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부분의 사람들은 눈앞에 직면한 생존의 문제만을 고민한다. 그냥 그렇게, 흘러가는대로 살면서, 눈앞의 고민이 없어지면 즐거워하기도 한다. 하지만 책벌레는 다르다. 언제나 번뇌한다. 왜? 그는 자신의 삶 뿐 아니라 세상 모든 것을 머리 속에서 아우르기 때문이다. 책벌레는 그래서 또래들과 친해지기 힘들다. 세상 전체를 고민하는 사람에게 “미자가 왜 날 안좋아할까?”라는 문제로 괴로워하는 친구의 고통에 동참해주기를 바라는 건 좀 지나친 기대가 아니겠는가.
로렌초님은 전형적인 책벌레인 듯하다. 그의 서재에 올라온 글들을 읽다보면 존재론적인 의문으로 괴로워하는 그의 모습이 연상된다. 가끔은 그가 안쓰럽다. 세상 모든 고민을 짊어진 듯해서. 오프에서 만난 로렌초님은 동안의 얼굴에 웃기도 잘하는 그런 분이셨지만, 서재에서 글만 읽을 때는 그런 모습을 상상하기 힘들었다.
[골치 아프고 어렵고 더럽고 힘든 일은 수도 없지만, 두 손 놓고 있기로 한다. 아니 그럴 수 밖에 없다. 그래야 조금이나마 맘이 편하고 즐거우리라. (2/2)]
[도대체 내가 가지고 싶어하는 것들은 언제쯤에나 가지런하게 늘어서서 내 한눈에 들어오고, 하나하나 내 손으로 어루만질 수 있게되는 걸까? (2/1)]
그의 고독을 말해주는 대목도 있다.
“사람과 만나는 걸 즐거워해 본 적이 언제였는지도 기억이 까마득한데”
알라딘 오프모임 참석후기에는 이런 말도 나온다.
[방금은 내가 오늘 이 모임에 참석하는 줄을 알고 있던 친구가 전화를 걸었다. 잘 다녀왔는지 싶어서. 요즘의 내 상태를 걱정한 탓인지, 단순한 궁금증인지는 모르지만, 그에게 정말 잘 다녀왔다고 말할 수 있어서 다행스럽다]
이런 고독과 고민이 책벌레의 숙명인 것일까?
책을 많이 읽어서 그런지 로렌초님은 수준급의 리뷰를 쓴다. 가장 인상깊은 리뷰는 <동정없는 세상>. 수준낮은 책이 문학동네에서 상을 받았다고 욕도 무지하게 먹었던 작품인데, 이 책에 대해 로렌초님은 이렇게 말한다.
[난 무엇보다도 그 진솔함과 10대에 대한 따뜻한 시선에 동감을 표하고 싶다. 읽고 나서 남는 것이 없다는 지극히 피상적이고 개인적인 비판은 큰 소용이 없다고 본다. 무엇보다도 오늘날의 대다수 10대들이 실제로도 여전히 준호와 같이 '아무 것도 하고 싶지 않고', '무엇을 해야할 지도 알 수 없는' 아이들인 이상에는 그들이 이러한 자신의 삶을 살아가면서 어떻게 길을 찾아가려고 하는 지 그 단초를 이 책 속에서 저마다 찾는 데에 의의가 있을 것이다]
나같은 사람은 지탄을 받는 책은 잘 옹호하려 들지 않는다. 내가 재밌으면 되는 게 아니냐는 생각보다, 남들이 날 어떻게 볼까를 더 걱정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로렌초님은 이렇게 자기 목소리를 내는데, 그건 그동안 책을 읽으면서 쌓인 내공이 밑바닥에 깔렸기 때문이리라. 그의 다른 글들처럼 로렌초님의 리뷰에도 엄청난 존재론적 고민이 담겨 있다. 그의 리뷰들은 대개 길며, 문장을 읽어내려가는 것도-인터넷이라 그렇지만-약간은 버겁다. 그의 리뷰에는 그래서 댓글보다 추천이 많다.
지금은 사람이 꽤 많이 찾는 사이트가 되었지만, 서재 초기에 로렌초님의 서재에는 방문객이 잘 들지 않았다. 그 당시의 페이퍼를 보면 방문객이 없다거나 즐찾이 하나 줄었다는 탄식을 찾아볼 수 있다. 내 생각을 조심스럽게 말한다면, 초창기에 로렌초님 서재에 방문객이 드물었다면 그건 글을 많이 올리는 로렌초님의 특성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다. 즐찾 브리핑에 수많은 글이 뜬다면 상당히 부담이 되니까 말이다. 박찬미님이 실시한 투표 결과에 따르면 즐찾을 삭제한 가장 큰 이유는 ‘너무 많은 게시물이 올라와서’였다. 그리고 알라디너들은 퍼온 글에는 별반 관심이 없다. 즉, 아주 웃기는 페이퍼가 아니면 오리지널에만 주목하는 경향이 있는거다. 그게 즐찾이 느는데 지장을 초래한 게 아닌가 생각하는데, 그런 난관에도 불구하고 로렌초님은 방문객 수 5555를 돌파했고, 지금은 누구나 다 아는 서재인이 되었다. 공연을 보기위해 허리띠를 졸라매는 삶을 사는 멋진 서재인 로렌초님, 존재론적 고민도 좋지만 밝게 웃는 모습도 가끔은 보여줬으면 좋겠다. 그날 오프모임에서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