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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호 측 증인
고이즈미 기미코 지음, 권영주 옮김 / 검은숲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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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호측 증인 / 고이즈미 기미코 / 검은숲 (2011)

 

그렇고

'변호측 증인'은 전형적인 신데렐라 스토리를 기반으로 한 이야기입니다. 가난하고 보잘것 없는 밤무대 댄서가 재벌가의 외동아들이라는 백마 탄 왕자님을 만나 사랑에 빠져 행복하게 잘 산다. 어떻습니까? 상투적이다 못해 식상하기 까지 하지 않습니까? 이미 수많은 소설, 영화에서 지겹도록 반복되었던 설정이며 심지어 우리나라 텔레비전 드라마에서는 아직도 쌩쌩한 현역으로 각광받고 있는 설정입니다.

주인공인 미미의 캐릭터 또한 얼핏 보기에는 우리가 흔히 보아온 신데렐라, 혹은 캔디 캐릭터에 충실해 보입니다. 미미는 가난하고, 소심하고, 여리지만...이 모든 단점을 단번에 뒤엎을 만큼 예쁘고 매력이 넘치거든요. 게다가 거짓과 위선으로 가득한 세상과 맞서 싸울 용기까지 지녔으니...미미가 어떤 인물일까 떠올리다보면 여느 한국 드라마에서 튀어나온 낯익은 여배우의 얼굴이 연상되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그런

그럼에도 '변호측 증인'은 전형적인 신데렐라 스토리가 아닙니다. 분명 우리에게 익숙한 설정과 인물에서 시작하지만, 말그대로 그건 시작을 위한 밑바탕이 될 뿐 소설은 우리가 예상했던 것과 전혀 다른 방향으로 진행됩니다. 이는 물론 이 소설의 장르가 (영화나 드라마로 치자면) 멜로드라마나 로맨틱코미디가 아닌 미스터리 스릴러 혹은 밀실 추리극에 가깝기 때문입니다. 멜로드라마나 로맨틱 코미디에서 튀어나온 듯한 인물들이 의문의 살인사건에 휘말린다. 이러한 장르 비틀기 만으로도 충분히 흥미를 불러 일으키고 새롭다는 느낌을 줄 수 있는 것이지요.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변호측 증인'이 1963년, 즉 수십년 전에 쓰여진 소설이라는 걸 전재했을 때 이야깁니다. 현재 2011년에 이러한 소설이 나왔어도 과연 우리는 (지금까지의 설명만으로) 이 소설을 읽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될까요? 아마도 대부분의 독자들은 그렇지 않을 겁니다. 아시다시피 우리는 이야기의 홍수 속에서 살고 있으니까요. 소설 뿐 아니라 영화, 만화, 텔레비전 드라마들을 통해서 다양한 이야기를 다양한 방식으로 접하고 있으니까요.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 는 말은 바로 우리가 사는 지금을 위해 만들어진 명언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니까요. 여러 장르간의 혼합과 기존의 법칙을 깨고 비트는 시도들 또한 이미 다양한 방식으로 시도가 됐던 터라 '변호측 증인' 정도의 설정으로는 입맛 까다로운 현대 독자들의 구미를 당기기 힘들어 보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다시 그럼에도 저는 '변호측 증인'이 수십년 전에 쓰여진 소설이라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지금, 2011년에 봐도 충분히 참신하고 충분히 탁월하다고 말하려 합니다. 이쯤에서 이미 이 작품을 읽은 독자들이라면 소설의 후반부에 숨어 있는 그리 엄청나진 않지만 충분히 놀라운 반전 때문이 바로 그 이유라고 생각하실 겁니다. 물론 틀린 말은 아닙니다. 소설이라는 매체의 특성을 적극 활용한, 즉 행간 속에 교묘히 화자와 서술대상의 실체를 숨기며 예상치 못한 트릭으로 독자들을 놀래킨 작가의 재기 또한 물론 하나의 충분한 이유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는 부차적인, 이 소설이 여전히 탁월할 수 밖에 없는 가장 중요한 이유를 더욱 돋보이게 하는 극적 장치일 뿐입니다. 그만 뜸들이고 얼른 그 중요한 이유를 말씀드려야겠지요? 듣기에 따라서는 그리 대단한 이유가 아닐지도 모르니 너무 큰 기대는 하지 않으시는게 좋을 듯 합니다. 어디까지나 순전히 제 개인적인 느낌에 불과할 테니까요.

진실의 무력화. 혹은 진실 이상의 진실.

이것이 바로 제가 이 소설이 진짜로 좋다고 느끼게 된 이유입니다. 말이 조금 어렵고 모호한가요. 네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 사실 저 역시 정확히 뭐라고 딱 집어 설명하거나 정의내리긴 어려운 부분이거든요. 앞서 말씀드린 이 소설의 반전은 바로 이 진실일 것입니다. 누가 노인네를 죽였는가, 라는 이 소설의 최대 미스터리. 그 진실이 밝혀지는 순간이 바로 이 소설의 정점이자 이 소설이 이야기하고자 하는 모든 바가 드러나는 것은 당연할 터입니다.
그러나 이 소설은 대단하게도 그게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그 진실을 둘러싼 사람들의 마음, 즉 진심이라고, 작가는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진심이란 사람에 따라서 욕망일 수도 있고 질투일 수도 있고 사랑일 수도 있겠지만, 그 진심의 정체가 무엇이든...진심은 결국 진실을 넘어서는 진실이 되고 만다는 아프지만 너무나 자명한 깨달음. 이것이 바로 제가 이 소설을 인정할 수 밖에 없고, 수십년이 지난 지금에도 여전히 이 소설이 명작일 수 밖에 없는 이유인 것입니다.

 

누가 야시마 류노스케를 죽였는지, 미미의 뱃 속 아이가 누구의 씨인지, 미미가 어떤 남성편력을 갖고 있는지, 작가는 그 진실을 행간 속에서 충분히 밝히지만...이러한 진실은 소설 속 어디에서도 중요한 장치로 활용되지 못한 채 사라져 버립니다. 진실 따위는 개나 줘버리라는 듯 작가는 여러 진실들을 철저히 무시합니다. 그리고는 너무나 냉정하고 담담하게 각 인물들이 간직한 진심만을 이야기합니다. 강력한 진실이라는 벽에 비하면 한없이 보잘 것 없을 듯 하지만, 사실은 그 강력한 진실조차 뒤바꾸고 무력화시킬 수 있는...욕망이라는, 질투라는, 사랑이라는 이름의 그 가공할 진심 말입니다.

이러한 진심이라는 보편성 때문에 수십년이 지난 지금의 독자들도 이 소설에 깊이 공감하며 미미의 처지와 심정에 자신을 이입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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