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찰순례 3
최완수 / 대원사 / 1994년 5월
평점 :
품절


 어느덧 막바지에 이른 이 순례에 아쉬움을 느끼며, 지난 여정도 다시금 되새겨 보았다. 마지막이라 생각하니 절의 모습 마다마다가 절실한 신앙심의 후광을 입어 깨치지 못한 나그네의 마음에 놓칠 수 없는 가르침을 남겼다. 특히 초기 남선종(南禪宗)의 중심지인 쌍봉사는 쇠락해가던 신라 말기의 사상계를 혁신한 곳이라는 역사적 의의가 요즘같은 변혁기에는 더욱 돋보여서 내 관심을 끌었다. 변혁기는 사상으로써 시작된다. 변혁 후의 새로운 사회에 대한 이론적 배경의 제공을 위한 것이다. 박혁거세 이래로 천년을 버텨온 신라의 말기 역시 그랬다. 문무왕의 통일 후, 중앙귀족세력의 비호를 받으며 성장한 교종(敎宗)이 쇠퇴하고, 나날이 그 세력을 떨치는 지방 호족 세력의 지원을 받으며 급부상한 새로운 종파가 바로 선종(禪宗)이었다. 다시 보면 통일의 태평성대라고 할 수 있는 시절에 교종이 흥성하고 피가 피를 부르는 혼란기에 선종이 흥성하기 시작한 것은 두 종파의 성격과도 뗄 수 없는 연관이 있다. 교종은 말 그대로 경전의 해석과 강독을 중심으로 하는, 지식인 곧 교육을 받은 이들만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었으므로 교화의 폭이 좁았다. 이 좁은 '폭'이야말로 오늘날 교종적인 목소리가 우리 불교 안에서 호소력을 갖지 못하는 이유이다. 이에 비하여 선종은 불립문자의 종지(宗旨)에서도 알 수 있듯이 교종과의 차이가 분명했다. 더구나 즉심시불(卽心是佛)이라는 말로 성불하는 데 있어서 무엇보다도 마음이 중요함을 밝힘으로써 수도의 근본을 잡았다고 말하기에 모자람이 없었다. 물론 교종의 수행이 잘못된 것은 아니다. 개인적으로는 문자라는 뚜렷한 기준이 존재하는 교종의 수행방식이 나에게 더 적합하리라고 생각하고 있다. 항상 글이라는 걸 읽으며 행복을 느껴온 나로써는 그 행복의 끝에 있는 깨달음도 역시 글을 통해서 얻고 싶다는 것이 솔직하지만 역시 아직은 깨닫지 못한 생각이기 때문이다. 다만 불교의 궁극적 목적인 깨달음의 성취를 위해서 교종은 '글'이란 수단을 강조했지만 선종은 무엇보다도 깨달음이 내재된 마음만을 유일무이한 수단이자 목표로 내세운 것이다. 지난날 먼저 깨달은 이들을 경전에서 살피고 그로써 자신의 깨달음을 이루려는 교종이 피동적이라면 오직 개인의 피나는 정진에 깨달음의 모든 것을 맡기는 선종은 능동적이었고, 바로 그 개인의 정진을 강조하기 위해 자연 교종이 강조하는 경전을 무시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 교종과 선종의 대립 이유이자, 숙명이었다. 그래서인지 역대의 고승들이 남긴 일화를 보아도 선종의 고승들은 성품이 더 괴팍한 듯 했다. 바로 경전에 대한, 먼저 깨달은 이에 대한 무시와 선종 자체의 능동성, 적극성이 결합해서 오늘날까지도 우리 같은 속세의 중생들의 입에서도 회자되는 선사들의 기괴한 언행으로 남은 것이 아닐까? 좁은 우리나라에서도 신라 시대 국교였던 불교에 속해 있는 여러 종파 가운데 하나둘에 이렇듯 정치 사정까지 연계될 정도로 한 때 종교는 그들이 늘 말하는 '절대자', '깨달은 자', 그 자체로써 빌린 권위를 제것인양 말하던 때가 있었다. 겨우 몇 장의 지면으로 만나 본 남도의 절 쌍봉사는 이렇듯 그 역사적 의의에 걸맞게, 지나는 나그네에게 시사하는 바가 많았다. 이 또한 명찰을 순례하는 여러 기쁨 중 하나로 남기고 싶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