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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보포칼립스
대니얼 H. 윌슨 지음, 안재권 옮김 / 문학수첩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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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로보포칼립스 / 데니얼 H. 윌슨 / 문학수첩

 

드디어 '로보포칼립스'를 읽었습니다.

기대가 컸던 만큼, 저의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하면 어쩌나 걱정도 컸었는데...

놀랍게도 소설은, 저의 기대를 뛰어넘을 정도로 좋았습니다.

각설하고 바로 시작하겠습니다. 웅장한 묵시록 서사시, '로보포칼립스'입니다.

 

형식

 

한번도 본 적없는, 엄청나게 새로운, 까지는 아니지만 '로보포칼립스'가 이야기를 풀어내는 방식는 분명 신선합니다. 주인공이나 화자의 개념을 완전히 무너뜨리지는 않으면서 (로보포칼립스의 주인공이자 중심화자는 분명 코맥 월러스입니다) 다양한 인물군상들을 각 챕터의 주인공으로 내세우는 다중플롯을 선택함으로써 주인공의 시선에만 국한되지 않고, 다양한 각도와 시점에서 로봇반란이라는 전지구적 사태를 조명하고 묘사해 낼 수 있었던 것이지요. 뭐, 이정도야 이미 수많은 현대소설에서 시도되어왔던 것이라 그리 새롭다고는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이러한 다중풀롯이 신선해 보이는 것은 이야기 자체와 형식을 자연스럽게 결합시키는, 작가의 참신한 시도 덕분입니다. 즉, 작가는 근미래의 비약적으로 발전된, 모든 것이 기록되고 녹음되는 CCTV 기술이라는 이야기 속 설정을 적극 활용해 주인공인 코맥 월러스가 수집된 CCTV자료를 들춰보며 지난 로봇전쟁을 회상하는 형식으로 다중플롯을 구현해낸 것입니다. 모든 것이 기록되는 세상, 그것도 인간의 눈이 아닌 강력한 적, 로봇의 눈으로 기록된 모든 것들을 통해 전쟁의 역사를 생생하게 되돌아본다. 어떻습니까, 엉덩이를 두드려주고 싶을 정도로 기특하고 영리한 방법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으시나요?

 

그리고 '로보포칼립스'가 더욱 대단한 것은 이러한 다중플롯은 인물들이 많아지고 이야기도 길어질 수 밖에 없어 자칫 산만하고 늘어지기 십상임에도 전혀 지루하거나 산만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이는 작가가 과감한 생략을 통해 이야기 전개를 위해 꼭 필요한 정보만을 취사선택해 제공하고, 각 챕터마다 보고서 형식, 시나리오 형식, 청문회 질의응답 형식 등으로 서술형식을 다채롭게 해 챕터와 챕터 사이의 남은 이야기들을 독자 스스로 능동적으로 추리하고 그려보는 재미를 주는 방법으로 이 거대한 서사시를 한 권 분량으로 효과적으로 압축해냈기 때문입니다. 그 덕분에 우리는 보지 않은 것마저 실제로 본 것처럼 생생하게 '만지고 느끼며' 로봇전쟁의 한복판으로 뛰어들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리얼리티

 

이러한 생생함이 가능한 것은 참신한 형식에 더해 실제 일어난 현실의 이야기가 아님에도 마치 진짜처럼 느껴지는 리얼리티 덕분이기도 합니다. '터미네이터'나 '트랜스포머' 시리즈는 누가봐도 '뻥'처럼 보이지만, '로보포칼립스'는 정말 충분히 일어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지요. 이는 작가인 로봇공학 전문가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인간이라는 종에 대한 이해 또한 뛰어나기 때문입니다. 아닌게 아니라, 가까운 미래에 로봇이 어느 수준까지 진화할 수 있는지 이만큼 현실적으로 보여주는 이야기를 저는 아직 본 적이 없습니다. 모든 로봇이 인간처럼 감정을 가지고, 인간처럼 말하고 행동하지는 못한다거나 로봇이 순식간에 인간이 이루어놓은 문명을 단번에 장악하고 압도하지는 못하고 제법 오랜 시간의 틈이 생긴다는 점에서 '로보포칼립스'는 현실이 아님에도 충분한 리얼리티를 확보해 내는데 성공합니다.

또한 인간들이 도시를 벗어나 상대적으로 기계문명이 발전하지 않은 시골로 피신해 로봇에 투박하지만 조직적으로 대항하는 방식이나, 로봇들이 인간의 문명을 연구하고 진화하기 위해 인간 포로와 자연 생물들을 관찰하고 섣불리 문명체계를 파괴하지 않는다는 설정도 또한 이 이야기에 그럴듯한 개연성을 부여해줍니다. 

 

다만, 클라이막스를 포함한 후반부와 결말이 긴장감 넘치던 초중반부에 비해 조금은 느슨하고 싱겁다는 인상이 들어 조금 아쉬웠습니다. 인간적인 로봇이 인간의 편에서 로봇과의 싸움을 종결한다. 인간적인 그리고 환경적인 여유와 조화를 무시한채 오로지 테크놀로지의 발전에만 몰두했던 인간의 과도한 문명화에 대한 반성을 역설적으로 표현해내는 탁월한 엔딩일수도 있겠지만, 너무 급작스러운 마무리 때문에 이야기 자체의 완성도와 재미를 떠나서 이러한 메시지 전달조차 희미해진 것은 아닌지 분명 고민해봐야 할 부분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럼에도 '로보포칼립스'는 새로운 형식과 지금껏 보지못한 극강의 리얼리티로 비인간적인 현대문명과 이를 창조해낸 인간들에게 경고장을 던지고 SF장르 특유의 재미 또한 놓치지 않은 수작임에는 분명합니다. 스필버그가 이 간단치 않은 이야기를 어떻게 영화로 완성해낼지 모르겠지만, 평소 테크놀러지와 휴머니즘의 조화라는 화두에 관심이 많았던 그이기에 그 결과물이 사뭇 기대가 됩니다. 아직 확신하긴 이르지만, 스필버그라면 스토리와 비주얼 모두를 놓치지 않은 말그대로의 새로운 영화를 창조해낼 수 있지 않을까요? '로보포칼립스'이기에 가능한, 그리고 스필버그이기에 가능한, 그런 영화로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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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는동안]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웃는 동안
윤성희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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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는 동안 / 윤성희 / 문학과 지성사

 

윤성희.

 

어느덧 이 이름은 밝고 긍정적인 기운으로 가득한 이름이 되었습니다. 비록 사진을 통해서지만, 웃는 그의 얼굴과 이름이 합쳐지는 순간 그는 거부할 수 없는 무한긍정의 세계를 대표하는 아이콘이 됩니다. 어느덧, 자신도 모르고 우리도 모르게, 그리 되었습니다. 물론 이러한 아이덴티티 구축이 가능했던 건, 그가 소설가로써의 세월뿐 아니라 사람으로써 스스로의 인생을 잘 살아냈기 때문일 터입니다. 이번 소설집 '웃는 동안'은 바로 그러한 윤성희의 정체성을 대표하는, 말그대로의 대표작품집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뭐랄까요. 웃음도 혹은 긍정도 무르익는구나, 라고나 할까요. 설익은 웃음과 긍정, 천진난만한 웃음과 긍정만 있는 것이 아닌, 능수능란하고 농익은, 웃음과 긍정도 있구나, 라는 걸 여전히 웃는 그 인상 그대로 나이 먹어가는 그와 그를 꼭 빼닮은 작품들을 통해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표제작인 '웃는 동안'을 비롯해 빼곡히 담아낸 11편의 담편은 외따로의 이야기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로 닮아있고 보이지 않는 선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주인공들의 삶은 언제나 비루하고 그리 희망차지 않지만, 그 삶을 살아내는 주체, 말그대로의 의미에서의 주인공들은 전혀 비루하거나 불행해보이지 않습니다. 그들은 누가 뭐라든, 자신의 삶을 살고 있더군요. 그리 대단한 포부나 목표를 가지지도 않았지만, 절대 후회하거나 실망하지 않은 채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하며 살아내더군요. 놀랍게도 그들은 작품집의 제목처럼 자주 웃거나, 작가의 푸근한 인상처럼 넉넉해보이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그들이 가난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우연을 가장해서 그때그때, 닥치는대로, 즉흥적으로 살아내는 것처럼 보이지만, 계속되는 우연은 결국 계획의 다른 이름이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거창하진 않지만, 지금 내가 무엇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그렇게 자신의 삶을 살고 있다는 확신, 말입니다.

 

작가의 초기 작품들의 밝은 기운의 정체가 그리 거창하지 않더라도, 보잘 것 없는 삶이더라도 당당하게 소리 지르거나, 생각나는대로 내지름으로써, 그렇게 웃음과 희망을 과장하는 과정에서 생겨나는 에너지 덕분이었다면, 이번 작품집의 그들은 부러 희망을 과장하거나 억지로 웃음짓는 일 없이, 자신의 상황과 세월에 맞는 자연스러운 웃음으로, 그렇게 남아있는 희미한 희망만으로도 충분히 밝고 경쾌해 보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앞서 말한 무르익은 웃음 혹은 무르익은 긍정의 정체가 아닐까요? 작가가 그 나이에도 여전히 '웃는 동안'을 유지하는 비결이라는 생각도 들고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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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자잔혹극]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활자 잔혹극
루스 렌들 지음, 이동윤 옮김 / 북스피어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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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활자 잔혹극 / 루스 렌들 / 북스피어 (2011)

 

'활자 잔혹극'은 추리 소설의 외피를 지녔지만, 일반적인 추리소설과는 많이 다릅니다. 범인을 밝히고 시작하는 오프닝 부터 사건을 연대기 순으로 되짚는 마치 수시일지를 보는 듯한 건조한 문체, 그리고 사건 자체보다 등장인물들의 심리묘사에 더욱 공을 들이는 작가의 서술방식까지. 읽는 내내 이 소설을 과연 추리소설이라 할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대놓고 범인을 밝히고 시작하는 뜻밖의 오프닝이 우선 눈에 띕니다. 어디 그뿐입니까. '유니스 파치먼은 읽을 줄도 쓸 줄도 몰랐기 때문에 커버데일 일가를 죽였다.' 라는 첫 문장을 보세요. 놀랍게도 이 한 문장 안에 소설의 모든 것이 담겨 있습니다. 앞으로 이야기하려고 하는 줄거리, 등장인물, 주제, 메시지까지. 일찍이 이 정도로 효율적이면서 대담한 첫 문장을 저는 본 적이 없는 듯 합니다. 이어지는 첫 챕터의 내용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치 한 권 분량의 긴 보고서의 서문 같은 이 첫 챕터는 아주 논리정연하면서도 간결하게 사견의 개요를 설명하고 이제부터 말하고자 하는 바를 예고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중요한 것은 유니스 파치먼이 커버데일 일가를 죽였다는 사실이 아닙니다. 우리는 시작부터 범인이 누구인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정작 중요한 것은 왜 죽였는가일텐데, 놀랍게도 우리는 그 이유마저 모르지 않습니다. 작가는 이미 밝혔습니다. 그것도 첫 문장에, '읽을 줄도 쓸 줄도 몰랐기 때문에'라고 매우 정확하게 써놓았습니다. 이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납득하는 것입니다. '읽을 줄도 쓸 줄도 모른다고 사람들을 죽인다고? 정말 문맹이 사람을 죽일 이유가 된단 말이야?' 이 소설은 바로 독자들의 이러한 질문에 대한 길고 긴 답변인 것입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저는 책장을 다 덮고나서도 100% 납득하진 못했습니다. 심정적으로야 그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당시 시대적 상황과 사람들의 인식수준, 그리고 그로 인한 유니스의 처지가 이해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그게 사람들을 죽일 이유가 될 수 있다는 걸 완전히 납득할 순 없었습니다. 유니스의 순탄치 않은 성장과정과 '개인적인'과 '내성적인'을 넘어서 '폐쇄적인'에 가까운 그녀의 독특한 캐릭터를 십분 이해하더라도 결국 고개가 끄덕여지진 않았습니다.

 

작가는 수많은 논리적인 근거들로 그녀의 범죄행위를 분석하며 그녀가 살인을 저지른 근본적인 원인이 바로 그녀가 문맹이었기 때문이라는 결론을 내기 위해 애썼지만, 결국 작가 역시 그보다 더 근본적인 이유는 그녀가 '나쁜 사람'이기 때문이라고 인정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문맹이어도 유니스가 근본적으로 착한 본성을 타고난 사람이었다면 과연 사람을 죽였을까요? 작가는 문맹이었기 때문에 그러한 본성이 감화될 기회를 얻지 못한 것이라고 강변할테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문맹이 바로 그녀가 그들을 죽인 가장 큰 이유라고 확신할 터이지만, 저 역시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이 길고 긴 '유니스에 대한 범죄 분석보고서'를 완전하게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이쯤되면 오해가 생길지도 모르겠네요. 지금 저는 이 소설이 부족하다고, 모자라다고, 좋지 않다고 비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이 소설을 너무 좋게 읽었습니다. 거의 모든 부분을 수긍했고, 작가의 견해에 고개를 끄덕였으며, 작가의 신선하면서도 날카로운 문체에 혀를 내둘렀습니다. 살인사건의 이유를 문맹이라 말하고는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부모외 친지들의 무관심 속에서 방치된 채 자라난 범인의 성장과정, 소외된 하층민들에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최소한의 기회를 제공하지 않는 불평등한 사회시스템, 못 배우고 못 가진 하층계급을 무시하고 조롱하는 지배계층의 위선과 특권의식을 아주 날카롭고 적나라하게 비판하는 작가의 노력에 저는 찬탄을 금치 못할 지경이었습니다. 가족이, 이웃이, 사회가, 조금만 그녀에게 더 관심을 기울였더라면 그녀는 글을 배울 수 있었을 것이고, 그랬다면 그녀는 당당한 사회의 일원으로써 자신의 '폐쇄적인 성격'과 '악랄한 본성'을 충분히 고칠 기회를 얻어 지금보다 훨씬 평범하고 순탄한 삶을 살게 되었을 것이라는 작가의 말에 저 역시 동의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제가 동의가 되는 것은 딱 여기까지였습니다. 저에게는 여전히 의문이 남았습니다. 그녀가 글을 읽을 줄 알았다면, 정말 그녀의 삶이 달라졌을까? 그녀는 정말 커버데일 일가를 죽이지 않았을까? 저는 소설을 읽고나서도 이 질문에 자신있게 대답할 수 없었습니다. 글을 읽고 쓴다는 것이 작가의 말대로,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큰 사회적 함의를 지니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더라도, 그렇기에 '글을 읽지 못하는 유니스'와 '글을 읽을 줄 아는 유니스'는 천지차이라 치더라도, 저는 끝내 문맹이 살인의 원인이라는 결론에 완벽하게 동의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런데 말입니다. 그럼에도 저는 이 소설이 너무나 대단하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이런 생각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저의 미심쩍음마저, 이러한 찜찜함마저 어쩌면 작가의 의도가 아니었을까? 라는 생각 말입니다. 혹시, 이러한 일말의 의구심과 끝끝내 부정하고 싶은 마음이 바로, 글을 읽을 줄 아는, 교양인으로써의 위선이며 특권의식인 건 아닐까요? 저는 저도 모르게...그녀가 글을 읽고 쓸 줄 모르기 때문이 아니라, '글을 읽고 쓸 줄 모르는 나쁜 년'이기 때문에 사람을 죽인 것이다, 라는 결론을 내리고 싶었던 겁니다. 그래야 교화라는 '사회의 순기능'이 힘을 발휘할 수 있다는, 글을 읽고 쓴다는 것이 더욱 대단한 힘을 가진다는, 마음 속 깊숙이 자리한 우쭐함...작가는 바로 이러한 우리 '문명인'들의 견고한 오만과 편견을 비판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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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산 - 김훈 장편소설
김훈 지음 / 학고재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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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산 / 김훈 / 학고재 (2011)

 

정약용을 언급하다

김훈 신작의 제목이 '흑산'이라는 말을 듣고, 재작년쯤 읽은 한승원의 '다산'이 어쩔 수 없이 떠올랐습니다. '다산'과 '흑산'이 모두 '산'자로 끝나서는 물론 아닙니다. 다산은 정약용의 호이지만, 흑산은 그의 형인 정약전의 호가 아니니까요. 그럼에도 우리는 흑산이 정약전의 호인 손암이나 연경재보다 더 호답다는 것 또한 알고 있습니다. 강진의 다산이 자연스레 정약용의 다른 이름이 되었듯이, '흑산'도 충분히 정약전을 상징할 수 있을테니까요.
'흑산'을 읽는 동안에도 한승원의 '다산'은 쉽게 지워지지 않았습니다. 예상했던 것과 달리 '흑산'에 정약용이 등장하지 않아서 더욱 더 그러했습니다. 정약전을 이야기하면서 정약용을 지나치듯 언급하는 수준에서 그칠 수 있다니. 역시 김훈답다고 해야할까요? 아무려나 그럴 것입니다. 김훈에게 정약용은 그리 매력적인 인물이 아니었을테니까요.
정약용의 세속적 권력의지와 현실정치에 대한 미련이 김훈의 눈에는 하잘것 없는 미련이자 욕심으로 보였을 것입니다. 배교라는 이름으로 믿음을 저버리고 가족을 내치고도 죽는 날까지 자신의 배교를 합리화하며 그 미련과 욕심의 끈을 끝내 놓지 못한 정약용은 김훈이 보여주고 싶어하는 세계의 주인이 결코 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이것이 한승원과 김훈의 차이라고는 말할 순 없습니다. 그렇게 단정지을 만큼 이 두 작가들에 대해 알지 못할 뿐 아니라, 또한 이 두 작가만큼 정약용에 대해서도 잘 알지 못하니까요. 굳이 두 작가를 더 직접적이고 정확하게 비교하고 싶다면, '흑산'과 비교할 한승원의 소설은 '다산'이 아니라 정약전을 주인공으로 한 '흑산도 하늘길'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다고 해서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일까요. 제가 말하고 싶은 것은 두 작가가 정약전이나 정약용을 얼마나 다르게 그려냈느냐가 아닌 것을요.
중요한 것은 한승원은 정약용을 이야기하면서 정약전을 적극적으로 등장시켜 정약용의 또다른 자아처럼 묘사했지만, 김훈은 정약전을 이야기하면서 정약용에 대해 지나치듯 언급하고는 끝내 침묵했다는 점입니다. 저는 이것이 바로 정약용을 주인공으로는 작품을 쓸 수 없는 김훈이 정약전을 주인공으로 한 '흑산'은 써내고 만 중요한 이유가 아닐까 싶습니다.

정약전을 이야기하다

'흑산'은 당연히 정약전이 유배생활을 보내다 최후를 맞이한 흑산도를 가리킵니다. 그러나 단순한 지명이라기보다는 흑(黑), 즉 검정이 지닌 그 막막함과 캄캄함 그리고 산(山)이 지닌 그 까마득함과 견고함을 합친...희망이라곤 없는 세상의 끝을 의미한다고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만큼 '흑산'이 그리고 있는 세상은 지금껏 김훈이 그려낸 어떠한 세상보다 어둡고 절망적입니다. 여기가 끝이라는 생각이 절로 들 만큼,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차라리 낫겠다는 생각이 들 만큼 그러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세상의 한복판, 아니 끄트머리에 정약전이 서 있습니다. 동생 정약용이 그나마 가까운 육지인 강진에서 나라를 걱정하는 '사치'를 누리는 동안 정약전은 허무와 절망의 늪에서 허우적거립니다. 정약용에게 나라는 여전히 새롭게 하고 바로잡아야 할 무엇이고, 백성은 교화시키고 위무해야 할 무엇이지만 정약전에게 나라와 백성은 이미 의미를 잃은 지 오래입니다. 정약전이 알고 있던, 정약전이 믿고 의지하던, 나라와 백성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배교하기 전 믿어 의심치 않던 절대자의 존재가 '흑산'에 선 정약전에게 의지가 되는 것도 아닙니다. 이마저도 그에게는 더 이상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왜냐구요? 왜 그렇게까지 된 것이냐구요?

더 이상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나라도, 백성도, 절대자도, 정약전이 서 있는 '흑산'에서는 볼수도 만질 수도 없는 것입니다. 보이지도 않고 만질 수도 없는 것들을 정약전은 믿을 수 없습니다. 이제 정약전이 유일하게 믿을 수 있는 건, 눈 앞에서 살아 펄떡이는 물고기들 뿐입니다. 만지면 꿈틀거리고, 들여다보면 도망치는 그 날 것. 정약전은 새삼 그 생명이 눈물겨워 가슴을 칩니다. 이것이 바로 세상이고, 나라이며, 백성이고, 절대자라고 마음속으로 외칩니다. 그리고 그 북받침을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붓을 들어 살아 숨쉬지만, 무의미한 그것들에 대해서 적기 시작합니다. 그렇게 정약전은 세상의 끝에서 세상 최초로 무의미와 유의미의 간극을 없애는데 성공합니다. 자신이 무엇을 해낸 줄도 모른 채. '흑산'에서의 삶을 견디기 위해.

또다른 황사영들을 기억하다

그 사이 사이, 정약전이 유일하게 궁금해하고 걱정하는 이는 동생 정약용이 아닌 조카사위 황사영입니다. 자신의 인도로 절대자를 믿기 시작한 그 맑은 소년이 가서 닿은 곳이 어디인지, 기실 어디여도 상관없지만 부디 '흑산'은 아니기를 정약전은 바라고 바랍니다. 그러나 정약전은 모르지 않습니다. 황사영, 그도 미처 모를 뿐 결국 '흑산'에 서 있다는 것을. 끝내 배교하지 않고 자신이 믿는 세상과 조우하기를 열망했지만, 그 역시 그 곳에는 끝내 가 닿지 못했으리라는 것을.

그러나 김훈은 진짜 황사영과 무수한 또다른 황사영들을 통해, 그게 그렇지 않다고 이야기합니다. 정약전의 근심과 염려가 황사영에서 멈추는 순간, 세상은 정약전의 말대로 '흑산'에서 끝날지도 모르지만, 다행히 세상에는 또다른 황사영들이 무수히 많습니다. 마노리, 육손이, 박한녀, 길강녀, 강사녀, 아리, 그리고 심지어 박차돌까지. 이들이 또다른 황사영임을 '흑산'의 세계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죽은 정약전은 끝내 알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정약전이 모른다고 이들이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진짜 황사영과 이 또다른 황사영들은 정약전이 보지 못한 '흑산' 너머의 세상으로 나아가다 죽습니다. 정약전도 죽고 이들도 죽었지만 '흑산'에서의 죽음과 '흑산' 너머에서의 죽음은 결코 같지 않습니다. 정약전도 '흑산' 말고 다른 세상을 보지 못하고 죽었고, 이들도 '흑산'을 넘었을지언정 그 너머의 세상과 조우하지 못한 채 죽었지만...이 두 죽음은 절대 같은 죽음이 아닌 것입니다.

김훈은 그것이 바로 믿음이라고 말하고 싶었던 것이었을까요? 솔직히 그렇다고 확신하진 못하겠습니다. 설혹 그것이 믿음이더라도, 그 믿음이 과연 현재의 우리가 아는 바로 그 믿음을 뜻하는 것이었을까요? 여전히 조심스럽지만, 저는 그렇지 않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모르긴 몰라도 그 믿음이란 '흑산' 너머의 세상에 대한 믿음이 아니었을까요? '흑산' 너머의 세상은 분명...가중될 착취가 무서워 싹을 틔우는 소나무를 밟아 죽여야 하는 세상, 조기 몇마리를 감췄다고 수중 감옥에 갇혀야 하는 세상, 사는 것이 버거워 차라리 바다에서 죽은자가 되어 고향을 등져야 하는 세상은 아닐 것이라는 믿음 말입니다.

무수한 정약전들을 기록하다

그렇다고 김훈이 '흑산'에 남은 자를 어리석다고 비난하려는 것은 아니었을 겁니다. 결국 김훈이 잊지않고 남기고 싶은 것은, 그렇게 끝내 기록하고 싶은 이들은 '흑산'을 떠나지 못한 이들입니다. '흑산'을 '흑산'으로 만든, '흑산'을 유지하려는 자들도 결국엔 '흑산'을 떠납니다. '흑산'을 못 견뎌 '흑산' 너머의 세상을 꿈꾼 이들도 죽음일지언정 '흑산'을 등집니다. 그러니 이제 남은 이들은 폐허가 된 '흑산'을 떠나지 못한 이들 뿐입니다.

놀랍지만, 또한 당연하게도 이들의 수가 가장 많습니다. 이들은 어떤 이유에서든 이곳, '흑산'을 떠나지 못했으니 이곳, '흑산'에서 살아야 합니다. 산다는 것은 죽을 수 없다는 것이고, 죽을 수 없다는 건 견뎌야 한다는 뜻입니다. 김훈이 결국 기록하고 싶었던 건, 그렇게 견뎌야 하는 무수한 정약전들이 아니었을까요? 수많은 물고기들을 기록하는 정약전의 마음으로 김훈은 '흑산'을 써낸 것이 아닐까요?

죽지 않고, 살아서, 견뎌내며, 꾸역 꾸역...그렇게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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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호측 증인]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변호 측 증인
고이즈미 기미코 지음, 권영주 옮김 / 검은숲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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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호측 증인 / 고이즈미 기미코 / 검은숲 (2011)

 

그렇고

'변호측 증인'은 전형적인 신데렐라 스토리를 기반으로 한 이야기입니다. 가난하고 보잘것 없는 밤무대 댄서가 재벌가의 외동아들이라는 백마 탄 왕자님을 만나 사랑에 빠져 행복하게 잘 산다. 어떻습니까? 상투적이다 못해 식상하기 까지 하지 않습니까? 이미 수많은 소설, 영화에서 지겹도록 반복되었던 설정이며 심지어 우리나라 텔레비전 드라마에서는 아직도 쌩쌩한 현역으로 각광받고 있는 설정입니다.

주인공인 미미의 캐릭터 또한 얼핏 보기에는 우리가 흔히 보아온 신데렐라, 혹은 캔디 캐릭터에 충실해 보입니다. 미미는 가난하고, 소심하고, 여리지만...이 모든 단점을 단번에 뒤엎을 만큼 예쁘고 매력이 넘치거든요. 게다가 거짓과 위선으로 가득한 세상과 맞서 싸울 용기까지 지녔으니...미미가 어떤 인물일까 떠올리다보면 여느 한국 드라마에서 튀어나온 낯익은 여배우의 얼굴이 연상되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그런

그럼에도 '변호측 증인'은 전형적인 신데렐라 스토리가 아닙니다. 분명 우리에게 익숙한 설정과 인물에서 시작하지만, 말그대로 그건 시작을 위한 밑바탕이 될 뿐 소설은 우리가 예상했던 것과 전혀 다른 방향으로 진행됩니다. 이는 물론 이 소설의 장르가 (영화나 드라마로 치자면) 멜로드라마나 로맨틱코미디가 아닌 미스터리 스릴러 혹은 밀실 추리극에 가깝기 때문입니다. 멜로드라마나 로맨틱 코미디에서 튀어나온 듯한 인물들이 의문의 살인사건에 휘말린다. 이러한 장르 비틀기 만으로도 충분히 흥미를 불러 일으키고 새롭다는 느낌을 줄 수 있는 것이지요.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변호측 증인'이 1963년, 즉 수십년 전에 쓰여진 소설이라는 걸 전재했을 때 이야깁니다. 현재 2011년에 이러한 소설이 나왔어도 과연 우리는 (지금까지의 설명만으로) 이 소설을 읽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될까요? 아마도 대부분의 독자들은 그렇지 않을 겁니다. 아시다시피 우리는 이야기의 홍수 속에서 살고 있으니까요. 소설 뿐 아니라 영화, 만화, 텔레비전 드라마들을 통해서 다양한 이야기를 다양한 방식으로 접하고 있으니까요.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 는 말은 바로 우리가 사는 지금을 위해 만들어진 명언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니까요. 여러 장르간의 혼합과 기존의 법칙을 깨고 비트는 시도들 또한 이미 다양한 방식으로 시도가 됐던 터라 '변호측 증인' 정도의 설정으로는 입맛 까다로운 현대 독자들의 구미를 당기기 힘들어 보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다시 그럼에도 저는 '변호측 증인'이 수십년 전에 쓰여진 소설이라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지금, 2011년에 봐도 충분히 참신하고 충분히 탁월하다고 말하려 합니다. 이쯤에서 이미 이 작품을 읽은 독자들이라면 소설의 후반부에 숨어 있는 그리 엄청나진 않지만 충분히 놀라운 반전 때문이 바로 그 이유라고 생각하실 겁니다. 물론 틀린 말은 아닙니다. 소설이라는 매체의 특성을 적극 활용한, 즉 행간 속에 교묘히 화자와 서술대상의 실체를 숨기며 예상치 못한 트릭으로 독자들을 놀래킨 작가의 재기 또한 물론 하나의 충분한 이유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는 부차적인, 이 소설이 여전히 탁월할 수 밖에 없는 가장 중요한 이유를 더욱 돋보이게 하는 극적 장치일 뿐입니다. 그만 뜸들이고 얼른 그 중요한 이유를 말씀드려야겠지요? 듣기에 따라서는 그리 대단한 이유가 아닐지도 모르니 너무 큰 기대는 하지 않으시는게 좋을 듯 합니다. 어디까지나 순전히 제 개인적인 느낌에 불과할 테니까요.

진실의 무력화. 혹은 진실 이상의 진실.

이것이 바로 제가 이 소설이 진짜로 좋다고 느끼게 된 이유입니다. 말이 조금 어렵고 모호한가요. 네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 사실 저 역시 정확히 뭐라고 딱 집어 설명하거나 정의내리긴 어려운 부분이거든요. 앞서 말씀드린 이 소설의 반전은 바로 이 진실일 것입니다. 누가 노인네를 죽였는가, 라는 이 소설의 최대 미스터리. 그 진실이 밝혀지는 순간이 바로 이 소설의 정점이자 이 소설이 이야기하고자 하는 모든 바가 드러나는 것은 당연할 터입니다.
그러나 이 소설은 대단하게도 그게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그 진실을 둘러싼 사람들의 마음, 즉 진심이라고, 작가는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진심이란 사람에 따라서 욕망일 수도 있고 질투일 수도 있고 사랑일 수도 있겠지만, 그 진심의 정체가 무엇이든...진심은 결국 진실을 넘어서는 진실이 되고 만다는 아프지만 너무나 자명한 깨달음. 이것이 바로 제가 이 소설을 인정할 수 밖에 없고, 수십년이 지난 지금에도 여전히 이 소설이 명작일 수 밖에 없는 이유인 것입니다.

 

누가 야시마 류노스케를 죽였는지, 미미의 뱃 속 아이가 누구의 씨인지, 미미가 어떤 남성편력을 갖고 있는지, 작가는 그 진실을 행간 속에서 충분히 밝히지만...이러한 진실은 소설 속 어디에서도 중요한 장치로 활용되지 못한 채 사라져 버립니다. 진실 따위는 개나 줘버리라는 듯 작가는 여러 진실들을 철저히 무시합니다. 그리고는 너무나 냉정하고 담담하게 각 인물들이 간직한 진심만을 이야기합니다. 강력한 진실이라는 벽에 비하면 한없이 보잘 것 없을 듯 하지만, 사실은 그 강력한 진실조차 뒤바꾸고 무력화시킬 수 있는...욕망이라는, 질투라는, 사랑이라는 이름의 그 가공할 진심 말입니다.

이러한 진심이라는 보편성 때문에 수십년이 지난 지금의 독자들도 이 소설에 깊이 공감하며 미미의 처지와 심정에 자신을 이입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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