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화, 그림으로 읽기 - 그리스 신들과 함께 떠나는 서양미술기행
이주헌 지음 / 학고재 / 2000년 7월
평점 :
절판


 빠듯한 시간을 쪼개서 파르나소스 산으로 뮤즈 9자매를 찾아갔다. 물론 보다 권위 있는 음악의 신은 아폴론이지만 그에게 음악을 청하기에는 부족함 점이 많기에 일단은 9명의 미녀 선생님들에게 예술의 기본을 전수 받기 위해서였다. 포근한 서늘함을 드러내는 초가을 달빛을 타고 내려오는 곡을 들으니 낯이 익었다. 바로크 시기 작곡가인 파헬벨의 『캐논 D장조』다. 두드리는 악기의 강렬함이 없이 그저 몇 가닥 줄을 따라서 흘러나오는 은은한 그 선율이 언제까지라도 내 귀와 마음을 적셔주겠다는 듯 쉬지 않고 변한다. 3대의 바이올린이 저마다 다른 성부(聲部)로 같은 주제의 선율을 자유자재로 바꾸며 연주하는 음악 속에는 그들, 그리스 신들이 여전히 우리 곁에 자리할 수 있는 이유가 담겨 있었다. 지상에서의 영속성을 부정할 때가 많지만, 달빛에 실려오는 영원함에의 자신감이 그리 싫지 않다. 그 선율 뒤에 자신들의 무궁(無窮)한 영광을 뽐내는 그리스 신들의 변주곡이 숨어있으니 말이다. 같은 듯 하면서 다르고 다른 듯 하면서도 같은 선율을 지탱시키는 너무도 정교해서 오히려 자연스러워 보이는 질서는 바로 그리스 신과 인간의 관계, 그 자체를 말하고 있었다.

 하나의 주제 속에서 일어나는 끊임없는 변용. 신들의 왕 제우스도 이상적인 남성의 결정체인 아폴론도 그리고 사랑의 기억을 흩뿌리며 날아다니는 에로스에 이르기까지. 그들은 분명 올림포스에 머물던 고대와는 다른 모습으로 숨어있다. 우리가 그들을 찾지 못하고 심지어 그들이 사라졌다고 단정하는 이유도 그들의 천변만화(千變萬化)하는 재주 탓이다. 때로는 혼란스럽게 보이는 이러한 변신에도 분명 하나의 주제는 있었다. '인간보다 더 인간다운 존재'라는 주제 말이다. 신으로써의 권능에 상관없이, 그리스의 신들은 인간 이상의 인간다움을 추구했다. 신이 인간과 같은 모습을 지닌 존재인 이상, 신성(神性)의 소유는 결국 인간에게도 개방될 수밖에 없었다. 그리스인들이 그들의 신화를 통해 보여주고 싶었던 것은 강림하는 신들의 모습보다도 그런 신들을 대신해 신들의 자리에까지 올라갈 수 있는 인간의 절대성이었다. 페르세우스, 오디세우스, 그리고 하늘과 땅을 가로지르는 영웅 헤라클레스까지, 바로 그들은 저마다 인간이 지닐 수 있는 미덕의 극치를 대표하고 있었다. 그리스인들이 인간을 초월해야 할 신들에게 인간의 성품을 부여한 것은, 결국 인간을 초월할 수 있는 것은 신들이 아니라 그 자신뿐이라는 드높은 자부심의 발현에 다름 아니었다.

 하지만 올라오는 인간을 대신해서 그리스의 신들이 땅 위에 현현했기에 중세이래 전 서양을 지배한 기독교 아래서도 인간의 정신은 닫히지 않았으며, 천년의 시간을 보내고 르네상스 시대에 이르러 온전히 부활할 수 있었다. 그들이 우리 곁에 있음으로 해서 예술은 외롭지도, 답답하지도 않았다. 갑자기 주어진 예술의 자유 속에서 소재의 빈곤에 고민하던 예술가들을 도와준 이는 하늘로 오르는 인간이 아니라 이 지상의 삶과 예술을 즐기는 그리스의 신들이었다. 로마에 있는 바티칸 박물관의 벨베데레 궁에는 세상에 다시 모습을 드러낸 순간 이미 고전이 되어버린, '미남자의 표상' 아폴론 상이 있다. 항상 지상에 그 시대의 자신을 만들기 위해 부지런히 돌아다니던 그는, 같은 로마의 시스티나 예배당에 르네상스 시대의 자신의 분신을 만들었다. 바로 미켈란젤로가 그린 최후의 심판에서 그 마지막 날을 주재하는 예수 그리스도였다. 뜻밖의 행운으로 찾아간 로마에서 아폴론 상과 최후의 심판을 보았을 때, 이 책이 들려준 두 절대자의 하나 됨을 수긍할 수 있었다. 고개를 끄덕이며 마음으로 느꼈다. 천년 동안 하늘에 군림하던 신을 인간에게로 모셔 온 르네상스의 힘과 그 시대를 만들어 간 인간들에게 기꺼이 자신을 빌려준 그리스 신들의 인간미를 말이다.

 구석구석 빛이 들어오는 시대가 되어 버린 이제는 그리스 신들이 머물 환상의 공간이 사라졌다고 생각한 나에게 이 책은 미처 알지 못했던 환상의 신대륙으로 향하는 지도와 같았다. 가벼운 산보를 하듯 찾아간 신대륙에서는 고대에 그랬듯, 저마다 주연이 되는 수많은 연극이 무대에 올려지고 있었다. 시간이 흘러도 배우와 각본만은 변치 않는 그 연극과 함께 여름을 보냈다. 보는 것만으로는 성이 차지 않아 무대 위에 올라간다면 누구라도 배우가 된다. 관객들 역시 이 지상에 신들과 함께 발 딛고 있는 존재이니 말이다. (2001년 여름 어느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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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구두 2004-08-24 19:44   좋아요 0 | URL
로렌초의 시종님! 이주의 마이리뷰...
축하드려요.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이주헌 선생 저도 참 좋아하는 분인데... 끝 부분이 아주 매력적인 리뷰네요.

starrysky 2004-08-24 21:39   좋아요 0 | URL
저도 마이리뷰 당선 축하드립니다. ^^
책부터가 님께 아주 잘 어울리는 책이고, 또 그 책에 걸맞는 멋진 리뷰입니다.
앞으로도 계속계속 좋은 일들만 가득하시길 기원합니다. 축하드려요!!

urblue 2004-08-24 22:17   좋아요 0 | URL
처음 인사드리네요. (__) 좋은 리뷰입니다. 축하드려요.

로렌초의시종 2004-08-25 00:10   좋아요 0 | URL
바람구두님/ 어찌 이 누추한 곳까지 행차를. 님의 서재에 자주 들르지만 이 천학비재함이 드러날까 두려워 감히 기척을 못했더랬지요. 거듭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이주헌 선생, 항상 같은 이야기만 하는 것 같지만 실은 항상 다른 이야기거리를 준비하셔서 매력적이에요. 하지만 때로는 저 아닌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냥 단순한 글장사로 보이지 않을까 걱정도 돼요. 겉보기에는 이책이나 저책이나 다 비슷해보이는, 그런 사람으로 말이죠.

starry sky님/ 잊지 않고 이리 들러주셨군요. 정말 감사드려요~~~!!! 무엇보다도 압박받던 재정에 숨통이 트이는 것 같아서 다행스러워요. 사실 저는 늘 하루하루가 좋은 일만 있는 거에요. 이렇게 알라딘에서 좋은 분들을 많이 알고 사니까요. 문제는 좀처럼 다잡아질 줄 모르는 이 좁어터진 마음 속 뿐이죠. 책은 여러모로 꽤나 멋진 책이었지만, 제 글은 지금 다시보니 부끄러워요. 하지만 님의 축하는 정말 감사해요......

urblue님/ 이 부족한 글이 님까지 이 누추한 서재로 모시고 말았군요. 이렇게 들러주시고 축하까지 해주시니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알라딘의 다른 분들에 비하면 부족한 솜씨라서 리뷰쓰는 게 항상 쉽질 않답니다. 하지만 이렇게 이 리뷰로나마 좋은 분들을 많이 뵐 수 있어서 정말 기뻐요. 축하에 거듭 감사드립니다. 반가워요~

꼬마요정 2004-08-25 00:26   좋아요 0 | URL
축하드려요~~~^^*
와~ 정말 잘 쓴 리뷰로군요~~~ 정말 정말 축하드려요~~~^^*

로렌초의시종 2004-08-25 01:09   좋아요 0 | URL
무슨 말씀이세요. 꼬마요정님. 님께서는 이 글보다 훨씬 정갈하고 멋진 글을 꼬박꼬박 올리시면서 말이죠. 완전히 망친 글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너무 멋부리면서 쓴 글이 아닌가 싶어서 뜨끔한 리뷰랍니다. 왠지 뚜렷한 중심이 없는 글 같기도 하고, 무엇보다도 신과 인간의 관계를 이야기하는 부분에서 논리적으로 허술한 점이 눈에 띄어서 맘에 걸려요.

꼬마요정 2004-08-26 11:49   좋아요 0 | URL
약간의 논리적인 허술함이 있다하더라도,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다면... 멋진 글이라고 생각합니다.~~~^^*

로렌초의시종 2004-08-26 11:55   좋아요 0 | URL
그렇게 칭찬해주시니 부끄럽고 감사할 뿐입니다. 앞으로는 더 잘써야 겠다는 생각을 해보면서 말이죠......

stella.K 2004-08-27 10:46   좋아요 0 | URL
저도 늦었지만, 축하드립니다. 잘 읽고 갑니다.^^

로렌초의시종 2004-08-27 10:48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스텔라 공주님, 읽기에 너무 난삽하지나 않았는지 모르겠습니다......

sweetmagic 2004-08-29 15:15   좋아요 0 | URL
너무너무 멋진 리뷰예요 ~
어찌하여 이리도 글을 잘 쓰신단 말입니까 ? 저 같은 사람은 기죽어서 글 못 쓰잖아요 흑흑 추천 입니당..............

로렌초의시종 2004-08-29 16:27   좋아요 0 | URL
무슨 말씀을요~ 스윗매직님. 저보다 잘쓰는 분들이 얼마나 많은데......전 그냥 잘난척 하려다 앞뒤 안맞고 난삽한 글을 썼을 뿐인걸요. 단지 운이 좋았을 따름이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