를 의식하지 않은 채, 마치 하나의 보드게임 속 각자의 플레이어처럼 각자 움직이는 까닭에 결국 이 플레이어들이 만났을 때 비로소 부루마불은 부루마불다워진다. 하나의 칸에 둘이 놓일 때 비로소 불화가 발생하고 갈등이 형성되며 긴장이 고조된다. 구슬이 푸른의 뜻밖의 보드게임을 알아챘을 때부터 마냥 감미롭던 이야기가 곤두박질쳤다. 말이 잡거나 잡히거나, 돈을 받거나 잃거나. 인간의 보드게임이다.


 하지만 신들은 각자 푸른과 구슬을 말로 자신들의 보드게임을 했을지 모른다. 이 이야기를 읽듯이 신들도 그들의 게임을 단지 즐겼을 것이다. 결국 이것은 철저히 승패와 무관한 보드게임이기 때문이다. 신이라면 주사위조차 의미가 없어서 그렇다. 어떤 우연도, 의외도 없다. 단지 필연과 의도만 있다. 신이라면 바로 이렇게, 가장 즐겁게 주사위 놀이를 할 것이다. 언제든 무엇이든 원하는 숫자가 나올 테니까. 누구도 패배하지 않은 블루마블의 보드게임이야말로 신들의 장난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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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더 이상 우리 종과 "짐승"들 사이에 이전과 같은 경계선을 그을 수 없다. 지능, 감정, 쾌고감수능력快苦感受能力, sentience을 "이성이 없는 짐승들과 구분 짓는 경계로 여길 수 없게 된 것이다. 원숭이, 코끼리, 고래, 개 등 이미 우리와 "유사"하다고 인식하는 종류의 동물과 지능이 없다고들 하는 다른 동물 사이에도 경계선을 그을 수가 없다. 지능은 현실 세계에서 대단히 다양한 흥미로운 형태를 띠며, 인간과는 매우 다른 경로로 진화한 새들도 여러 비슷한 능력을 갖고 있다. - P18

우리는 지적이고 복잡한 지각력을 가진 동물의 삶의 형태를 변형시키고 있다. 이들 동물 각각은 번영하는 삶을 얻기 위해 노력하며, 각각의 동물들에게 어려운 도전을 안기는 세상에서 괜찮은 삶을 얻어낼 수 있는 개별적이고 사회적인 능력을 갖고 있다. 인간은 이런 노력을 좌절시키는 일을 하고 있다. 이는 부당한 행동이다. (1장에서 나는 이런 윤리적 직관을 정의에 대한 기초적인 아이디어로 발전시킬 것이다.) - P19

대부분의 국가의 경우 동물들은 법률가들이 "원고적격原告適格, standing"이라고 부르는 지위, 즉 부당한 대우를 받았을 때 소를 제기할 수 있는 지위를 갖지 못한다. 물론 동물은 직접 소를 제기할 수가 없다. 하지만 어린이나 인지 장애가 있는 사람을 비롯해 대부분의 인간, 아니 솔직히 말해 거의 모든 사람이 소를 제기할 수 없다. 법에 대한 지식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사람이 자신의 주장을 입증하기 위해 변호사를 필요로 한다. 평생 인지 장애를 가진 사람들을 포함하여 모든 인간은 능력 있는 변호사의 도움을 받아 소를 제기할 수 있다. - P19

위대한 플루티스트 장피에르 랑팔Jean-Pierre Rampal(1922~2000)은 새의 지저귐을 플루트 악보로 옮긴 많은 작품을 녹음했기 때문에 나는 코넬조류학연구소Cornell Lab of Ornithology 웹사이트에서 능란한 노래를 들려주는 핀치finch에게 그의 이름을 붙였다. 장피에르는 수컷 멕시코지니House Finch다! 부리 바로 위에는 밝은 적색 깃털이 있고 머리 뒤쪽으로 넘어가면서 색상은 붉은 회색으로 변한다. 부리 아래에서는 붉은색이 분홍색과 흰색으로 변화하고 배 아래쪽에는 회색 줄무늬가 이어진다. 날개에는 회색과 흰색의 줄무늬가 있다. 그는 높거나 낮게 흐려지며 끝나는 짧은 곡조의 빠른 노래를 부른다. - P25

이론은 행동을 이끌고, 나쁜 이론은 나쁜 행동을 이끈다. 나는 이 영역에서의 지배적인 이론들에 결함이 있으며, 내 이론이 더 나은 행동을 이끌 것이라고 생각한다. - P28

경이는 우리를 자신에게서 벗어나 다른 대상으로 향하도록 한다. 경이는 우리 자신의 개인적인 행복 추구와는 관련이 없는 것 같다. 경이는 삶 자체에 대한 본원적인 기쁨에 연결되어 있다. 경이는 자기애나 자부심과는 동떨어져 있고 놀이와 가깝다. 경이는 아이 같다. 놀라운 존재들의 세계에서 뛰놀고 있는 우리 인간성이다. - P48

심리학자 C. 다니엘 뱃슨C. Daniel Batson의 실험에서처럼 연민 그 자체가 이미 도움이 되는 행동을 유발한다. 하지만 연민은 약한, 혹은 최소한 불완전한 동기 유발 요인으로 입증되는 경우가 많다. 연민이 주는 메시지는 "이런 것들은 나쁘다. 따라서 더 낫게 만드는 것이 그들에게 좋다"는 것이다. 연민은 피해자를 돕는 행동을 하는 이유가 된다. 하지만 피해자의 고통에 집중하기 때문에 고통을 유발하는 가해자 행동의 부당성에는 온전하게 반응하지 않는다. (이 과제를 개념적으로 단순하게 만들기 위해서, 뱃슨의 실험 대부분은 부당한 일이 없는 고통, 예를 들어 다리가 부러져서 수업에 가는 데 도움이 필요한 학생 등과 관련된 것이었다.) 따라서 연민 자체는 가해자가 가하는 추가적인 피해를 막는 데 이르지 못한다. 이 때문에 우리에게는 다른 감정, 지금까지 내가 "격분"이라고 불렀던 감정이 필요하다. - P54

프레임워크의 선택은 우리가 어디까지 갈 수 있는가에 영향을 미친다. 진실과 이해를 위해서는 이론을 바로 세우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를 막다른 골목으로 향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올바른 방향으로 출발하게 하는 전략을 세우는 것이 중요하다. - P75

인격이란 아무리 폭을 넓혀도 인간 중심적이다. - P83

그러나 좋든 싫든 언어는 철학적, 과학적 연구의 매개체다. 따라서 "더듬더듬하는 번역stammering translation"(작곡가 구스타브 말러Gustav Mahler가 자신의 음악을 말로 묘사하려는 시도에 사용한 말)이 반드시 이루어져야 한다. 신중하고, 겸손한 태도를 갖고, 자원을 충분히 이용한다면 이런 일을 동물 세계 전체에 걸쳐서 하지 못할 이유는 없다. - P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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컨셉 수업 - 번뜩이는 아이디어를 잘 팔리는 비즈니스로 이끄는
호소다 다카히로 지음, 지소연.권희주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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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분야, 방식, 규모 등을 막론하고 경쟁에서 우위를 점하는 것이 컨셉의 목표다. 그런 까닭에 컨셉 자체는 물론이고 그 컨셉을 기획, 실행하는 경로를 제시하는 이 책과 저자도 이율배반의 상황에 놓인다. 컨셉은 어떤 소비자들을 만족시켜야 하지만 모든 소비자를 만족시킬 필요는 없고, 그 어떤 소비자들의 명확한 문제이자 해답이어야 하며, 그들이 여태 도출하지 못했지만 바로 납득되어야 한다. 따라서 컨셉은 치밀하면서도 결국은 참신해야 한다.

 

이 책의 순서에 따라 비즈니스 과제를 마주하고 논리적으로 차근차근 생각하면 세상에 내어놓아도 부끄럽지 않은 컨셉을 만들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 책의 내용만으로는 사회에 큰 의미를 가져다줄 컨셉을 작성하기에는 부족합니다. 역설적이지만 프레임워크라는 논리의 힘을 최대한 이용하려면 논리를 뛰어넘는 비정상적인 값이 필요하니까요. -375

다시 말해, 더 퍼스트 테이크는 부담 없이 음악을 즐기고 싶지만, 아티스트의 진심을 느끼고 싶다는 팬들의 욕심 가득한 인사이트에 아주 분명한 답을 내놓은 셈입니다. -147

 

 이 책은 치밀하게 컨셉을 수립하는 방법을 가르쳐주지만, 결정적인 컨셉은 이 치밀한 논리와 구조 이후에 도출되어야 한다는 지적으로 마무리된다. 일종의 자기 부정인 동시에, 지극히 논리적인 귀결이다. 치밀한 컨셉이 논리적인 정량의 영역이라면, 참신한 컨셉은 결정적인 정성의 영역이다. 치밀함이 누적시키는 성취와 참신함이 확산시키는 전환은 서로 비교하는 것이 무의미한 컨셉이다억지로 우열을 가린다면 결정적인 전환을 일으키는 참신한 컨셉이 우위에 놓이겠지만, 치밀한 기반 없이 참신한 첨단만으로 돌파하는 컨셉은 그야말로 논외의 사례다. 극히 드문 까닭이다. 참신한 컨셉을 결국 이룬 그 사람이 치밀함의 자질 역시 함께 갖추었거나 그가 속한 조직이나 구성원이 치밀한 컨셉으로 참신함을 지탱하는 것이 상례다. 이 책이 결국 사회에 큰 의미를 가져다줄 참신한컨셉을 작성하기에는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자인하기까지 치밀한컨셉을 하나하나 짚어주고 풀어준 이유다.

 

부분에서 전체로 객관에서 주관으로 현실에서 이상으로, 이러한 질문 바꾸기는 모두 평소의 시야에서 벗어나 자신의 관점을 부러 의식하지 않는 한 보지 못하는 각도로 돌리기 위함입니다.

그러나 질문의 재구성이 반드시 일방통행일 필요는 없습니다. 반대 방향으로 바꾸는 것이 더 효과적일 때도 있으니까요. ‘전체에 관한 질문을 생각하다가 너무 막연하다는 느낌이 들 때는 부분에 관한 질문으로 방향을 전환해 봅시다. ‘주관적인 질문을 설정했더니 너무 치우친 아이디어만 떠오른다면, 이번에는 객관적인 질문을 생각해 보세요. ‘이타적인 질문이 위선적인 아이디어만 이끌어낼 때는 이기적인 질문을 떠올리면 됩니다. 렌즈를 교환하여 사진을 찍듯이 양방향으로 관점을 유연하게 바꾸어봅시다. -114

 

 자신이 제시하는 통찰과 기법의 효용성을 구체적, 논리적으로 구축한 후에, 그 한계로 매듭을 짓는 점에서 이 책의 저자가 그 흔해진 호칭인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의 본질에 부합한다고 여겼다. 제대로 된 약을 팔고, 제대로 약을 판다는 점 모두에서 그렇다. 이 책은 각 파트들부터 그 파트들이 모인 전체 구성까지, 당장 활용할 수 있는 기법, 요령들을 깊이 있게 제시한 다음, 그것으로는 끝내 채울 수 없는 참신함의 지점으로 결말을 맺는 컨셉이 일관되다.

 

여기서 가치와 컨셉의 차이를 다시 한번 짚어보겠습니다. 당신의 회사·조직·브랜드는 "무엇을 믿고 어떻게 행동하는가?"라는 물음에 답하는 것이 가치입니다. 행동 원칙이나 행동 지침이라고 바꿔 말할 수 있지요. 반면 "앞으로 무엇을 만들고자 하는가?"라는 물음에 답하는 것이 컨셉입니다. -350

 

 컨셉의 논리를 실컷 가르치고서 이것으로 결정적인 컨셉은 도출할 수 없다는 마무리가 잘 보아도 선문답, 나쁘게 보면 기만으로 비칠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참신한 결정적 컨셉을 위해 결국 그 한 사람, 그가 속한 조직의 치밀한 컨셉이 얼마나 중요한지 깊이 확신한 결과로 보였다. 컨셉이 과제를 돌파할 수 있는 정형적인 논리, 계획, 방향이 항상 중요하지만, 그 과제 이후의 과제를 위한 컨셉은 결국 비정형성을 직시할 수밖에 없다는 이율배반이 이 책의 컨셉이다. 납득하기 쉬운 컨셉보다 납득해야 하는 컨셉을 제시하는 수업이다.

 

 비슷한 범주의 무수한 책 사이에서 이 책을 만난 것은 행운이다. 경제경영, 자기발 범주의 책을 아예 안 읽는다면 모르거니와 읽는다면, 읽어야 한다면 앞으로 이 이상의 책을 찾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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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네요! 푸른 님 이름이랑 구슬 님 이름을 영어로 하면 블루와 마블이니까 부루마블이랑 마찬가지네요. 진짜 신기한 우연이다."
루미가 재밌다는 듯 맞장구를 쳤다. 푸른은 루미의 말을 흘려들으며 구슬을 봤다.
‘구슬 님도 나랑 부루마블을 만들게 될줄은 몰랐겠지? 귀찮은 일을 떠맡아서 기분이 안 좋으려나?‘
그때 푸른과 눈이 마주친 구슬이 활짝 웃었다. 그 미소를 보자 가슴이 설렜다. 푸른은 부푸는 기대를 애써 억눌렀다.
‘김칫국 마시지 말자. 저건 업무용 미소야. 동료를 향한 사심 없는 미소. 예의상 짓는 미소라고. 나랑 일하게 돼서 짜증 난다는 티를 낼 수는 없으니까 억지로 웃는 걸 거야.‘
하지만 억지로 웃는다기에는 너무나 밝은 미소였다. 푸른은 무표정한 얼굴로 그 미소를 외면했다. 사실은 기뻤다. 따로 보상도 없고 기한도 촉박한 일을 떠맡게 된 건 귀찮았지만, 그 일을 구슬과 함께 한다고 생각하니 오히려 기대됐다. 그러나 그런 마음을 들키고 싶지는 않았다. - P8.9

얼마나 깊게 빠지든 모든 사랑은 지나간다. 지나고 나면 아무것도 아니다. 푸른은 그렇게 생각했다. 오랫동안 그렇게 생각해왔다. - P9

구슬은 익숙한 동작으로 보관대에서 자전거를 빼내어 타더니 금세 멀어졌다. 푸른은 자전거를 타고 가는 구슬의 뒷모습을 사라질 때까지 바라봤다. 사실은 집이 어디인데 걸어가느냐고 물어봐주길 바랐다. 합정역 근처에 있는 회사에서 당산역과 영등포 사이에 있는 집까지 걸어가면 한 시간이 조금 넘게 걸린다. 푸른은 사람으로 꽉 찬 버스나 지하철을 타는 것보다 시간이 좀 걸리더라도 걸어서 가는 것이 좋았다. - P13

"그래, 그럼 평생 이렇게 갇혀 있든가. 나도 시계에 갇혀 있나 이 방에 갇혀 있나 그게 그거야. 시계보단 여기가 낫지. 너랑 나랑 평생 여기서 둘이 살자. 어차피 금방 굶어 죽을 거라 같이 오순도순할 시간이 그리 길진 않겠지만." - P27

"아니, 중요한 건 그 사람이 널 좋아하는지 아닌지에 달렸지. 여자인지 남자인지에 달린 게 아니야. 말도 안 되는 핑계 대지 말고 얼른 전화해! 다시 말하지만 대단한 걸 하라는 게 아니고 전화만 하라니까?" - P28

"모노폴리라는 게 기본적으로 부동산 독점을 바탕으로 만든 게임이잖아요. 부루마블은 모노폴리의 일종이고요. 저는 솔직히 좀 거부감이 들어요. 다들 부동산 가격이 미친 도시에 살면서 집값 때문에 허덕이는데, 부동산 독점 게임을 만들고 즐긴다는 게 별로예요."
구슬은 그동안 이런 비판적인 이야기를 꺼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내가 조금 편해지신 걸까?‘ 생각하면서 푸른은 조심스럽게 자신의 의견을 이야기했다. - P47.48

"아니에요. 모노폴리는 원래 부동산 독점을 비판하기 위해 만들어진 게임이라고 하잖아요. 그러니까 허무함이 모노폴리 게임의 진짜 정서일 수도 있겠죠. 그런데 잠깐 꾸고 마는 꿈이 정말 의미가 없을까 하는 생각이 들긴 해요. 저한텐 그런 게 의미가 있는 것 같아요."
"꿈이 끝나면 현실로 돌아와도요?"
"글쎄요, 그거랑은 좀 다른 것 같은데…… 저는 꿈이 현실을 바꾸기도 한다고 생각해요. 현재 눈앞에 놓인 상황만 생각하면서 그게 현실이라고 생각하다 보면 체념하게 되는 것 같아요. 저는 그것보다는 내가 원하는것을 꿈꾸고, 그 꿈이 현실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하는 쪽이 훨씬 더 좋아요."
푸른은 자기도 모르게 뜨거운 목소리로 자신의 생각을 말해놓고는 민망해져서 머리를 긁적였다. - P49.50

"자전거를 타고 전 세계를 도는 거예요. 말도 자전거 모양으로 하고, 도시마다 있는 자전거 타기 좋은 길도 소개하고요. 방금 떠오른 거라 아직 구체적인 건 더 생각해 봐야겠지만, 재밌을 것 같지 않아요?"
푸른의 이야기를 듣고 구슬도 표정이 밝아졌다.
"좋은데요? 자전거를 타고 돌아다니면서 별장이나 호텔을 짓는 대신 공공건축물을 지어도 좋겠어요. 미술관이나 도서관 같은 거요. 복지 센터도 좋고요. 도시에 건축물을 지으면 거기에 게임 참여자의 이름이 붙는 거죠." - P55

"당신이 정말 좋아." 중얼거리고는 자신의 마음이 그 말로 가득 차서 울리는 것을 느꼈다. ‘당신이 좋아. 정말, 정말로. 당신이 너무 좋아.‘ 더 이상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푸른은 가만히 누워 구슬을 떠올렸다. 사랑이 편안한 적은 처음이었다. 도망치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 사랑은 처음이었다. 그저 더 다가가고 싶기만 했다. 더 가까이. 구슬의 곁에 있고 싶다는 생각만 들었다. 지금 이 순간 푸른은 구슬을 그리워하고 있었다. 사랑하고 있었다. - P70.71

"저녁 드셔야죠."
구슬이 상자 뚜껑을 덮으며 말했다.
푸른은 감사하다는 말이 툭 튀어나오려는 것을 간신히 참고 담담한 척 고개를 끄덕였다.
"네, 배고프네요. 드시고 싶은 거 있으세요?" - P109

"아니요. 그건 하나도 안 부담스러웠어요. 전혀 부담스럽지 않았어요, 푸른 님 고백."
구슬이 딱 잘라 말했다.
"그러면 그날 왜 그렇게 가신 거예요?"
"생각해보세요. 푸른 님 방 문이 열려 있어서 무심코 안을 봤는데 뻐꾸기는 말하고 있고, 푸른 님은 주사위를 던지고, 침대 위에서 폭죽이 팡팡 터지고. 내가 모르는 이상한 게임이 펼쳐지고 있는데 푸른 님 같으면 거기 계시겠어요? 아무렇지 않게 방으로 들어가서 이게 다 뭐냐고 물어볼 수 있으시냐고요."
"못 물어봤겠죠. 너무 당황하고 놀라서 일단은 밖으로 나갔을 것 같아요."
"저도 그랬어요."
"그랬군요."
두 사람은 어색하게 골목에 서서 고개를 끄덕거렸다. - P119.120

"제가 하고 싶어서 시작한 게임은 아니었지만, 중반부터는 제 의지였어요. 지난번에도 말씀드렸지만 저는 겁이 많은 성격이에요. 특히 누군가를 좋아하면 그 사람에게 거부당할까 봐 겁부터 나서 다가가려고 노력하기는커녕 열심히 도망가요. 상처받고 싶지 않아서요. 그런데 게임을 시작하고 나니까 도망가는 게 불가능해졌어요. 어쩔 수 없이 앞으로 나아가야 했죠. 먼저 전화도 하고, 뭘 하자고 이것저것 제안도 하고요. 실은 연락드릴 때마다 거절당할까 봐 두려웠는데 구슬 님은 한 번도 거절하지 않으셨어요. 그리고 전 구슬 님하고 시간을 보내는 게 너무 즐겁고 행복했어요. 너무 행복해서 계속했던 거예요. 항상 도망쳤지만 이번에는 끝까지 가보고 싶어서요." - P121.122

"어쩌면 신들이 장난을 친 걸지도 모르겠네요."
신들의 장난. 푸른은 구슬의 말뜻을 금세 알아들었다. 푸른이 구슬에게 고백한 직후에 일부러 ‘고백하기‘가 나오도록 장난을 친 거라면? 그럴 수도 있었다. 충분히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거지 같은 보드게임을 만든 자들이라면. - P123.124

"혹시 보드게임 담당 뽑는 주사위 던지기 했을 때도 구슬 님이 원하는 숫자가 나오게 하셨던 거예요?"
몇 번의 입맞춤 후에 푸른이 구슬에게 물었다.
"네, 푸른 님이 절 좋아하신 것보다 제가 먼저 푸른 님을 좋아했거든요."
"말도 안 돼. 언제부터요?"
"푸른 님을 처음 본 순간부터요."
"그럼 저보다 더 먼저 좋아하신 건 아니네요. 저도 구슬 님을 처음 본 순간부터 반했거든요."
"영광이네요."
"저도 영광이에요." - P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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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아지 사진인지를 판단하는 방법을 글로 적어보시라. 그리고 그 방법대로 판단하는 과정을 밟아보시라. 틀린 답을 내기 일쑤다. 논리와 언어로는 그 방법을 잡아내지 못한다. 우리가 늘 하는 일이니 분명히 가능한 일인데, 그 방법을 일일이 표현하려 들면 난감해진다. 아직 우리가 이해하는 언어로는 구체적으로 작성할 수 없는 소프트웨어가 우리 몸에서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이광근) - P9

서당개 3년이면 풍월을 읊는다는데, 서당개에게 5만 년어치의 글을 들려준다면? 기계 학습을 돌리는 컴퓨터에게 5만 년어치 책을 주입해주면 학습 결과로 얼추 글을 쓰는 서당개를 만들어 준다. 종종 엉터리 글을 쓸 수는 있지만 어느 정도 해낸다. (이광근) - P10

컴퓨터의 원천 설계도를 선보인 튜링(Alan Turing)의 업적이 사실 그런 것이었다. 튜링은 1930년대에 기계적인 계산이 뭔지를 명확히 정의한다. 그 정의 덕분에 컴퓨터로 하는 온갖 문제 풀이 능력과 한계를 파악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정의가 지금까지 깨지지 않고 유지된 덕분에, 파악했던 것들이 지금까지 사실로 유지될 수 있었고, 컴퓨터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 분야가 서로 신경 쓰지 않고 전속력으로 발전할 수 있었다. (이광근) - P11

이 책에서 내가 논의할 알고리즘은 조금 특별한 것들이다. 대부분의 알고리즘과는 달리, 디자인한 사람이 모르는 환경에서 그 알고리즘들이 실행될 수 있다. 그 알고리즘들은 환경과 상호작용하면서 그 환경을 효과적으로 헤쳐나가는 방법을 배운다. 상호작용을 충분히 하고 나면 그 알고리즘들은 더 똑똑해진다. 어떤 전문성을 가지게 된다고 할까. 알고리즘에 미리 심어 넣은 전문성이 아니라 실행하며 외부 환경에서 배워 익힌 전문성이다.
이런 알고리즘을 에코리즘ecorithm이라고 부르겠다. 에코리즘이 따르는 학습을 얼추거의맞기probably approximately corect, PAC학습이라고 한다. 이 학습 모델은 성공적으로 학습했다는 게 뭐고 그렇게 되기까지의 비용은 어떻게 되는지를 판단하는 틀을 제공한다. 그 안에서 디자이너들은 알고리즘이 배운 전문성이나 그것을 배우는 비용을 재 볼 수 있다. (이광근) - P18

따라서 인덕(학습)의 정의는 수학적인, 명확한 것이어야 한다. 튜링 테스트같은 애매한 것이 아니라 튜링의 기계적인 계산의 정의 같아야 한다. 튜링이 계산을 애매하게 정의했었다면 지금 우리는 어디쯤 있을까? 튜링 시절 그럴듯하게 들렸을 기계적인 계산의 정의는 어떤 게 있을까? 이런 건 어떤가. "어떤 일이 기계적으로 계산 가능하다는 것은 다음의 경우만이다. 그 일을 보통의 지능을 가진 사람이 일상적인 일을 하면서, 예를 들어 스파게티를 먹으면서 계산할 수 있는 경우." 이런 정의가 그럴듯하다는 것에 반대할 사람은 거의 없었을 테지만, (튜링이 계산에 관한 지금의 개념을 담은 논문을 발표한) 1936년에 이런 애매한 정의로 시작했다면 지금 우리가 보는 21세기의 정보 혁명은 싹트지 못했을 것이다. - P11

이 책의 핵심은 자연에서 일어나는 학습 현상을 수학적으로 명확하게 정의한 것이다. PAC 또는 얼추거의맞기probably approximately correct 모델이라고 한다. 이 모델은 학습 과정을 계산 과정으로 보는데, 특히 그 연산 횟수가 제한된 것으로 한다. 생명체는 너무 긴 시간을 학습에 쓸 수가 없다. 다른 일도 해야 하거니와 수명 때문에도 학습 시간이 마냥 길 수는 없다. 또, 이 모델은 학습 중에 외부 세계와 주고받는 횟수도 비슷하게 제한된 것으로 한다. 그리고 학습으로 유기체가 새로운 정보를 분류하는 데 틀리는 경우가 적어야 하지만 항상 맞을 수는 없다는 점을 담고 있다. 인덕induction, 歸納은 ’아마도’가 낀다. 그래서 늘 백 퍼센트 정답만 인덕할 수는 없다. 정답과 조금 어긋난 것을 만들 여지가 늘 있다. 또 세상이 갑자기 변하면 학습한 것은 언제라도 쓸모 없어질 수도 있다. - P11.12

이 책에서는 이런 에코리즘의 언어를 써서 진화, 학습, 지능을 설명하려고 한다. 에코리즘이라는 알고리즘으로 생명의 진화 같은 자연 현상을 설명할 수 있으려면 만족해야 할 것이 많다. 특히 제한적인 횟수만 환경과 상호작용해서, 그리고 제한적인 자원만 사용해서 결과를 만들어야 한다. 에코리즘도 그렇고 그걸 품고 고안된 일반 학습 모델(얼추거의맞기probably approximately correct, PAC 학습이라고 부르는)도 그런 제한된 자원량 이상을 소모하지 않는 알고리즘이 되도록 정의한 것이다. 이런 알고리즘으로 설명되는 자연 현상은 우리 경험에 익숙한 것(학습, 유연한 반응, 그리고 적응 등)부터 진화와 지능까지 광범위하다. - P26

기계적인 계산으로 자연 현상이 이해될 수 있다는 아이디어는 비교적 최근 아이디어지만, 자연의 비밀을 밝히는 데 사용하는 무기의 하나로 확실하게 자리잡고 있다. 물리의 법칙을 표현하는 데 수학 방정식이 유용하다는 아이디어, 실험실의 실험이 화학 세계의 사실을 밝힐 수 있다는 아이디어, 그리고 사회과학에서 통계 분석이 인과 관계에 관한 실마리를 준다는 아이디어들은 널리 받아들여졌다. 기계적인 계산의 관점이 유용하다는 아이디어도 그런 위치에 서게 될 것이다. 의심의 여지가 없다. - P34

컴퓨터과학의 대상은 컴퓨터가 아니다.
천문학의 대상이 망원경이 아닌 것처럼.
—다익스트라(Edsger Dijkstra) - P37

튜링이 보인 건 기계적인 계산이라는, 혹은 생각 없이 한 스텝 한 스텝 실행하는 정보 처리라는 애매한 개념이 체계적으로 정의되고 분석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 이후로 우리는 기계적인 계산으로 가능한 것과 불가능한 것의 경계를 이해하게 되었다. 다시 말해서 계산이 뭔지를 비로소 이해하게 된 것이다. - P40

멈춤 문제halting problem의 불가능에 대해서 주의해야 하는 점은, 모든 기계에 대해서 그 멈춤 여부를 정확히 답하는 기계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모든‘과 ‘정확히‘가 핵심 조건이다. 몇몇 기계에 대해서만 정답을 내는 기계는 가능하다. 혹은 모든 기계에 대해서 답을 내지만 때때로 틀린 답을 내는 기계는 가능하다. 모든 기계에 대해서 항상 정답을 내는 기계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 P44

튜링 3원소 중 하나인 기계적인 계산의 정의, 이게 그래서 중요한 시작이었다. 튜링은 그 모델로 기계적인 계산이라고 할 수 있는 현상을 모조리 잡아내려고 했다. 누구도 생각하지 않았던 현상까지 모조리, 사람이 창의성이나 영감을 이용하지 않고 기계적으로 별생각 없이 하는 일들이라면 모두 튜링기계로 표현하려는 게 목표였다. - P46

컴퓨터과학과 물리학이 주로 사용하는 수학도 차이가 있다. 튜링 이전의 수학은 연속한 세계를 다루는 것continuous mathematics이 지배적이었다. 물리학에서 주로 사용하는 수학이다. 변화가 한없이 작은 양으로도 일어난다고 생각하는 세계다. 하지만 튜링기계는 연속하지 않는 모델이다. 변화가 뚝뚝 끊겨서 일어나는 세계를 다루는 이산수학discrete mathematics의 세계다. 튜링 이전까지는 이산수학은 거의 연구되지도 않았다. 사실 튜링의 영향이라고 거의 이야기되지 않는데, 이산수학이 부상하게 된 것이 튜링 때문이다. 이 책에서 우리가 다룰 학습과 진화 등의 현상을 정의할 때도 이산 모델이 가장 튼튼한 모델이 된다. 학습과 진화의 핵심 현상을 끄집어내는 데 가장 유효한 것이 이산 모델들인 것이다. 연속 모델이 결국에는 큰 관심을 받겠지만, 첫 스텝으로서 가장 근본적인 개념을 정의하는 데는 연속 모델보다는 이산 모델이 직관적이다. - P50.51

여담으로, 현재의 과학 분야 전반에서 계산 복잡도의 중요성을 흡수하는 과정에 있지만, 전통적인 과학 교육은 아직 그런 상황을 준비하는 것 같지는 않다. 계산 복잡도로 보면 전통적인 수학과 과학 과목에서 푸는 문제들은 모두 현실적인 비용에 풀 수 있는 것들로 제한되어 있다. 산수도 그렇고 선형대수도 그렇다. 이 상황은 당연히 이유가 있지만(현실적인 비용으로 할 수 있는 방법만 가르쳐야 했기 때문에) 그러나 이런 문제들만 다루는 교육은 잘못된 인상을 남긴다. 쉽게 정의되는 문제는 모두 효율적으로 풀린다는 인상을 줄 수 있다. 이러면 학생들이 잘못 준비될 수 있다. 전혀 새로운 문제에 직면했을 때 계산적으로 비용이 현실적인 풀이법을 찾아야 한다는 기준을 간과할 수 있다. - P55

그림 3.4 무작위randomized 알고리즘의 예. 임의의 모양이 사각형 안에 그려져 있다고 하자. 그 모양의 면적을 어림잡는 방법으로 그 사각형 안에 점을 무작위로 찍어서 그 중에서 모양 안에 들어가는 점들의 비율로 계산하는 것이다. 조건은 점은 사각형 안에 어디에나 동일한 확률로 찍는 경우여야 하고, 각각의 점 찍기는 독립적이어야 한다. 크게 틀리는 경우는 아주 운이 나빠서 균일하게 점을 찍지 않게 되는 경우다. 이런 경우는 점점 더 많이 점을 찍으면 줄어들게 된다. 무작위 알고리즘은 근본적으로 이런 식의 성공 보장을 한다. - P58

현재까지 다항 시간 안에 인수 분해를 하는 알고리즘은 양자 컴퓨터를 이용하는 것 이외에는 알려진 게 없다. 무작위 알고리즘(BPP) 중에도 없다. 인수의 존재 여부를 알아내는 것과 인수를 찾아내는 것 사이의 어려움은 기하급수로 차이가 난다. 이 차이가 암호 시스템들의 기초다. 예를 들어 RSA 암호시스템에서는 두 개의 큰 소수 p, q를 골라서 곱한 결과 x를 공개하고 p, q는 내가 비밀로 가지고 있는다. 다른 사람들이 x를 가지고 내게 보낼 메시지를 암호화하면 나만 p, q를 가지고 그 암호화된 메시지를 풀 수 있다. 임의의 소수 p, q를 만드는 일은 임의의 수를 선택하고 소수인지를 확인하면 되지만, 암호화된 메시지를 엿들으려면 x를 인수분해해서 p, q를 알아내야 하는데 이건 훨씬 어려운 일이다. (이 인수분해 문제는 BOP에 속한다. 즉, 양자 컴퓨터로는 다항시간 안에 할 수 있다. 이런 이유 때문에도 양자 컴퓨터가 실현 가능할지를 많은 사람들이 궁금해하는 것이다.) - P63

가설 P≠NP는 현재는 물리 법칙과 비슷한 처지에 있다. 물리 법칙도 수학적으로 증명되지 않는다. 물리 법칙은 당연히 수학적으로 증명되는 게 아니다. 계산에 대한 가설이 물리 법칙과 역할이 비슷한 이유는 누군가 틀렸다는 증거를 내놓기 전까지는 가설로서 유용하게 살아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경우 가설은, 다항 시간에 마칠 수 있는 알고리즘은 NP-완전 문제들에는 없다는 것이다. 결국에 이 가설이 틀렸다고 밝혀지면 물론 좋은 일이다. 모든 NP-완전 문제들을 푸는 효율적인 알고리즘을 찾아낸 셈이므로, 그게 충분히 효율적이면 혁명적인 결과가 될 것이다. - P66

알고리즘의 풍부한 능력에 대한 또 다른 면은 이런 것이다. 아주 간단한 알고리즘인데 그 실행 양상은 우리 같은 유한한 존재로서는 도무지 알 수 없는 경우가 있다. 실행 양상을 파악할 수 없는 알고리즘으로 잘 알려진 것이 있다.
다음의 알고리즘이다.

1. 양의 정수 n으로 시작한다.
2. n=1일 때까지 다음을 반복한다:
(a) 만일 n이 짝수면 n을 n/2로 바꾼다.
(b) 만일 m이 홀수면 n을 3m +1로 바꾼다.

예를 들어, n=44에서 시작하면 다음의 값들을 만든다. 44, 22, 11, 34, 17, 52, 26, 13, 40, 20, 10, 5, 16, 8, 4, 2, 1. n의 첫 값이 정해지면, n의 다음 값들을 차례로 계산하는 것은 간단하다. 알 수 없는 것은 시작하는양의 정수가 뭐가 되었든 만들어지는 숫자열이 항상 끝날지 여부다. 수학자 콜라츠(Lothar Collatz)가 1937년에 낸 문제인데 그 이후로 많은 양의 정수로 시작해 봤는데 모두 1을 만들고 알고리즘이 끝났다. 그러나 (그 문제가 얼마나 간단한지에 대비해서 놀랍게도) 누구도 증명할 수는 없었다. 모든 경우 늘 끝나는지, 아니면 어떤 양의 정수의 경우 끝나지 않는지.
콜라츠 문제는 간단한 알고리즘에 숨은 근본적인 복잡성에 대한 한 예다. 특히 그 알고리즘은 외부 환경과는 완전히 격리되어서 작동하는 알고리즘이었다. 입력이란 것도 필요 없이 구성할 수 있다. - P69.70

학습은 많은 단계를 통해서 달성되는데, 각각의 단계를 따로 놓고 보면 그럴듯하지만, 뭐 하자는 건지 어디로 향하는지 무심하다. 이 단계들은 큰 그림의 계획하에 작용하는 알고리즘을 따른다. 그 때문에 각 단계는 비로소 의미를 가진다. 단계들이 모두 모여서 뭔가를 이루는 일종의 수렴 과정이랄까.
진화도 비슷하다고 주장하려고 한다. 진화의 많은 작은 단계가 따로 놓고 보면 크게 의미 있지는 않다. 하지만 큰 그림을 품은 알고리즘 스타일의 계획 아래 발맞춰 진행되면 놀라운 결과를 낳게 된다. - P77

다음 장에서 보겠지만, 학습할 수 있는 것의 한계가 있다는 사실은 경고 시그널로도 볼 수 있다. 실험 데이터를 많이 모은다고 반드시 대상 시스템을 더 잘 이해하게 돕는것은 아니다,라는 경고. 단적인 예로, 개별 사람들의 행동이 가까이서 관찰되어 왔고 수천 년 동안 널리 기록되어 왔지만 아직 우리는 그런 행동을 만드는 뇌의 작동 방법에 대해서 아는 게 거의 없다. 생물학 연구방법에 대해 참고할 의미심장한 사실이다. - P86

의식 현상을 계산 과정으로 보자는 아이디어가 그럴듯한 이유가 있다. 그 ‘계산 과정‘이라는 것이 대단히 폭넓기 때문이다. 만능이라고 여겨질 정도로 컴퓨터로 할 수 있는 계산이 광범위하기 때문이다. 뇌 모델이나 생각 과정 모델은 매번 그 시대의 첨단 기계 장치들로 바뀌어 왔기 때문에, 혹자는 컴퓨터가 현재로선 첨단 기계지만 미래에는 또 바뀌게 될 거라고 의심할 수 있다. 그러나 이번은 아니라고 본다.
컴퓨터가 모델이 될 수 있는 이유는 이 세상의 모든 기계적인 계산을 컴퓨터가 실행할 수 있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컴퓨터가 단순히 현재 가장 첨단의 복잡한 기계 장치이기 때문에 자격이 있는 게 아니다. 컴퓨터가 하는 계산이 기계적인 계산이라고 상상할 수 있는 것은 모두 포함하고 있다고 여겨지기 때문에 진지하게 보는 것이다. - P91

우리의 과제는 논리가 놓치는 직관의 세계가 뭔지, 그리고 그 세계로 가는 과학적인 방법은 무엇인지 찾는 것이다. 직관의 세계를 논리적인 가이드에 준해서 잘 작동하는 세계로 정의하고, 그 세계에 대해 논리적으로 설명하는 것이다. 직관 혹은 상식이 발휘하는 능력은 명확한 논리적인 가이드가 없는 세계에서 좋은 판단을 해내는 능력이다. 그런 능력을 과학적으로 설명한다는 것은 논리가 없어 보이는 세계를 논리의 그물로 온전히 길어 올리는 일이다. 논리적인, 수학적인 이론을 세우는 일이다. - P92

두 개의 가정만 있으면 인덕을 이치에 맞게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있다. 더군다나, 이 두 개의 가정은 논리를 위해서 필요한 면도 있지만 실제 세계에서 우리가 관찰할 수 있는 모든 학습 과정에 늘 깔려있는 것이기도 하다.
첫 번째 가정은 변동 없다는 가정invariance assumption이다. 학습한 결과가 사용되는 미래 상황은 학습할 때의 상황과 다르지 않다는 가정이다. 한 도시에서 다른 도시로 이사한다면 예전 도시에서의 경험은 새 도시에서도 도움이 된다. 두 도시 상황이 대단히 다르지 않아서 가능한 일이다. 변동 없다는 가정을 조금 수학적으로 이야기하면 이렇다. 어떤 상황들이 있는지, 그리고 상황마다 얼마나 자주 발생할지가 학습 전후로 변동이 없다는 가정이다. 이 가정은 세상이 변하지 말아야 한다는 게 아니고, 변하더라도 어떤 규칙성은 유지되어야 한다는 거다. 이런 규칙성이 세상의 변화를 예측할 수 있게 해준다. 지난 한 시간 동안 해가 지평선을 향해 꾸준히 내려가고 있었다면, 앞으로 한 시간 동안도 해는 꾸준히 지평선에 가까워지리라고 우리가 예상하듯이. - P96.97

깊은 신경망(deep neural net, DNN, 딥뉴럴넷) 알고리즘이 (PAC 학습 알고리즘으로 확인되지 않았지만 기계 학습에서는 잘 사용되고 있는 많은 알고리즘의) 한 예다. DNN 알고리즘은 실험적으로는 PAC 알고리즘의 양상을 보인다. 정확도를 올리는 데 필요한 학습 시간이 기하급수로 늘지 않는다. 그러나 현장에서 사용되는 실제 DNN 알고리즘들이 PAC 알고리즘인지는 아직 엄밀히 증명된 바는 없다. PAC 알고리즘이려면 모든 분포의 샘플들에 대해서 그렇게 작동해야 한다.
이론적으로는 자격이 안 되지만 쓸모 있는 알고리즘은 흔하다. NP-완전 문제를 푸는데, 실제 현장에 출현하는 입력들에 한해서는 다항 시간에 답을 내는 알고리즘이 종종 있다. 그런 알고리즘은 NP-완전 문제를 다항 시간에 푸는 알고리즘은 아니다. 모든 입력에 대해서 다항 시간에 답을 내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실제 DNN 알고리즘들이 이와 유사할 수 있다. 이상적인 PAC 알고리즘 자격은 안되지만 현실에서는 쓸모 있는. - P114

그런데, 그런 함수(많은 데이터에 숨은 간단한 함수)를 다항식 비용으로 인덕하는 건 대부분 불가능할 것 같은 이유는 데이터를 더 많이 봐야만 정답 함수의 면모가 드러나서가 아니고, 있는 데이터에서 정답 함수의 면모를 끄집어내는 과정, 이 과정 자체가 다항식 비용으로는 불가능할 것 같아서다. - P121

내가 믿는 바, 사람들이 복잡한 개념을 학습할 수 없는 주된 걸림돌은 데이터가 아니다. 적당한 개수의 샘플 데이터에서 규칙성을 도출해내는 계산 과정의 복잡도가 크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행성 궤도가 타원형을 그린다는 것을 인덕하는 데 큰 어려움이 바로 이것이었다. 필요한 데이터를 모으는 데 수백 세대가 걸렸기 때문이 아니었다. 타원형 궤도라는 개념이 사람들이 쉽게 도출할 수 있는 규칙성 중에 한동안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 P121

정리하면, 학습의 한계를 이해하려거든 계산의 한계를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다. P=NP로 판명되거나 그에 버금가는 예상외의 강력한 결과가 나온다면, 모든 다항식 복잡도(P 클래스)의 함수가 다항식 개수의 데이터만 있으면 학습 가능하게 된다. 그러나 P=NP는 아니라고 컴퓨터 과학자들이 널리 예상하고 있다. 따라서, 확신할 수는 없지만 모든 P 클래스 함수가 데이터만 있다고 학습 가능한 건 아닐 것으로 예상할 수 있다. 즉, 데이터 안에 학습할 함수에 대한 모든 게 있다는 생각만으로는 학습 가능한 함수들의 경계를 파악하는 데 충분치 않다. - P123

[RSA(Rivest-Shamir-Adleman) 암호 시스템의] 공개 열쇠를 인수분해해서 짝꿍열쇠의 핵심 부품을 찾아내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큰 수의 인수분해를 현실적인 비용으로 할 수 있는 디지털 컴퓨터 알고리즘이 아직 없기 때문이다. - P124

정규 언어를 학습하는 일은, 다항식 개수의 문장들만 보고(문장마다 그 언어에 속한다 속하지 않는다 여부가 표시되어 있다) 학습한 후 새 문장이 오면 해당 언어의 문장인지 답을 내주는 일이다. 정답 언어의 오토마타를 추정해 내는 게 한 방법이다. 원칙적으로, 오토마타까지 가지는 않더라도 문장을 받아서 얼추 거의 맞게probably approximcately correctly 판단해 주는 가설을 추정해 내는 거다. 촘스키 이후로 수십 년 연구해 왔지만 그런 학습 알고리즘을 찾는 데는 실패했다. 1980년대에 그 실패가 말이 된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정규 언어를 PAC 학습할 수 있는 알고리즘이 존재하면 RSA 암호 시스템을 깰 수 있다고 증명되었다. 그런 암호 시스템이 깨질 수 없는 한 정규 언어를 학습하는 기계적인 방법은 없다. - P126

내 생각에 인간은 본능적으로, 접근 가능한 목표를 모두 좇도록 항상 준비되어 있다. 그래서 인간은 배울 게 풍부한 환경에서는 선생이 없더라도 계속 학습할 수 있다. 그 덕에, 이전에 학습한 개념을 갈고닦는 것뿐 아니라 접근 가능하기만 하면 전혀 새로운 개념도 배울 수 있다. - P131

진화가 PAC 학습의 한 예라면, 진화도 목표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최종 목적까지는 아니더라도 그때그때의 목표가 진화에도 있어야 한다. 진화를 목표 없는 경쟁만으로 설명하기에는 부족하다. 경쟁만으로 어떻게 단순한 단백질 회로가 시각이나 달리는 기능을 하는 정교한 시스템으로 발전하는지 설명하기는 어렵다. 비유로, 주식회사를 생각해 보자. 다른 회사들과 경쟁하는데 경쟁만으로 회사의 여러 행동을 설명할 수 있을까? 그것보다는 이윤 창출이라는 목표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여러 행동이 나온다. 꼭 경쟁만이 회사의 존재 이유는 아니다. - P144

여기서 ‘최선‘이라는 용어에 대해서 오해가 없기를, ‘최선‘이 최적을 뜻하는 건 전혀 아니다. 인류는 최선을 좋은 진화 과정의 결과로 출현한 것이다. 최적의 결과를 좇은 진화의 목적물이었다고는 말할 수 없다. 우리가 ‘최선‘으로 의미하는 바는 아주 지엽적인 의미다. 하나의 개체와 하나의 환경에 대해서 어느 한순간에 ‘최선‘이라는 뜻일 뿐이다. 예를 들어, 우리의 어떤 행동은 현재 환경에서 다른 행동보다 더 이득이 된다. 우리 몸의 일곱 번째 단백질을 발현시키는 함수들 중 좀 더 좋거나 좀 더 나쁜 함수가 있고, 하루에 먹을 초콜릿 양에도 좋은 양이 있고 나쁜 양이 있다. 뭐가 더 좋은지는 그때그때 환경에 따라 변한다. 현재 행동 때문에 다음번에 가장 유익한 행동이 달라질 수 있다. 지금 현재 환경에서 지금과 다음번 행동 조합만을 따저서 가장 큰 이득을 만드는 행동을 유도하는 함수가 ‘최선 함수‘다. - P146

진화 과정은 학습 과정과 똑같다. 학습할 수 있는 목표를 좇는 학습 과정은, 이미 배운 것에 조금씩 새로운 것이 덧붙여지면서 차례차례 쌓여간다. 그리고 그전에 배운 대부분이 유지된다. 진화 과정도 같다. 다양한 생물종에 걸쳐서 유전체의 많은 부분이 유지되며 변화가 조금씩 쌓여간다. 변함없는 부분들은 아마도 바뀌지 않는 게 좋은, 중요하고 복잡한 진화 결과를 표현하는 부분들일 것이다. 지구상에서 생명체에 공통으로 필요한 생화학 기초 정보 같은, 이 부분이 조금만 바뀌면 유기체는 불가능하다. 유전체의 다른 부분은 굉장히 빠른 진화 과정을 겪으며 변한다. 잘 작동하고 있고 유용한 장치를 만드는 유전 정보는 버리지 않고 보존하는 것이 진화에 꼭 필요하다. 학습에서도 그렇듯이. - P150.151

이렇게 쉽게 부서지는 문제를 극복해야 한다. 근거 없지만 상식선에서 하는 생각 과정을 명확하게 결정된 프로그램으로 구현하는 한, 이치 따지기reasoning 시스템이 논리적인 방식이건 확률적인 방식이건 쉽게 부서지는 문제는 어쩔 수 없다. 표현한 정보가 내부적으로도 부대끼고 표현 대상이 되는 바깥 세계와도 동떨어지면서 그 시스템에서 일어나는 논리 추론의 의의는 무너지게 된다. 근거가 있는 생각 과정에 대해서는 논리적인 원칙을 가지고 잘 구성되었겠지만, 근거 없이 상식적으로 진행되는 생각 과정에 대해서는 어떤 유용한 보장도 할 수 없게 된다. - P188

레지스터가 아주 소규모일 수밖에 없는 실용적인 이유가 뇌에서도 똑같이 성립한다. 작업보따리working memory를 관리하는 회로들이 꽤 복잡할 것이고, 그곳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잘 조정하는 일도 복잡할 것이다. 복잡하고 빠른 장치를 대용량으로 갖추기에는 비용이 너무 클 것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마음의 눈이 한순간에 다룰 수 있는 정보 조각이 몇 개 안 되는 것이다.
작은 작업보따리는 결코 궁극의 제약 사항이 아니다. 뇌는 단순 계산만이 아니라 학습도 해야 하기 때문에 다른 더 심한 제약들이 있다. 마음의 눈을 통해 보는 시야가 좁은 것은 세계를 학습하는 데 꼭 필요하다. 더 많은 정보에 주의를 기울일수록 그로부터 패턴을 도출해내기는 더 복잡해진다. 7±2개가 시야 범위와 계산 효율 사이의 적절한 균형인 것이다. 우리의 의식이 그렇게 작은 조리개를 통과하게 됨으로써 현실적으로 학습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 P197.198

인간에게서 타고난 것과 길러진 것을 구분하기 어려운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난자와 정자가 수정되기 전에 일어난 진화 과정과 수정된 후의 학습 과정이 너무 비슷해서 이 둘을 경계면을 찾기가 불가능하다. 어떤 사람의 성격 중에 어느 것이 5.5살 이전 경험에서 배운 것이고 어느 것이 그 이후에 익힌 것인지 구분하려고 한다고 하자. 말이 되지 않는다. 비슷하게, 탄생 순간이 모든 게 시작되는 지점은 아니다. 우리가 수정되거나 탄생했을 때, 이미 우리는 많은 중요한 것들을 반 정도 학습한 형태로 가지고 있다.
타고난 것이냐 길러진 것이냐는 틀린 질문이다. 계속되는 변화의 과정 중에서 거의 아무 순간이나 잡아서 억지로 묻는 식이기 때문이다. - P215

사람의 초기 학습 본능은 세계가 중립인 것으로 생각하게끔 진화했을 것이다. 주어진 모든 정보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대표적인 것으로 여기도록 진화했을 것이다. 부모나 선생은 이런 상황을 이용할 수 있다. 학습이 신속히 진행하도록 돕는 정보를 내놓으며 아이의 학습을 도울 수 있다. 반대로, 나쁜 경우 호도할 수도 있다. 왜곡된 정보를 내놓아서 학습 알고리즘이 잘못된 일반화로 신속히 수렴하게 할 수도 있다.
사람은 우연의 일치나 속임수에 쉽게 넘어간다. 학습할 수 있는 것은 거리낌없이 좋고 앞에 놓인 정보를 중립적으로 보려는 경향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처음 만나는 사람의 행동을 믿게 된다. 정상적이라고 생각하지 속이려고 드는 게 아니라고 본다. 식당에 가서는 그 식당 대표 음식을 먹고 있다고 믿게 된다. - P216217

추가적인 이유가 있을 듯싶다. 왜 학습 알고리즘들이 확실한 증거가 있기 전부터 가설을 부지런히 만드는지. 예전에 논의한 퍼셉트론perceptron 알고리즘이 처음 제안되었던 이유는 한 스텝 한 스텝 진행되는 것이 뇌 모델과 비슷해 보여서인데, 이 알고리즘의 또 다른 성질은 소위 온라인 알고리즘이라는 것이다. 예시를 몇 개를 보았건 간에, 매번 예시를 보면 새 가설을 잡는다. 우리 뇌가 그런 온라인 알고리즘을 구현한 것이라면(그렇다고 나는 믿는데) 매번 예시를 보고 가설을 내놓으려 할 것이다. 우리 뇌는 성급하게 판단하도록 짜여 있는 것이다.
성급한 판단은 중립적인 세계에서 전반적으로 우리에게 이득일 것이다. 한 번 만나고 우리는 상대방에 대해서 판단하는 경향이 있다. 음식점도 한 번 가보고 판단한다. 빈약한 증거로 성급하게 편견을 가지는 경향은 기본적인 본능이라고 본다. 빈약한 정보로도 일단 결정을 내리는 시스템을 가진 결과일 것이다. - P218

누구나 그렇듯이 우리 각자는 개별적으로 우리 의견이나 느낌을 위해서 투쟁하고 행동하는 것에 정당성을 부여할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조심해야 하고 겸손해야 한다. 우리 느낌과 의견이 다른 사람 것보다 더 우월하다고 정당화할 수있는 방법이 없어 보인다. - P221.222

제일 정교한 이론 있는 기술은 그 한계를 충분히 이해하고 사용해야 한다. 사용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 아니다. 이론 없는 분야(사회과학을 포함해서)에서, 우리의 의사 결정은 가장 정교한 지적 도구로 도움을 받았다고 해도 PAC 학습에 근본적으로 존재하는 불확실성에 휘둘린다. - P226

이 책에서 사람의 인지를 어떻게 보는지 정리해 보면 이렇다. 사람이 이해하는 개념은 계산에서 온 것이다. 우리가 태어나기 전후로 모종의 알고리즘 스타일의 학습 과정으로 얻어진. 그런 개념은 또 통계적인 과정에서 온 것이다. 학습 과정이 통계적인 증거로부터 기본적인 타당성을 끄집어 낸다는 의미에서. 즉, 증거를 더 많이 볼수록 우리의 확신이 증가한다는 의미에서. 그리고, 마음의 눈이라는 통로를 통해서 바깥 세계와 내부의 기억 장치가 만난다. 우리는 이 마음의 눈을 통과하는 정보를 통제한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마음의 눈은 객관적이거나 중립적이라고 할 수 없다. 우리 신경계 회로들은 지식의 거대한 합을 만들고 있는데 이는 많은 진화와 학습이 축적된 결과다. 다윈 방식으로 다시 이야기하자면, 우리의 지식은 차례차례 일어난 작은 변화를 통해서 축적해 온 것이다. 각 변화는 학습의 의미를 가지는 것이었고, 이치 따지기는 이런 회로를 마음의 눈 안에서 현재의 상황에 적용하는 것으로 이루어진다. 우리의 뇌 시스템은 이론 없는 것을 다루도록 진화했지만, 이론 있는 결정을 할 때도 같은 회로를 사용한다. - P227

나는 항상 ‘인공지능artificial intelligene‘이라는 용어에 불편함을 느껴왔다. 내 주 전공이 그 분야라고 말하는 것도 좀체 꺼려왔다. 다익스트라(Edsger Dijkstra)를 처음 만났을 때를 기억한다. 그는 컴퓨터과학의 선구자로서 공헌한 것이 많기도 하지만 뚜렷한 의견과 촌철살인의 위트로도 잘 알려져 있다. 내게 어떤 공부를 하냐고 물었다. 기억할 만한 대화를 만들려는 욕심에서 그랬던 것 같은데 이렇게 답했다. "AI(인공지능)요." 그가 즉각 되받았다. "I(지능)를 연구하지 그래요?"
‘지능‘이 ‘인공지능‘보다 더 일반적이라면, 그의 말대로 당연히 더 일반적인 문제를 파야 한다. 그것이 더군다나 지능과 같은 자연 현상에 대한 것이라면 더욱 그렇다. 되돌아보면, 그동안 내가 해왔던 공부가 그랬던 것 같다. 이 책에서 인공지능 관련해서 이야기한 모든 것이 사실은 광범위하게 일반 지능에도 모두 적용된다. - P233

어떤 문제에는 간단한 방법이 아주 효과적일 수 있다. 예를 들어, 가장 가까운-이웃nearest-neighbor 알고리즘이다. 답안 예시들이 있고 가설은 만들어 내지 않는다. 새로운 질문이 주어지면 답안 예시들 중에서 가장 가까운 것을 찾아서 그 답안대로, 혹은 답안을 참고로 주어진 질문에 답하는 것이다. 최근의 자연어 번역이 이 기술을 사용해서 성공한 경우다. 두 언어 사이의 번역 예들을 어마어마하게 모아 놓으면, 새로운 문장을 어떻게 번역해야 할지에 대한 값진 정보가 거기에 있다. - P238.239

인식 능력에서 아기들은 생각보다 훨씬 더 철저하게 준비되어 태어난다. 간접적인 증거로, 인공지능 연구자들이 일상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상식들을 모두 정의하려고 할 때 만난 어려움이 있다. 소설을 이해하려면 소설에는 표현되지 않은 많은 지식이 필요하다. 너무 당연한 것들이라서 소설에는 없는 것들이다. 성인이 읽는 복잡한 소설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어린이를 위한 동화에서도 거의 같은 분량의 상식이 필요하다고 한다. 튜링의 꿈에 찬물을 끼얹는 이야기지만, 아기들은 놀랄 만큼 잘 학습된 상태로 태어나고 더 잘 배울 수 있게 준비되어 있다. - P244

튜링은 기계를 프로그램하는 것과 기계가 배우게 하는 것 사이의 딜레마를 이야기했다. 그는 학습시키는 것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었다. 한때 다음의 주장이 힘을 받았지만,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이야기다. 학습한 기계가 일종의 고정된 프로그램을 실행하게 되는 것이므로 처음부터 그런 프로그램을 프로그래머가 만들 수 있었던 게 아닐까라는 주장이었다. 기계 학습이 성공적으로 사용되고 있는 경우에 학습한 결과를 같은 일을 하는 프로그램으로 바꿔치기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학습 과정을 통하지 않고는 모든 관련된 인자 값을 가진 학습 결과를 얻을 수 있는 다른 방법이 아직 없기 때문이다. - P256

학습이 가진 중요한 장점은, 학습은 학습 시스템이 과거에 학습한 지식과의 관계에서 작동한다는 것이다. 선생이 전달하는 예시마다 학생은 이미 알고 있는 개념의 예인지 아닌지를 판단한다. 예시들은 이런 방식으로 학생이 이미 익힌 지식과 관계를 맺는다. 선생이 정확히 그 관계가 뭔지를 모르더라도 그렇게 작동된다. 이런 의미에서 가르치기는 프로그램 짜기보다 훨씬 더 생동적인 행위다. 학생의 이전 지식이 학습의 주고받는 과정에 자동으로 동원되기 때문이다. - P257

우리 조상들이 지구 위에서 겪은 익스트림 생존 훈련과 똑같은 유산을 로봇들에게 제공하지 않는 한 그들은 인간이 스위치를 끄는 것에 저항하지 않을 것이다. - P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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