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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산 - 김훈 장편소설
김훈 지음 / 학고재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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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산 / 김훈 / 학고재 (2011)

 

정약용을 언급하다

김훈 신작의 제목이 '흑산'이라는 말을 듣고, 재작년쯤 읽은 한승원의 '다산'이 어쩔 수 없이 떠올랐습니다. '다산'과 '흑산'이 모두 '산'자로 끝나서는 물론 아닙니다. 다산은 정약용의 호이지만, 흑산은 그의 형인 정약전의 호가 아니니까요. 그럼에도 우리는 흑산이 정약전의 호인 손암이나 연경재보다 더 호답다는 것 또한 알고 있습니다. 강진의 다산이 자연스레 정약용의 다른 이름이 되었듯이, '흑산'도 충분히 정약전을 상징할 수 있을테니까요.
'흑산'을 읽는 동안에도 한승원의 '다산'은 쉽게 지워지지 않았습니다. 예상했던 것과 달리 '흑산'에 정약용이 등장하지 않아서 더욱 더 그러했습니다. 정약전을 이야기하면서 정약용을 지나치듯 언급하는 수준에서 그칠 수 있다니. 역시 김훈답다고 해야할까요? 아무려나 그럴 것입니다. 김훈에게 정약용은 그리 매력적인 인물이 아니었을테니까요.
정약용의 세속적 권력의지와 현실정치에 대한 미련이 김훈의 눈에는 하잘것 없는 미련이자 욕심으로 보였을 것입니다. 배교라는 이름으로 믿음을 저버리고 가족을 내치고도 죽는 날까지 자신의 배교를 합리화하며 그 미련과 욕심의 끈을 끝내 놓지 못한 정약용은 김훈이 보여주고 싶어하는 세계의 주인이 결코 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이것이 한승원과 김훈의 차이라고는 말할 순 없습니다. 그렇게 단정지을 만큼 이 두 작가들에 대해 알지 못할 뿐 아니라, 또한 이 두 작가만큼 정약용에 대해서도 잘 알지 못하니까요. 굳이 두 작가를 더 직접적이고 정확하게 비교하고 싶다면, '흑산'과 비교할 한승원의 소설은 '다산'이 아니라 정약전을 주인공으로 한 '흑산도 하늘길'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다고 해서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일까요. 제가 말하고 싶은 것은 두 작가가 정약전이나 정약용을 얼마나 다르게 그려냈느냐가 아닌 것을요.
중요한 것은 한승원은 정약용을 이야기하면서 정약전을 적극적으로 등장시켜 정약용의 또다른 자아처럼 묘사했지만, 김훈은 정약전을 이야기하면서 정약용에 대해 지나치듯 언급하고는 끝내 침묵했다는 점입니다. 저는 이것이 바로 정약용을 주인공으로는 작품을 쓸 수 없는 김훈이 정약전을 주인공으로 한 '흑산'은 써내고 만 중요한 이유가 아닐까 싶습니다.

정약전을 이야기하다

'흑산'은 당연히 정약전이 유배생활을 보내다 최후를 맞이한 흑산도를 가리킵니다. 그러나 단순한 지명이라기보다는 흑(黑), 즉 검정이 지닌 그 막막함과 캄캄함 그리고 산(山)이 지닌 그 까마득함과 견고함을 합친...희망이라곤 없는 세상의 끝을 의미한다고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만큼 '흑산'이 그리고 있는 세상은 지금껏 김훈이 그려낸 어떠한 세상보다 어둡고 절망적입니다. 여기가 끝이라는 생각이 절로 들 만큼,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차라리 낫겠다는 생각이 들 만큼 그러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세상의 한복판, 아니 끄트머리에 정약전이 서 있습니다. 동생 정약용이 그나마 가까운 육지인 강진에서 나라를 걱정하는 '사치'를 누리는 동안 정약전은 허무와 절망의 늪에서 허우적거립니다. 정약용에게 나라는 여전히 새롭게 하고 바로잡아야 할 무엇이고, 백성은 교화시키고 위무해야 할 무엇이지만 정약전에게 나라와 백성은 이미 의미를 잃은 지 오래입니다. 정약전이 알고 있던, 정약전이 믿고 의지하던, 나라와 백성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배교하기 전 믿어 의심치 않던 절대자의 존재가 '흑산'에 선 정약전에게 의지가 되는 것도 아닙니다. 이마저도 그에게는 더 이상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왜냐구요? 왜 그렇게까지 된 것이냐구요?

더 이상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나라도, 백성도, 절대자도, 정약전이 서 있는 '흑산'에서는 볼수도 만질 수도 없는 것입니다. 보이지도 않고 만질 수도 없는 것들을 정약전은 믿을 수 없습니다. 이제 정약전이 유일하게 믿을 수 있는 건, 눈 앞에서 살아 펄떡이는 물고기들 뿐입니다. 만지면 꿈틀거리고, 들여다보면 도망치는 그 날 것. 정약전은 새삼 그 생명이 눈물겨워 가슴을 칩니다. 이것이 바로 세상이고, 나라이며, 백성이고, 절대자라고 마음속으로 외칩니다. 그리고 그 북받침을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붓을 들어 살아 숨쉬지만, 무의미한 그것들에 대해서 적기 시작합니다. 그렇게 정약전은 세상의 끝에서 세상 최초로 무의미와 유의미의 간극을 없애는데 성공합니다. 자신이 무엇을 해낸 줄도 모른 채. '흑산'에서의 삶을 견디기 위해.

또다른 황사영들을 기억하다

그 사이 사이, 정약전이 유일하게 궁금해하고 걱정하는 이는 동생 정약용이 아닌 조카사위 황사영입니다. 자신의 인도로 절대자를 믿기 시작한 그 맑은 소년이 가서 닿은 곳이 어디인지, 기실 어디여도 상관없지만 부디 '흑산'은 아니기를 정약전은 바라고 바랍니다. 그러나 정약전은 모르지 않습니다. 황사영, 그도 미처 모를 뿐 결국 '흑산'에 서 있다는 것을. 끝내 배교하지 않고 자신이 믿는 세상과 조우하기를 열망했지만, 그 역시 그 곳에는 끝내 가 닿지 못했으리라는 것을.

그러나 김훈은 진짜 황사영과 무수한 또다른 황사영들을 통해, 그게 그렇지 않다고 이야기합니다. 정약전의 근심과 염려가 황사영에서 멈추는 순간, 세상은 정약전의 말대로 '흑산'에서 끝날지도 모르지만, 다행히 세상에는 또다른 황사영들이 무수히 많습니다. 마노리, 육손이, 박한녀, 길강녀, 강사녀, 아리, 그리고 심지어 박차돌까지. 이들이 또다른 황사영임을 '흑산'의 세계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죽은 정약전은 끝내 알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정약전이 모른다고 이들이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진짜 황사영과 이 또다른 황사영들은 정약전이 보지 못한 '흑산' 너머의 세상으로 나아가다 죽습니다. 정약전도 죽고 이들도 죽었지만 '흑산'에서의 죽음과 '흑산' 너머에서의 죽음은 결코 같지 않습니다. 정약전도 '흑산' 말고 다른 세상을 보지 못하고 죽었고, 이들도 '흑산'을 넘었을지언정 그 너머의 세상과 조우하지 못한 채 죽었지만...이 두 죽음은 절대 같은 죽음이 아닌 것입니다.

김훈은 그것이 바로 믿음이라고 말하고 싶었던 것이었을까요? 솔직히 그렇다고 확신하진 못하겠습니다. 설혹 그것이 믿음이더라도, 그 믿음이 과연 현재의 우리가 아는 바로 그 믿음을 뜻하는 것이었을까요? 여전히 조심스럽지만, 저는 그렇지 않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모르긴 몰라도 그 믿음이란 '흑산' 너머의 세상에 대한 믿음이 아니었을까요? '흑산' 너머의 세상은 분명...가중될 착취가 무서워 싹을 틔우는 소나무를 밟아 죽여야 하는 세상, 조기 몇마리를 감췄다고 수중 감옥에 갇혀야 하는 세상, 사는 것이 버거워 차라리 바다에서 죽은자가 되어 고향을 등져야 하는 세상은 아닐 것이라는 믿음 말입니다.

무수한 정약전들을 기록하다

그렇다고 김훈이 '흑산'에 남은 자를 어리석다고 비난하려는 것은 아니었을 겁니다. 결국 김훈이 잊지않고 남기고 싶은 것은, 그렇게 끝내 기록하고 싶은 이들은 '흑산'을 떠나지 못한 이들입니다. '흑산'을 '흑산'으로 만든, '흑산'을 유지하려는 자들도 결국엔 '흑산'을 떠납니다. '흑산'을 못 견뎌 '흑산' 너머의 세상을 꿈꾼 이들도 죽음일지언정 '흑산'을 등집니다. 그러니 이제 남은 이들은 폐허가 된 '흑산'을 떠나지 못한 이들 뿐입니다.

놀랍지만, 또한 당연하게도 이들의 수가 가장 많습니다. 이들은 어떤 이유에서든 이곳, '흑산'을 떠나지 못했으니 이곳, '흑산'에서 살아야 합니다. 산다는 것은 죽을 수 없다는 것이고, 죽을 수 없다는 건 견뎌야 한다는 뜻입니다. 김훈이 결국 기록하고 싶었던 건, 그렇게 견뎌야 하는 무수한 정약전들이 아니었을까요? 수많은 물고기들을 기록하는 정약전의 마음으로 김훈은 '흑산'을 써낸 것이 아닐까요?

죽지 않고, 살아서, 견뎌내며, 꾸역 꾸역...그렇게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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