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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울물 소리
황석영 지음 / 자음과모음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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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울물 소리 / 황석영 / 자음과 모음 (2012)


전주, 한옥마을에 와 있습니다. 이 리뷰를 쓰기 위해 온 것은 물론 아니구요. 일보러 왔다가 잠시 짬이 나 오랜만에 경기전, 풍납문, 향교 등 전주 시내 곳곳을 돌아보다 이름모를 찻집에 앉아 잠시 다리를 쉬는 중이지요. 전주가 <여울물 소리>의 주무대는 아니지만 여주인공이자 화자인 연옥의 고향과 마찬가지인 곳이지요. 그리고 진짜 주무대인 강경은 물론 여러 차례 언급되는 삼례나 고부와도 사실상 하나의 생활권인 곳이기도 하구요. 그렇다보니 소설 속의 실제 공간이 남아있을 리 만무이건만, 이곳에 와 있으려니 벌써 읽은 지 제법 되었지만 차일피일 리뷰를 미루던 <여울물 소리>가 자연스레 떠오르네요.

연옥은 재취 자리로 시집을 갔다가 이곳 전주성 내 어딘가로 다시 나와 색주가를 차린 어미 구례댁을 돕다가 평생의 운명인 이신통을 바로 이곳 전주에서 만나게 되었지요. 물론 자신도 어미와 같은 팔자로 재취 자리로 팔려가듯 시집을 가 잠시 그 인연의 끈은 끊기게 되긴 합니다만, 전주에서의 인연으로 이 두 사람은 장차 부부의 연을 맺기에 이르게 되었던 것일 터 입니다.

마음 같아서는 강경나루, 지금은 충남 논산에 속한 그곳에 가서 그곳 또 어딘가에 있었을...구례댁과 연옥이 전주의 색주가를 정리하고 차린 객주집을 찾아보고 싶어지네요. 이곳 전주에서 넉넉히 한시간이면 갈 수 있는 곳이고, 이곳으로 내려오다가 강경을 스치듯 지나온 터라 그러한 마음이 더욱 간절해집니다. 연옥이 신통을 찾으러 방방곡곡을 돌아다녔던 것처럼 저 역시 그 두사람의 자취를 따라 마음껏 돌아다녀 보고 싶지만...아쉽게도 이쯤에서 그저 상상해보는 것만으로 만족해야겠습니다.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구수한 전북 사투리를 듣고 있으려니 굳이 가고 싶은 곳을 가지 않아도 이야기 속 그들을 만난 듯 하니까요. 이곳 특유의 남자가 자신의 아내를 부르는 '각시'라는 명칭이 어찌나 살가운지...연옥은 그렇게나 그리고 그리는 신통에게 단 한번도 그렇게 살갑게 불리어지지 못했을거라는 생각이 들어 더더욱 애잔한 마음이 밀려듭니다.   


<여울물 소리>는 이처럼 연옥이 운명처럼 맺어진 자신과의 인연을 뒤로하고 자신의 뜻을 펼치기 위해 집을 나선 신통의 자취를 찾아다니는 이야기입니다. 일제시대로 치면 변사였고, 요즘으로 치면 배우이자 MC였던 이야기꾼인 신통이 단순이 단순히 남의 이야기를 들려주며 백성들과 울고 웃는데서 그치지 않고, 민초들의 고단한 삶을 위무하고 더 나아가서는 민초들이 주인공이 되는 '천지개벽된 세상'이라는 진짜 살아있는 이야기를 만들기 위해 떨치고 일어나게 되는 일련의 과정을 우리는 또다른 이야기꾼인, 연옥을 통해 듣게 되는 것이지요. 이는 한편으로는 한 여인의 님을 향한 절절한 사랑이야기이면서, 또 한편으로는 기록되지 못한 역사의 현현입니다. 

벽같은 세상에서 도망쳐 이야기 뒤로 숨은 전기수, 신통이 하찮은 이야기로 세상을 바꾸는 것이 가능한가, 라는 일생일대의 질문에 맞닥뜨리고... 그에 대한 답으로 결국 우리네 힘없는 모든 민초들, 그 사람 하나하나가 바로 소중한 이야기이며, 그들 모두가 주인공인 이야기를 만들기 위한 노력으로 역사의 한복판에 서는 이야기. 그런 신통의 자취를 쫓으며 비로소 그런 신통을 이해하고 존경하고 따르며 자신의 자리에서 자신의 삶을 꿋꿋하게 지키며 기꺼이 자신의 운명을 온몸으로 맞닥뜨리는 강인하고 용감한 여인네의 사랑을 보여주는 연옥이 신통이 못다 이룬 꿈을 기록하고 기억하는 이야기. 이것이 바로 <여울물 소리>인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여울물 소리>는 그 구성이며 문체며 리듬이 참으로 구성지고, 참으로 절창입니다. 그러니 작가는 바로 <여울물 소리> 자체만으로 우리네 이야기의 역사를 욕심내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싶어집니다. 즉, 이렇게 우리네 바로 곁에 쭈그려 앉아, 우리의 눈을 지긋이 응시하며, 그 누구도 아닌 바로 자신의 이야기를 때론 어깨춤이 절로 날 정도로 신명나게 그리고 때론 가슴이 미어지도록 절절하게...그리고 시종일관 참으로 맛깔나게 들려주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가 이야기를 소비하는 방식이었고 그 전통이 수많은 억압과 왜곡의 역사 속에서도 살아남아 입으로 입으로 전해져 현재에 까지 이른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러니 남은 몫은 현재를 사는 우리들이 이 살아숨쉬는 이야기가 죽어 사라지기 전에 기록하고 기억해 미래를 살아갈 우리들에게 그들이 이해하고 그들이 즐길 수 있는 방식으로... 현재의 구성짐과 현재의 맛깔남으로 들려주는 것이 아닐는지요. 그렇게 이야기꾼의 숙명은 대를 이어 계속되고, 그렇게 우리 이야기의 역사는 유구한 것이라고, 작가는, 연옥은, 신통은 말하고 있습니다. 죽어서도 살아서. 이야기로 살아서. 영원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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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템테이션]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eBook] 템테이션
더글라스 케네디 지음, 조동섭 옮김 / 밝은세상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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템테이션 / 더글라스 케네디 / 밝은세상 (2012)


비록 <빅픽처> 한 작품 밖에 읽지 않았지만 <템테이션>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전형적인 더글라스 케네디의 작품이라 할만 합니다. 너무 극적이다 싶을 정도로 동시다발적으로 한꺼번에 휘몰아치는 격랑의 한복판에 선 주인공이 그 험한 파도를 헤치고 인생의 주인공으로 우뚝서는 이야기. 


이번에도 변함 없고 유감 없더군요. 


아니 오히려 주인공이 속한 세계, 주인공이 겪는 일들의 스케일은 더욱 더 커졌고 다행히도 그 스케일에 걸맞게 개연성과 현실성도 조금 더 설득력 있는 느낌입니다. 여전히 과하다는 느낌이 드는 설정들이 보이고 주인공의 연이은 성공과 실패가 조금 비현실적인 느낌이 드는 것은 여전하지만 대중적 재미를 목적으로 한 허구의 이야기에서 이 정도의 과함은 단점이라기보다는 미덕에 가까울 터 입니다. 


이처럼 한 권 분량의 이야기에 많은 것을 압축해 우겨넣다보니 숨조차 쉴 시간 없이 엄청난 속도의 롤러코스터를 타는 기분이지만,  주인공을 둘러싼...할리우드로 대표되는 <템테이션>속 영화, 방송계의 모습은 대단히 사실적입니다. 이름을 얻고 인정받기 전까지 철저한 무명생활에 이어지고 도저히 생계를 이을 수 없어 아르바이트를 전전해야 하는 주인공의 모습이나 갑작스러운 성공으로 이름을 얻은 후 '조강지처'를 버리고 방탕한 생활에 빠지는 모습, 그리고 그러한 주인공의 성공을 시기하는 평범한 이들에 의해 사소한 잘못과 실수가 부풀려지며 몰락 직전까지 가는 상황까지. 한 사람에게 한꺼번에 몰아쳐서 그렇지, 개별적으로 생각해보면 충분히 일어날 법한 일들이고 사람들 사이에서 이미 흔하게 벌어지고 있는 일들입니다.     


더글라스 케네디는 우리가 즐겨보는, 흔히 예술이라 생각하는 영화나 드라마도 철저히 산업의 논리 자본의 논리에 의해 움직이며 이를 만들어내는 감독 배우 스태프, 그리고 우리의 주인공 같은 작가들 역시 그러한 자본에 귀속된 부속품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주인공 데이비드 아미티지를 통해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본의 힘은 한 개인의 명성과 명예는 물론 타고난 재능과 능력까지 마음대로 조작할 수 있을 정도로 막강합니다. 주인공은 그렇게 보이지 않는 힘에 휘둘리며 자신이 왜 이렇게까지 힘들고 부당한 처지로 내몰려야 하는지도 모른 채 인생의 바닥까지 내몰리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나 작가는 이쯤에서 이야기를 끝내지 않습니다. 주인공의 사소하지만 연속된, 그리고 분명히 본인 스스로의 잘못이라 할만한 실수들을 연이어 배치하며 인간이라면 가질 수 밖에 없는 속물근성과 탐욕이 바로 몰락의 원인은 아닌지 또 한번 질문을 던지는 것입니다. 어쩌면 이것이 바로 <빅픽처>부터 이어진 일관된 작가의 화두일 터인데...이 역시 철저히 자본주의적 관점에서 바라보는 인간본성에 대한 해석이라는 점에서 솔직히 앞서 말씀드린 이야기 전개와 다르다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즉, 더글라스 케네디는 자신의 작품을 통해 특별히 자본주의를 비판하거나 우리 인간이 어느새 잃어버리고 사는 겸손함, 의리, 우정, 그리고 사랑 같은 선한 본성의 소중함 따위를 이야기하려는 것이 아닐지도 모르겠습니다. 그게 무슨 말이냐구요? 작가는 자신의 작품들을 통해 자본주의의 실체와 허상에 대해 통렬하게 파헤치고 인간 본성의 선함이 바로 그러한 왜곡되고 잘못된 세계를 바로잡을 힘이라고 말하고 있는 거 아니냐구요? 


글쎄요. 저는 이번 작품도 그렇고 <빅픽처>에서도 그렇고 조금은 김이 빠진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급작스럽고 흐리멍텅한 엔딩을 보면서 어쩌면 작가 역시 철저히 자본의 논리에 맞춰서 이러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라는 의구심이 들었습니다. 이도 저도 아닌, 특별한 의미부여를 일부러 방해하는 듯한 결말...즉, 그저 재미로 보고 재미로 읽는 대중소설로 소비되기를 바라는 게 아닌가 싶었던 겁니다. 조금만 더 나아가면 지금껏 잘 쌓아올린 것들을 한번에 뒤집는 통렬한 엔딩...그로 인한 세상에 대한 시원스러운 외침이 가능할 듯 한데...이를 마다하고 그저 시간 가는 줄 모를 정도로 잘 읽히는 한 남자의 인생유전 정도로 그치고 마는 이유. 과연 무엇일까요? 물론 작가의 내공과 능력이 딱 여기까지일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폄하하기에는 이 작가가 여태껏 쌓아올린 공력이 만만치 않아 보이는 것 또한 사실입니다. 그러니 헷갈릴 밖에요. 혹시 이마저도 자본주의와 이에 길들여진 우리 인간의 탐욕스러운 본성을 풍자하려는 의도인 것일까요? 의미를 찾으려해도 찾을 수 없을거야. 이따위 소설을 시간내서 읽고있다는 것 자체가 니들이 위선덩어리 속물덩어리라는 증거야. 뭐 그런 냉소 말입니다. 에구 고작 두 편을 읽고 더 이상 이야기하는 것은 아무래도 무리가 있을 듯 합니다. 서둘러 그의 다른 작품들을 읽어봐야겠습니다. 그래야 그에 대해서도 그의 작품에 대해서도 조금 더 선명하게 알 수 있을테지요. 속물인지. 속물을 흉내내고 있는 것인지. 그도 아니면 속물을 흉내내는 척 하는 진짜 속물 그 자체인지. 물론,


그러한 구분 자체가 무의미할 정도로...우리는 이미 그러한 세상 속에서 그렇게 살고 있긴 합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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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
김연수 지음 / 자음과모음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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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 / 김연수 / 자음과 모음


김연수.


이 이름이 상징하는 바 혹은 의미하는 바를 무엇에 비유할 수 있을지 잠시 생각해 봅니다. 한국문단의 봉준호? 아니면 한국의 조너선 사프란 모어? 뭐 어떤 것이든 딱이다 싶지는 않네요. 봉준호는 봉준호고 조너선은 조너선이고 김연수는 김연수일테니까요. 그러나 한가지는 분명합니다. 한국소설에서 김연수라는 이름이 이제는 하나의 브랜드가 되었다는 사실 말입니다. 김연수는  잘 나가는 작가 이상의, 한국문단의 젊음 혹은 한국문단의 새로움을 상징하는 이름인 것이지요. 브랜드가 될 정도로 이름을 알렸는데도 여전히 새로움으로 기억된다는 것 또한 참으로 특이한 경우라 할 수 있습니다. 김연수가 이제 결코 적지 않은 나이임에도 그가 낸 작품의 수 역시 적지 않음에도 김연수라는 이름은 여전히 그렇게 신선하게 다가옵니다.


그러나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그는 항시 새롭지만 새로움을 위한 새로움을 추구하진 않습니다. 그는 자신이 문학을 하고 있다, 는 정체성을 결코 잃지 않으면서도 그 안에서 충분히 새로울 수 있다는 걸 증명해 왔습니다. 그 새로움의 형태는 때로는 형식으로 때로는 내용으로 때로는 문장으로 표면화 되었지만, 그 형태가 무엇이든 그의 작품은 탄탄한 서사와 살아있는 캐릭터...즉 이야기 본연의 재미와 완성도를 결코 잃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렇기에 그의 소설은 새로우면서도 어렵거나 지루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김연수의 신작이 당도했습니다.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이라는 제목입니다. 역시나 김연수 다운 제목. 호기심을 자극하는, 지극히 시적인. 이번에는 어떨까? 얼마나 새로우면서 또 얼마나 재미있을까... 설레이는 마음으로 책을 열었습니다. 언제나 그렇듯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역시 그는 실망시키지 않았습니다. 분명 김연수의 소설이었지만, 지금까지 본 적이 없는 김연수의 소설이었습니다.


입양아를 다룬 이야기. 21세기의 디아스포라. 드디어 김연수가 현재를 이야기하면서 역사를 보듬으려 하는구나, 싶었습니다. 과거이거나 현재이거나가 아닌, 과거이면서 현재, 현재이면서 과거, 그 단절될 수 없는 아픈 이어짐을 이야기하려 하는구나, 지레짐작했습니다. 그리고 미국에 살던 입양아가 한국으로 자신의 엄마를 찾아온다고 했을 때는 시간적인 넘나듬을 넘어 공간적으로도 지역과 세계를 함께 아우르려하는구나 싶었습니다. 나는 지역에 살고 있지만, 결국 세상의 모든 사람은 다 '지역'에 살고 있고 그 지역들이 모여 세계가 되며 중심이란 그렇게 내가 지금 딛고 있는 이 땅, 이 곳이라는 것을...김연수가 드디어 말하려 하는 모양이라 생각했습니다.


저의 이러한 기대는 물론 어김없이 맞아 떨어졌습니다. 그는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고 우리도 드디어 진정한 의미에서의 '보편성을 갖춘 이야기', 혹은 '역사를 아우르는 이야기'를 가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끝이 아니더군요. 김연수는 카밀라에서 시작해서 희재(그녀의 한국이름)으로 끝내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그의 생모인 지은으로 끝낸 것도 아닙니다. 분명 카밀라에서 지은으로 나아가지만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카밀라도 지은도 아니었습니다. 죽은 지은이 카밀라를 너라고 부르며 화자로 등장하기 까지 하지만, 그 신선한 혼란스러움에 잠시 머릿속이 멍해졌지만...이러한 형식적 새로움은 그저 김연수가 김연수임을 보여주는 작은 디테일일 뿐입니다. 


놀랍게도, 라고 밖에 할 수 없을 만큼... 김연수는 끝내 우리가 살아낸 지난 반세기의 이 땅의 한 귀퉁이를 가져다 놓는데 성공해버렸습니다. 조금 과욕이라는 생각이 들고, 통째로가 아닌 한 귀퉁이를 보여주는데 그치고 말지만 김연수이기에 이러한 시도가 가능한 것이라는 생각이 새삼 들었습니다. 뭐랄까요. <밤은 노래한다>를 읽었을 때와 비슷한 기분이었습니다. <밤은 노래한다>를 읽었을 때는...그 엄청난, 너무 엄청나서 아무도 해내지 못한 이야기를, 아직은 버거운 걸 알면서도, 지금이 아니면 할 수 없기에 용감하게 도전했던. 그렇기에 완성도가 조금은 떨어지고 전체적으로 어수선함이 남아있을 수 밖에 없었음에도...그럼에도 참 좋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더랬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때보다 훨씬 여유로웠고, 무엇을 어떻게 이야기해야 할 지 정확히 알고 있는 느낌이었습니다. 훨씬 매끄럽고 훨씬 능수능란했습니다. 당연하게도 그간의 세월과 경험의 값일 터입니다. 그렇기에 <밤은 노래한다>와 이번 소설을 비교하는 건 아무런 의미가 없을텐데도 자꾸만 그 소설이 떠오르는 건...아무래도 김연수가 이번 소설 역시 그때 그러한 기분으로 쓰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지금이 아니면 할 수 없겠다는. 좀 더 무르익어도 좋겠지만, 그때가 되면 지금 이 나이에 쓸 수 있는 이야기와는 다른 이야기가 될 수 있기에, 일단 지금의 최선을 다해 내가 할 수 있는 이야기를 해보자는...뭐 그런.

 

어쩌면 이러한 마음가짐 때문에 김연수가 '공부하는 작가'라는 타이틀을 얻은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마음가짐 때문에 김연수는 항시 새로울 수 있는 것이라는 생각 또한 들었습니다. 조금 덜 여물었지만, 바로 지금이라는 생각이 들었을 때...부족한 부분을 공부하고 노력해서 채워내면서라도 써내고야 마는. 그렇게 10년이 지나서 돌아봤을 때...지금 쓰면 더 잘 쓸 수는 있을지 몰라도 그때처럼 모든 걸 걸고 써낼 순 없으리라는 생각이 드는. 그런 소설. 그런 소설을 쓰는 작가.  


그런 김연수가 세상의 끝에서 세상의 모든 지은, 세상의 모든 카밀라에게 말을 건다. 

그런 김연수가 시간의 끝에서 과거의 모든 지은, 미래의 모든 카밀라에게 손을 내민다.


그리고 말한다.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 너를 생각하는 것은 나의 일이었다, 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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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딩드레스
피에르 르메트르 지음, 임호경 옮김 / 다산책방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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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남자의 웨딩드레스 / 피에르 르메트르  / 다산책방 (2012)

 

박찬욱 감독이 떠올랐습니다. 마음만 먹으면 <JSA>같은 대중영화를 찍을 수도 있고, <올드보이>처럼 강렬하면서도 대중과의 접점을 놓치지 않느 영화로 완성해내기도 하고, <복수는 나의 것>처럼 어떠한 것과도 타협하지 않은 채 자신의 취향과 주제의식을 끝까지 밀어붙일 줄도 아는...그 박찬욱 말입니다.

 

단순 비교나 직접적으로 대입을 하기에는 조금 억지스럽지만, 피에르 르메트르의 두 작품 <알렉스>와 <그 남자의 웨딩드레스>를 연이어 읽고나니 어쩔 수 없이 그가 떠오르더라구요. 물론 <알렉스>가 <올드보이>이고 <그 남자의 웨딩드레스>가 <복수는 나의 것>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박찬욱의 작품들이 장르와 예술 사이를 자유롭게 오가며 일견 전혀 다른 작품들처럼 보이지만, 결국은 어쩔 수 없이 박찬욱의 인장이 새겨진 그만의 작품이듯이 르메트르의 두 작품 역시 그러했습니다. 장르도 풀어가는 방식도 달라보이지만, 가해자와 피해자가 역전되며 주인공의 실체와 정체성이 밝혀지는 이야기라는 점에서, 그 주인공이 여인이며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혹은 자신의 잘못이 아님에도 남성(혹은 남성들)에게 수난을 당하고 이에 대한 개인적인 복수에 나선다는 점에서 결국 르메트르의 작품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만 <알렉스>가 베르호벤이라는 경감을 또다른 주인공이자 화자로 내세워 알렉스의 궤적을 쫓고 그녀의 비밀을 파헤치는 형식을 취함으로써 좀 더 대중들에게 쉽게 다가설 수 있는 작품임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아무려나 알렉스는 연쇄살인범이고, 베르호벤은 그녀를 쫓는 '탐정'인 것이니까요. 저같은 독자들은 베르호벤을 따르며 그의 입장에서 함께 추리하고 알렉스의 비밀을 알아가며 그녀에 대한 (호기심, 분노, 동정, 이해 같은) 복합적인 감정을 차례로 분출하면 되는 겁니다.

 

그에 비해 <그 남자의 웨딩드레스>의 문학성은 조금 더 두드러집니다. 사실 이 소설을 장르문학 혹은 추리소설의 한 줄기로 보는 것이 과연 타당한 것인지조차 심도깊게 논의해봐야 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소피와 프란츠라는 두 인물의 관점에서 전개되는 이 이야기는 사건을 끌어가는 화자나 이 두 인물을 추적하고 파헤치는 관찰자가 따로 없습니다. 인물들의 내밀한 심리는 두 주인공의 진술과 독백을 통해 가감없이 드러나고, 사건의 개요와 전개 또한 두 주인공이 전적으로 이끌어 갑니다. 두번째 챕터에서 밝혀지는 충격적인 사건의 전모와 주인공들 사이의 비밀 또한 제3의 인물을 통해 밝혀지는 것이 아닌 주인공들의 입을 통해 우리는 일방적으로 통보받을 뿐입니다. 이러한 형식과 전개는 흔한 대중 추리소설의 흐름에서 확실히 벗어나 있는 것이며, 이 낯설음 때문에 저같은 독자들은 이 소설을 어찌 읽어내야 할지 당황스러워지게 되는 것이지요.

 

그러나 놀랍게도, 이러한 낯설음 때문에 이 소설이 낯설어지는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 남자의 웨딩드레스>는 여느 추리소설들보다 잘 읽히며, 그 끝이 궁금해 손에서 책을 놓지 못한 채 밤을 지새우게 되는 소설입니다. 이 소설이 더욱 놀라운 것은 그 궁금증의 정체가 소피의 정체성에 관련된 점이라는 것입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자신의 인생이 조정당하는 것도 모자라 자신의 내면조차 갈기갈기 찣겨진 채 너무나 사랑하던 자신을 부정하게 된 주인공이 진정한 자신을 찾기 위해 분투하는 이야기. 스스로가 가해자이며 피해자이고, 스스로가 범인이자 탐정인 기묘한 이야기. 이것이 바로 이 소설이 문학적이면서도 지극히 장르적인 이유이며, 낯선 듯 하면서도 친근하게 다가오는 이유가 아닐까요?  

 

후반부에 일어나는 또 한번의 반전 덕분에 이러한 장르성은 더욱 더 두드러져 보이며, 그 덕분에 결국 이 작품의 정체성은 확고해집니다. 그럼에도 끝까지 작가는 일말의 모호함을 남기며 소피와 프란츠 중 누가 진짜 피해자이고 가해자인지 마지막 판단을 내려주지 않습니다. 이 역시 지극히 장르적인 결말인 동시에 너무나 문학적인 결말이니...우리는 끝내 이 작품의 정체가 무엇인지 고민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지요. 이처럼 <그 남자의 웨딩드레스>는 여느 작품들처럼 장르에 대한 규정이나 캐릭터와 플롯에 대한 분석이 그다지 큰 의미가 없는, 소피와 프란츠라는 두 인물의 얽히고 설킨 기막힌 인생 자체에 대해 생각케 하는 소설입니다. 아주 단순하지만 쉽게 대답할 수 없는 질문만을 남기는 것이지요. 내가 프란츠라면? 혹은 내가 소피라면? 이라는. 그러한 질문을 통해 우리는 스스로의 인생을 돌아보고, 스스로가 누구인지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고 고민해보게 되는 것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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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바이 동물원]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굿바이 동물원 - 제17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
강태식 지음 / 한겨레출판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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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바이 동물원 / 강태식 / 한겨레출판 (2012)

 

웹툰을 그리 즐겨보진 않지만 어쩌다보니 챙겨보게 됐던, <해치지 않아>라는 웹툰이 있습니다. <은밀하게 위대하게>로 유명한 hun이라는 작가의 최근작인데 오늘 이야기할 <굿바이 동물원>을 처음 접하는 순간, 이 웹툰이 어쩔 수 없이 떠올랐습니다. 결론부터 미리 말씀드리면, 이 두 작품은 전혀 다른 이야기입니다.

 

그럼에도 <굿바이 동물원>의 소개글을 읽었을 때는 '어? <해치지 않아>랑 비슷한데?' 라는 생각이 들 수 밖에 없었습니다. 동물원이라는 배경, 동물의 탈을 쓴 인간들이 동물 행세를 하며 관람객들을 유혹한다는 설정, 사회에 적응하지 못한 루저들이 동물인간 혹은 인간동물이 되어 이 동물원으로 모여든다는 컨셉까지. 어떠세요? 이렇게만 이야기하니 정말 비슷해 보이지 않나요? 

 

그러나 다행히도 이 두 작품이 같은 지점은 여기까지였습니다. 매체가 다른 만큼 그 기획시기를 떠나 두 작품의 작가들이 서로의 작품을 참고하거나 의식했을 가능성 또한 없어 보입니다. 그러니 이러한 공통점은 어디까지나 우연의 일치인 듯 합니다. 신기하게도 비슷한 시기에 비슷한 생각을 했던 것일테지요. <굿바이 동물원>을 읽으며 저는 이러한 짐작을 점차 확신으로 바꿀 수 있었습니다. 말씀드린 웹툰과는 풀어내는 방식이 너무나도 달랐기 때문입니다.

 

간단하게 말씀드리자면, <굿바이 동물원>은 리얼리티에서 출발하지만, 결코 리얼리티에 기반하고 있지 않으며 최종적으로는 리얼리티로부터 자유하는 작품이었습니다. 현실을 이야기하지만, 그 현실을 이야기하는 방식은 전혀 현실적이지 않았고 결국에는 바로 그렇기에 훨씬 더 현실적일 수 있었던 이야기였습니다. 간단하게 말씀드린다고 해놓고, 말이 어렵네요. 진짜를 이야기하기 위해 가짜를 선택한다. 진실을 드러내기 위해 사실을 무시한다. 이것도 영 모호하군요. 어쩔 수 없네요. 그냥 현실을 에둘러 이야기하는 우화라고 해두자구요.

 

인간이 동물의 탈을 쓰고 철창 안으로 들어가 동물 노릇을 한다. 당연히 가능하다고 생각하지만, 진짜 동물은 절대 지을 수 없는 표정을 짓고, 절대 해낼 수 없는 묘기를 부리는 인간동물. 그렇게 동물원은 돈을 벌고, 동물노릇을 하는 인간도 돈을 법니다. 이 정도로 터무니없는 설정이면 자연스레 우리는 이러한 '뻥을 친' 작가가 어떻게 그럴듯한 개연성으로 수습해낼 것인지 기대하게 되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굿바이 동물원>의 작가는 그러한 논리적 설명 따위에는 별 관심이 없습니다. 어떻게 동물의 미세한 신경과 조직을 조정해 진짜 동물과 구별할 수 없을 정도로 자연스럽게 표정을 지고 몸을 움직이는지...이 책을 끝까지 다 읽어도 우리는 결코 이해할 수 없습니다. 각박하고 고단한 동물원의 삶을 못 이겨 아프리카로 날아간 인간동물이 사파리에서 다른 진짜동물들과 섞여 진정한 자유를 누린다는 후반부의 설정도 황당하긴 마찬가지지만, 이러한 일이 어떻게 가능한 지에 대한 설명은 단 한줄도 쓰여있지 않습니다.

 

이쯤에서 저는 새삼스럽게도 지금 읽고 있는 것이 소설이라는 걸 깨닫습니다. 그랬습니다. 저는 어느땐가부터 소설은 현실을 반영하지만 결코 현실에 얽매일 필요는 없다는 당연한 원칙을 까맣게 잊고 있었던 것입니다. 개연성이란 이야기 안에서의 완결성을 뜻하는 것이지, 실재하는 사실관계의 과학적 증명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 또한 어느 순간부터 망각하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영화나 드라마 같은 영상 이야기 매체 혹은 같은 소설이라도 범죄소설이나 추리소설 같은 장르소설에 익숙해져 있다보니 이야기의 문법 자체를 저도 모르게 너무나 제한적으로 이해하고 적용했던 것은 아닌지. 그렇게 최소한의 상상력도 발휘하지 못한 채 정형화된 이야기 문법 안에 갇혔있었던 것은 아닌지.

 

<굿바이 동물원>을 읽는 내내 저는 이러한 반성 아닌 반성을 하고, 깨달음 아닌 깨달음을 얻으며 이야기의 본질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야기를 좋아한다 해놓고, 정작 '진짜 이야기'를 만나니 이걸 어찌 읽어내야 할지 몰라 망설이고 당황했던 것이지요. 중요한 것은 동물탈을 쓴 인간을 어찌 몰라볼 수 있느냐가 아니고 인간이 동물탈을 쓰고 동물행세를 하면서 살 수 밖에 없는 이유라는 걸...전자가 이해되지 않아도 후자가 이해된다면 그게 바로 이야기라는 것을...깨닫게 해준 소설...<굿바이 동물원>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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