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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자 잔혹극
루스 렌들 지음, 이동윤 옮김 / 북스피어 / 2011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활자 잔혹극 / 루스 렌들 / 북스피어 (2011)
'활자 잔혹극'은 추리 소설의 외피를 지녔지만, 일반적인 추리소설과는 많이 다릅니다. 범인을 밝히고 시작하는 오프닝 부터 사건을 연대기 순으로 되짚는 마치 수시일지를 보는 듯한 건조한 문체, 그리고 사건 자체보다 등장인물들의 심리묘사에 더욱 공을 들이는 작가의 서술방식까지. 읽는 내내 이 소설을 과연 추리소설이라 할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대놓고 범인을 밝히고 시작하는 뜻밖의 오프닝이 우선 눈에 띕니다. 어디 그뿐입니까. '유니스 파치먼은 읽을 줄도 쓸 줄도 몰랐기 때문에 커버데일 일가를 죽였다.' 라는 첫 문장을 보세요. 놀랍게도 이 한 문장 안에 소설의 모든 것이 담겨 있습니다. 앞으로 이야기하려고 하는 줄거리, 등장인물, 주제, 메시지까지. 일찍이 이 정도로 효율적이면서 대담한 첫 문장을 저는 본 적이 없는 듯 합니다. 이어지는 첫 챕터의 내용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치 한 권 분량의 긴 보고서의 서문 같은 이 첫 챕터는 아주 논리정연하면서도 간결하게 사견의 개요를 설명하고 이제부터 말하고자 하는 바를 예고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중요한 것은 유니스 파치먼이 커버데일 일가를 죽였다는 사실이 아닙니다. 우리는 시작부터 범인이 누구인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정작 중요한 것은 왜 죽였는가일텐데, 놀랍게도 우리는 그 이유마저 모르지 않습니다. 작가는 이미 밝혔습니다. 그것도 첫 문장에, '읽을 줄도 쓸 줄도 몰랐기 때문에'라고 매우 정확하게 써놓았습니다. 이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납득하는 것입니다. '읽을 줄도 쓸 줄도 모른다고 사람들을 죽인다고? 정말 문맹이 사람을 죽일 이유가 된단 말이야?' 이 소설은 바로 독자들의 이러한 질문에 대한 길고 긴 답변인 것입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저는 책장을 다 덮고나서도 100% 납득하진 못했습니다. 심정적으로야 그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당시 시대적 상황과 사람들의 인식수준, 그리고 그로 인한 유니스의 처지가 이해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그게 사람들을 죽일 이유가 될 수 있다는 걸 완전히 납득할 순 없었습니다. 유니스의 순탄치 않은 성장과정과 '개인적인'과 '내성적인'을 넘어서 '폐쇄적인'에 가까운 그녀의 독특한 캐릭터를 십분 이해하더라도 결국 고개가 끄덕여지진 않았습니다.
작가는 수많은 논리적인 근거들로 그녀의 범죄행위를 분석하며 그녀가 살인을 저지른 근본적인 원인이 바로 그녀가 문맹이었기 때문이라는 결론을 내기 위해 애썼지만, 결국 작가 역시 그보다 더 근본적인 이유는 그녀가 '나쁜 사람'이기 때문이라고 인정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문맹이어도 유니스가 근본적으로 착한 본성을 타고난 사람이었다면 과연 사람을 죽였을까요? 작가는 문맹이었기 때문에 그러한 본성이 감화될 기회를 얻지 못한 것이라고 강변할테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문맹이 바로 그녀가 그들을 죽인 가장 큰 이유라고 확신할 터이지만, 저 역시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이 길고 긴 '유니스에 대한 범죄 분석보고서'를 완전하게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이쯤되면 오해가 생길지도 모르겠네요. 지금 저는 이 소설이 부족하다고, 모자라다고, 좋지 않다고 비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이 소설을 너무 좋게 읽었습니다. 거의 모든 부분을 수긍했고, 작가의 견해에 고개를 끄덕였으며, 작가의 신선하면서도 날카로운 문체에 혀를 내둘렀습니다. 살인사건의 이유를 문맹이라 말하고는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부모외 친지들의 무관심 속에서 방치된 채 자라난 범인의 성장과정, 소외된 하층민들에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최소한의 기회를 제공하지 않는 불평등한 사회시스템, 못 배우고 못 가진 하층계급을 무시하고 조롱하는 지배계층의 위선과 특권의식을 아주 날카롭고 적나라하게 비판하는 작가의 노력에 저는 찬탄을 금치 못할 지경이었습니다. 가족이, 이웃이, 사회가, 조금만 그녀에게 더 관심을 기울였더라면 그녀는 글을 배울 수 있었을 것이고, 그랬다면 그녀는 당당한 사회의 일원으로써 자신의 '폐쇄적인 성격'과 '악랄한 본성'을 충분히 고칠 기회를 얻어 지금보다 훨씬 평범하고 순탄한 삶을 살게 되었을 것이라는 작가의 말에 저 역시 동의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제가 동의가 되는 것은 딱 여기까지였습니다. 저에게는 여전히 의문이 남았습니다. 그녀가 글을 읽을 줄 알았다면, 정말 그녀의 삶이 달라졌을까? 그녀는 정말 커버데일 일가를 죽이지 않았을까? 저는 소설을 읽고나서도 이 질문에 자신있게 대답할 수 없었습니다. 글을 읽고 쓴다는 것이 작가의 말대로,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큰 사회적 함의를 지니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더라도, 그렇기에 '글을 읽지 못하는 유니스'와 '글을 읽을 줄 아는 유니스'는 천지차이라 치더라도, 저는 끝내 문맹이 살인의 원인이라는 결론에 완벽하게 동의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런데 말입니다. 그럼에도 저는 이 소설이 너무나 대단하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이런 생각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저의 미심쩍음마저, 이러한 찜찜함마저 어쩌면 작가의 의도가 아니었을까? 라는 생각 말입니다. 혹시, 이러한 일말의 의구심과 끝끝내 부정하고 싶은 마음이 바로, 글을 읽을 줄 아는, 교양인으로써의 위선이며 특권의식인 건 아닐까요? 저는 저도 모르게...그녀가 글을 읽고 쓸 줄 모르기 때문이 아니라, '글을 읽고 쓸 줄 모르는 나쁜 년'이기 때문에 사람을 죽인 것이다, 라는 결론을 내리고 싶었던 겁니다. 그래야 교화라는 '사회의 순기능'이 힘을 발휘할 수 있다는, 글을 읽고 쓴다는 것이 더욱 대단한 힘을 가진다는, 마음 속 깊숙이 자리한 우쭐함...작가는 바로 이러한 우리 '문명인'들의 견고한 오만과 편견을 비판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