촐라체
박범신 지음 / 푸른숲 / 2008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극심한 절망에 빠진 사람이 삶의 새로운 희망을 찾기 위해 할 수 있는 선택엔 어떤 것들이 있을까? 뭐, 여러가지가 있을 수 있지만 자신이 빠져있는 절망을 극한까지 밀어붙여 더이상 추락할 수 없을 때까지 추락한 뒤, 바닥을 치고 스스로 올라오는 방법도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 책의 주인공들은 그런 절망의 극한에서 자신을 이기고 다시 삶으로 돌아온 사람들이다.

굳이 등산용어를 몰라도 상관없다. 처음엔 낯선 용어일지라도 책을 읽어나가다 보면 감으로나마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독서의 흐름을 끊어가며 용어를 찾아 읽는 것보다는 감으로 내용을 이해해가며 술술 넘겨 읽는 것이 이 소설의 묘미를 더욱 살려줄 수 있을 거란 생각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내 마음을 가장 두드렸던 단어는 생뚱맞게도 '모럴'이었다. 네이버에서 한글로 '모럴'을 치면 '집단의 구성원에 의하여 형성되는 집단 내의 심리적 상태'라는 설명이 뜬다. 이것만으로는 설명이 부족하지만 어쨌든 이 책에서 사용되는 '모럴'이란 개인의 양심이 만들어내는 내면적 규범 내지 도덕이라는 뜻인 듯 하다.

사실, 생각해보면 소설의 주인공들은 모두 이 모럴을 지키려고 노력하며 살아온 사람들이다. 상민은 등산가로서의 모럴을 지키기 위해 가능하면 최소한의 장비만으로 산을 오르려 하고, 영교는 가족에 대한 모럴을 지키기 위해 아버지가 다르다 해도 형제간의 우애를 갈구하며, 정선생은 원치않는 아이였지만 자신의 자식에 대한 모럴을 지키기 위해 과감하게 꿈을 포기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모럴을 지키며 살아온 그들에 대한 댓가는 가혹한 것이었다. 따르던 선배의 죽음과 이혼, 살인미수라는 범죄, 자식의 출가... 이쯤 되면 삶을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들 법도 하다. 하지만 이 상황에서 그들이 택한 것은 다시금 모럴이다. 최소한의 장비만으로 험하기로 소문난 촐라체 북벽을 오르는 것... 이것이 인생의 막장에서 그들이 택한 삶의 방식이었다.

상민과 영교의 조난과정은 말로 형언할 수 없을 만큼 참혹하다. 베이스캠프에서 그들을 관찰하고 기다렸던 정선생의 마음 역시 지옥이었을 것이다. 그들이 순간순간 차라리 죽는 게 낫겠다고 생각할 때는 나 역시 "그래, 차라리 죽어라. 그게 더 편안하겠다."라고 나도 모르게 혼잣말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인생은 '그렇기 때문에 사는 게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는 것'이라 했던가...? 그들은 끝없는 절망과 추락의 낭떠러지에서도 삶에 대한 애착을 잃지 않았고, 자신이 지키고자 했던 그 모럴을 끝까지 지켜냈다. 비록 손가락과 발가락, 발목과 무릎을 잃었지만 자신의 목숨이 헛되지 않음을, 자신이 지금까지 살아온 방법이 잘못되지 않았음을 깨달았으니 남은 생애가 아무리 고통스럽다 해도 그들은 꿋꿋하게 이겨낼 수 있을 터이다.

작가는 '존재의 나팔소리'에 대해 썼고, '시간'에 대해 썼으며, 무엇보다 불가능해 보이는 '꿈'에 대해, '불멸'에 대해 썼다고 밝혔다. 등산 얘기에 무슨 존재고 시간일까.. 싶었는데 다 읽고 나니 그 말에 전적으로 동의할 수 있었다.

이제는 삶의 크레바스를 만났을 때, 상민과 영교를 기억하며 그 깊은 구덩이에서 기어나올 수 있을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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