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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타이거
페넬로피 라이블리 지음, 김선형 옮김 / 솔출판사 / 2011년 4월
평점 :
절판


오늘은 저의 말이 조금 짧을 듯 합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 '문타이거'라는 소설에 존대는 어울리지 않을 것 같아서요.
그러니 지금부터 저는 그냥 생각나는대로...지껄이고 싶은대로 지껄여 볼 요량입니다.

마치 이 소설 속의 클라우디아처럼.

문타이거 / 소설 / 페넬로피 라이블리 / 솔 (2011)

세계의 역사를 쓰고 있다, 는 그녀의 인상적인 선언으로 시작되는 이 소설, '문타이거'. 과연 그런 거창한 무게를 감당할 만큼 대단한 소설인가, 이러한 선언을 한 클라우디아라는 여자는 정말 엄청난 여자인가, 라는 약간은 아니꼬운 마음으로 소설을 읽기 시작하는 나. 다행히 소설은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다. '대단함'에 대한 기대와 '아니꼬움'에 대한 기대를, 고루.

우선 아니꼬움에 대해 이야기하자면, 나의 아니꼬움이 괜한 냉소나 편견이 아님을 증명해주고 싶어 미치겠다는 듯 클라우디아는 시종일관 참 밥맛이 없다. 자신의 기준을 충족시키지 못하는 인간은 상대도 하지 않을 정도로 안하무인이고, 자신의 미모와 지성에 대한 자부심이 넘쳐 그 오만함은 그야말로 하늘을 찌른다. 즉 제 잘난 맛에 사는 나르시스트의 절정이자 총체, 이것이 바로 클라우디아라는 여자다.

그러나 나는 이내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클라우디가 얼마나 매력적인지, 클라우디가 늘어놓는 말들이 얼마나 적확하고 날카로운지. 그녀의 말은 전부 다는 아니지만, 대부분 맞고 나는 그 절묘함에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고 만다. 이는 결국 그녀라는 분신을 창조해낸 페넬로피 라이블리라는 여자에 대한 인정이다.

리사와 클라우디아
 
이렇게 결국 작가를 인정할 수 밖에 없는 것은 이 소설에서 적확하고 날카로운 건 클라우디아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수시로 화자를 옮겨가는 이 소설을 읽으면 읽을수록 나는 실비아와 리사라는 두 여인 또한 클라우디아 못지 않게 많은 걸 알고 있다는 걸 알게 된다. 물론 이는 전혀 다른 의미의 앎이다. 클라우디아가 증오하고 무시하고 폄하하는 두 여인의 지극한 평범한 두뇌, 감성, 안목, 취향...즉, 그렇게 그녀들의 삶. 놀랍게도 바로 그 평범하다 못해 지루한 삶을 묵묵히 살아낸 덕분에 실비아와 리사는 클라우디아가 미처 알지 못하는 많은 것을 알고 있다. 하잘 것 없는, 클라우디아의 기준으로는 아무런 의미도 없는 사소한 인생의 결들, 사랑하는 사람들을 향한 치사하지만 소중한 감정들 말이다. 우리가 아는 가짜 역사가 아닌, 그야말로 진짜 역사일지도 모르는 엄청난 것들, 말이다.

다행히 클라우디아도 나중에는 알게 된다. 죽을 때가 다 되서, 너무 늦긴 했지만 모른 채 죽는 것보단 나은 바로 그 시점에. 잘난 자신이 존재하는 이유가 바로 자신을 둘러싼 실비아와 리사 덕분이라는 것을. 자신이 그들조차 사랑했었다는 것을. 그런 밥맛 없는 자신을 그들 또한 사랑해 주었다는 것을. 그렇기에 죽어가는 자신의 곁을 끝까지 지키는 것이 바로 실비아와 리사라는 것을. 그럼에도 클라우디아는 미안하다고, 말하지 않는다. 회한에 잠겨 자신의 삶을 후회하지 않는다. 너무나 클라우디아 답게.

아니, 이건 틀렸다. 클라우디아는 자신의 딸, 리사에게는 결국 그런 속마음을 드러내고 사과의 인사를 건넨다.

"미안하다, 얘야."
클라우디아가 말한다.
"뭐가 미안해요?"
리사가 조심스럽게 묻는다.
"내가 그렇게 미숙한 엄마였다는 게 미안하구나."
"아."
리사는 어찌 대답해야 할지 몰라 헤맨다.
"뭐.....난 꼭 그렇다고 말하기가......클라우디아는 그러니까......뭐, 그냥 원래부터 그런 분이시잖아요."
"우리 모두 그렇지."
클라우디아가 말한다.
"그건 각자 극복해야 하는 거야. 관습적인 기준에서 나는 엄마 노릇을 엉망으로 했잖니. 그래서 사과하는 거야. 그런다고 뭐 지금 와서 크게 소용 있을 것 같진 않지만, 공식적으로 말해두고 싶구나."
"고마워요."
마침내 리사가 말한다. 그녀는 이 말이 얼마나 큰 의미를 지니는지 자신이 모른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차라리 클라우디아가 그런 말을 하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거라고 생각한다. 이젠 그 말이 머무를 테니까. 영원히 그 자리에 남아 머무르면서 만사를 복잡하게 만들 테니까.


고든과 클리우디아

클라우디아 곁에는 남자들이 참 많다. 누구나 한번쯤 뒤돌아보게 만드는 눈부신 외모에 누구와 상대하더라도 꿀리지 않을 지성까지 겸비했으니 당연한 일이리라. 그러나 또한 당연하게도 그녀는 누구도 사랑하지 않는다. 누구든 자신을 사랑하게 만들지만 정작 자신은 마음을 열지 않는 것이다. 그럼에도 그녀는 남들처럼 남자 없인 살 수 없다. 자신을 빛내 줄,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켜 줄, 거울같은 상대가 필요한 것이다.

고든과 제스퍼, 그리고 라슬로. 이러한 거울로써의 상대는 처음에는 재스퍼였다가 뒤에 가서는 라슬로처럼 보인다. 딸 리사의 아빠이자 평생동안 애인의 지위를 놓지 않은 재스퍼. 성욕을 비롯한 세속적 욕망을 충족시켜주는 상대 제스퍼. 그러므로 클라우디아의 속물 근성을 가감없이 비춰주는 거울, 제스퍼.
그에 비해 갑자기 튀어나와 클라우디아의 후반 생을 빛내준 라슬로는 또 다른 의미의 훌륭한 거울이다. 처음에는 위선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결국에는 그녀의 신념과 인류애가 진심이었음을 증명해주는 인물, 라슬로. 친딸인 리사보다 오히려 친자식 같은, 그렇게 클라우디아가 아끼고 클라우디아를 아낀 라슬로. 그러나 이 두 사람은 클라우디아를 온전히, 끝까지 비추는 거울이 되지 못한다.

클라우디아를 비춘 진짜 거울은 오직 친오빠인 고든 뿐이다. 최초의 성욕의 상대, 유일하게 말이 통하는 상대, 마주하고 있으면 자기 자신을 보는 듯한 착각이 드는 상대. 클라우디아는 그가 자신의 분신임을 인정한다. 남매 이상의 정을 느낀 상대임을 인정한다. 고든의 아내이자 클라우디아의 올케인 실비아가 질투심에 치를 떨 만큼. 평생동안 애인의 지위를 놓지 않았던 재스퍼도 진저리를 낼 만큼, 두 사람은 서로에게 각별하다. 그러므로 죽을 날을 앞둔 고든에게 언제나처럼 목소리를 높여 대들며, 오직 클라우디아와 고든만이 아는 방식으로 클라우디아는 사랑을 고백하는 것이다.

"쓰레기 같은 소리!"
클라우디아가 말한다. 이만하면 충분히 격렬하게 들린다. 꼭 진심인 것처럼 들리다시피 하니까. 눈길이 고든의 시선과 마주쳤을 때, 그녀는 고든이 속지 않았다는 걸 눈치챈다. 하지만 그는 말을 계속하고 그녀도 계속 얘기하면서 말허리를 뚝뚝 끊어먹는데, 사실은 지금 하고 있는 이야기 아래로 그들은 서로에게 전혀 다른 말을 전하고 있다.
사랑해, 라고 그녀는 생각한다. 늘 사랑했어. 그 누구를 사랑했던 것보다 더, 딱 한 사람만 빼고. 그 단어는 너무 심하게 잡아늘였어, 그 말 하나에 그렇게 많은 다른 것들을 표현하라고 할 수는 없는 거잖아. 자식에 대한 사랑, 친구들에 대한 사랑, 신에 대한 사랑, 육체적 사랑과 물욕과 성자 같은 사랑, 나는 오빠한테 말할 필요 없지, 오빠가 나한테 굳이 말할 필요가 없는 것처럼. 심지어 그런 생각도 별로 해보지 않았어. 오빠는 내 분신이었고, 나 역시 오빠의 분신이었지. 그런데 이제 곧 나밖에 남지 않을 거야,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지 난 몰라.

그리고 톰과 클라우디아

딱 한 사람만 빼고, 라고 그녀는 말한다. 그 누구를 사랑했던 것보다 더, 늘 사랑했다는, 분신 같은 고든에게조차 끝내 소리내어 고백하지 못한 딱 한 사람. 그의 이름은 톰이다. 가장 긴 분량에 비례해서 이 소설에서 가장 큰 의미를 차지하고 있는 이집트에서의 시간들. 그곳에서 만난 평생의 사랑, 톰. 이쯤에서 우리는 이 소설이 결국 절절한 사랑 이야기임을 알게 된다. 이 오만하기 이를 데 없는, 밥맛없는 여자도 영혼을 뒤흔든, 자기 자신보다 더 사랑한 사랑이 있었던 것이다. 제목인 '문타이거' 또한 그와의 시간, 영원한 그 밤을 상징한다. 차츰 차츰 타들어가며 짧아지는 문타이거라 불리는 소용돌이 모양의 모기향처럼, 그녀는 자꾸만 짧아지는 톰과의 그 밤이 못내 아쉬웠을 터이다. 그 짧은 밤의 순간이 영원했으면 좋겠다고 바라고 바랬을 것이다.
그러나 문타이거가 끝내 재로 사그러들듯, 밤이 지나 새벽이 오듯, 두 사람의 시간은 영원할 수 없다. 전쟁의 와중에 그만, 톰이 죽은 것이다. 시간의 끝이 감정의 소진과 소멸이 아닌, 상대의 물리적 죽음이라니. 아이러니하게도 그로 인한 절망과 아픔은 영원히 남아 클라우디아의 가슴을 치고 또 친다. 그 절망과 아픔마저 사랑이라 부를 수 있다면, 그렇다면 사랑 또한 영원하다 할 수 있을까. 정말 그렇다면 그것은 다행인 걸까. 톰의 죽음으로 클라우디아의 사랑은 영원을 얻었으니 클라우디아는 행복하다 할 수 있는걸까. 이 사랑은 클라우디아에게 대체 무엇이었을까. 수십년이 지나, 이제 죽음을 앞 둔 그녀는 말한다.

그래서 결국, 우리는 이 모든 걸 따로 떨어져서, 수십 년의 세월을 떨어져서, 반추하게 되는군요. 우리는 더 이상 같은 이야기 속에 있지 않아요. 그래서 내가 당신이 쓴 글을 읽을 때면 당신이 모르는 모든 걸 생각한답니다. 당신은 다른 장소, 다른 시간에 뒤쳐져 있고, 나는 이제 다른 사람이 되었어요. 당신이 생각했던 C, 당신이 기억했던 C가 아니라, 상상도 할 수 없는 어떤 클라우디아가 되어서, 당신이 보면 움찔할지도 몰라요. 당신이 알아보지도 못할 세상에 살고 있는, 낯선 사람. 난 이런 생각을 하면 견디기 힘들어요.
나는 이제 당신보다 두 배나 나이를 먹었어요. 당신은 젊고, 난 늙었어요.당신은 어떤 면에서 닿을 수 없는 곳에 있지요. 시간의 유리 차양 너머에 갇혀 있어요. 당신은 40년의 역사, 40년의 내 인생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잖아요. 마치 다른 세기의 살마처럼, 순진무구해 보이는군요. 하지만 당신은 또한, 이제, 내 일부분이에요. 내 다른 자아들, 나를 구성하는 그 모든 클라우디아들처럼 인접해 있고, 또 한없이 가까워요. 나 자신에게 말하듯, 난 당신에게 말을 걸어요.
죽음은 철저한 부재라고, 당신이 말했지요.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해요. 당신은 내 머릿속에 존재하는 한 부재하지 않아요. 물론, 그건 당신이 의미한 바가 아니겠지만. 당신은 육신의 소멸을 생각하고 있었지요. 하지만 그건 사실이에요. 내가 당신을 보존해요, 다른 이들이 나를 보존하듯이. 한동안은.
당신은 내게 의미를 찾아달로 부탁했지요. 그럴 수가 없네요. 당신 목소리가 내가 알고 있는- 아니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이야기보다 더 큰 걸요. 나는 다음에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알아요. 뒤에 일어난 모든 일들을 아라요. 이 무덤덤한 일련의 사건들은 어째서 전쟁이 일어났는지, 어떻게 진행되고 결과적으로 어떤 결과들을 낳았는지 설명해주지요. 아니 설명해주려는 목표를 갖고 있지요. 당신의 경험은-적나라하고 꾸밈없는-그런 데선 전혀 기여하는 바가 없는 것처럼 보여요. 그건 다른 차원에 있거든요. 나는 도저히 그걸 분석하고 해체하고, 결과를 도출하고, 논쟁을 구성할 수가 없어요. 당신은 가젤들과 죽은 사람들, 대포와 별들, 겁에 질린 소년 이야기를 해주지요. 그건 어떤 사건의 연대기보다 더 선명하지만, 난 그 의미를 찾아낼 수가 없어요. 어쩌면 의미 같은 건 애초에 없었는지도 몰라요. 내가 신을 믿는다면 더 쉬웠을지 모르지만, 난 신을 믿지 않아요. 당신 목소리를 들을 대며, 오로지 과거는 진실이라는 생각만 들어요. 그 생각을 하면 끔찍하게 겁이 나기도 하고 기분이 한껏 좋아지기도 하지요. 내겐 그게 필요해요. 당신이, 고든이, 재스퍼가, 리사가, 모두가 필요해요. 그리고 내가 이 필요를 해명할 길은 오로지 터무니없는 오만을 통해서 뿐이에요. 나의 역사와 세계의 역사, 내가 모든 것의 일부로 존재하지 않는다면, 나는 아무것도 아니니까요.

이 편지로 그녀의 역사 집필은 끝이 난다. 그리고 우리는 비로소 알게 된다. 그녀의 오만은 바로 그녀가 세상을 사랑하는 방식이었음을. 그녀는 그렇게 누구보다도 사랑이 넘치는, 따뜻하고 겸손한 사람이었음을. 그리고 또 하나. 그녀가 쓰고 싶었던 세계의 역사란, 결국 당신의 이야기였음을.

지금, 이 이야기를 읽고 있는 바로, 당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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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년의 밤
정유정 지음 / 은행나무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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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년의 밤', 벌써 많이들 읽으셨을 겁니다.
굳이 제가 소개를 해드리지 않아도 될 만큼 비평과 인터뷰 등 관련글들도 넘쳐납니다.
그러니 오늘은 기존의 리뷰와는 다른, 조금은 새로운 방식으로 '7년의 밤'에 대해 이야기해보려 합니다.

바로 소설 '7년의 밤'이 아닌, 영화 '7년의 밤'을 상상해보는 것입니다.

영화? 소설이 나온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영화가 나왔냐구요? 물론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상상이지요, 말그대로...상상.

이러한 상상이 가능한 것은 조만간 '7년의 밤'이 영화로 제작될 가능성이 매우 크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7년의 밤'이 출간되자마자 가장 뜨거운 관심을 보인 것은 일반 독자나 평론가들이 아닌 영화제작자들이었다고 합니다. 항상 콘텐츠 부족에 허덕이는 제작자들이다보니 오랜만에 볼만한 한국소설이 한 편 나왔다는 입소문을 듣자마자 판권구입을 위해 달려든 것이지요. 어떤 영화사가 판권을 구입하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이러한 추세라면 '7년의 밤' 이 영화화 되는 것은 그야말로 시간문제 아닐까 싶습니다.

그러니 실제 영화로 만들어지기 전에 과연 영화 '7년의 밤'은 어떤 모습일까...한번쯤 제 마음대로 상상해보는 것도 재밌지 않을까요?


7년의 밤
 / 소설 / 정유정 / 은행나무 (2011)

주인공과 화자는 누구인가

'7년의 밤'은 의외로 화자가 누구인지 헷갈리는 소설입니다. 큰 틀에서 봤을 때 실제 화자는 분명히 승환이지만 정작 유일하게 일인칭을 부여받은 공식적인 화자는 서원입니다. 소설 속의 7년전 과거가 팩트가 아닌 승환이 쓴 소설 속의 소설이라는 걸 알고나면 둘 중 누구를 화자라 해야할 지 더더욱 망설여집니다. 

그렇다면 조금 더 쉬운 질문. 이 소설의 주인공은 누구일까요? 그야 당연히...

어라? 당연히...곧바로 자신있게 누구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함에도 선뜻 입이 떨어지질 않습니다. 최초로 떠오르는 이름은 물론 현수입니다. 승환이 쓴 소설 속의 소설의 주인공이자 모든 사건의 시초이자 주체인 인물. 서원과 승환은 물론이고 영제를 비롯한 모든 등장인물의 삶을 송두리채 뒤버꿔버린 인물. 그렇게 이 '7년의 밤'이라는 소설의 전부일 수 밖에 없는 인물. 최현수.
그러나 우리는 서원을 무시할 수 없습니다. 서원은 이 소설 전체의 화자이자 이 소설을 움직이는 또다른 동력입니다. 현수도 승환도 오직 서원을 지키기 위해 목숨과 일생을 바치고 영제 또한 서원을 없애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지요. 서원은 이 소설 최대의 미스터리이면서 그 미스터리를 풀 수 있는 유일한 열쇠인 인물, 즉 '7년의 밤'에서의 바로 그 '7년' 자체라고도 할 수 있는 인물입니다. 

사실 소설에서야 둘 중 누가 주인공이냐를 두고 논쟁하는 것은 별로 의미가 없습니다. 장성한 서원이 승환이 쓴 소설을 읽으며 7년전 그 밤의 진실을 향해 차츰 접근해가는 소설의 구조는 굉장히 안정적이며 그렇게 탄탄한 구조 안에서 서원과 현수는 각자의 파트에서 주인공으로써의 역할에 최선을 다합니다. 굳이 누가 진짜 주인공이냐를 따지지 않아도 될만큼 의식하며 읽을 필요가 없을 만큼 균형과 안배가 잘 되어 있는 것이지요. 소설을 영화로 각색한다해도 별로 다를 건 없어 보입니다. 영화에서도 소설처럼 서원의 관점에서 이야기를 풀어가면 될 듯 합니다. 그러면서 서원이 승환이 쓴 소설을 읽는 방식으로 7년의 밤을 떠올리면 자연스럽게 그 날 그 밤으로 넘어가면 될 듯 합니다.

복잡한 구조를 어떻게 단순화 할 것인가

그러나 그게 그렇게 간단치가 않습니다. 영화는 어쩔 수 없이 소설에 비해 일방적이고 불친절한 매체입니다. 소설처럼 잠시 멈춰서서 정리하고 생각하며 음미할 시간이 주어지지 않으며, 소설처럼 모든 걸 풀어서 설명해 줄 수도 없습니다. 영화는 공간의 예술이자 시간의 예술입니다. 씬이라는 영화적 시공간 안에서 배우들은 리얼타임의 순간을 재현해냅니다. 몽타주와 나레이션이 시공간의 점프를 가능케하지만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습니다. 하나의 공간과 시간에 자리잡은 인물은 움직이고 말함으로써만 자신의 내면을 표현해내야 하며, 사건은 오직 그러한 인물들간의 물리적인 부딪힘과 대화를 통해서 발생하고 설명됩니다. 보는 이들은 그러한 씬들의 나열을, 인물들의 움직임을 그저 따라가며 지켜봐야 합니다. 따라서 소설에 비해 영화는 우리가 흔히 주인공이라 부르는 중심이 확실해야 하며 그 중심을 둘러싼 사건과 갈등은 최대한 선명하고 단순해야 합니다. 설령 어렵고 복잡하더라도 최대한 쉽고 가지런하게 나열하고 배치해서 관객들이 공감하며 따라갈 수 있도록 도와줘야 합니다. 그래야 영화가 진행되는 두시간 동안 관객들은 영화의 강제성을 용인하며 자신도 모르게 영화에 집중하며 빠져들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측면에서 봤을 때 소설 '7년의 밤'을 영화로 각색하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닐 듯 합니다. 승환이 쓴 소설속의 소설은 분명 현수가 주인공이지만 시점과 화자는 끊임없이 변합니다. 중심에는 분명 현수가 있지만 사실상 이 소설속의 소설은 등장인물 모두가 주인공입니다. 현수, 영제, 승환 그리고 현수의 아내인 은주까지. 총 4명의 시점에서 소설속의 소설은 진행됩니다. 덕분에 읽는 이들은 모든 인물의 입장과 심리상태를 속속들이 알 수 있고 거의 완벽하게 7년전 그 밤 그 사건의 전말을 파악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는 독자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작가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며, 이러한 선택을 통해 작가는 소설이라는 매체의 매력이 어느 만큼인지 독자들에게 유감없이 보여줍니다. 이쯤되면 작가는 독자들이 궁금해하는 모든 것을 보여주는, 그야말로 전지전능한 신이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영화에서는 그럴 수가 없습니다. 어떤 식으로든 인물의 움직임을 따라가야만하는 영화라는 매체의 특성상 애초부터 쉽지가 않을 뿐 아니라 혹시 무리해서 시점을 다변화하는 시도를 해본다 해도 성공적이기가 쉽지 않습니다. 끊임없이 인물들을 옮겨가며 시점이 바뀐다면 영화는 산만해지기 십상이며 관객들은 대체 누구에게 이입하며 따라가야 할지 헷갈려하며 집중력을 잃게 될 가능성이 크기 때문입니다. (구로자와 아키라의 '라쇼몽'과 그를 모방한 '커리지 언더 파이어'를 비롯한 여러 작품들에서 이러한 시점의 다변화는 분명 효과적이었지만, 이는 분명 일반적인 경우라  하기는 힘듭니다. 즉, 이미 일어난 사건을 인물 각자의 진술을 통해 회상함으로써 진실이라는게 과연 존재하는가에 대해 의문을 던지는 장치로 쓰였기 때문에 관객들은 별다른 거부감없이 따라갈 수 있는 것이지요.) 게다가 '7년의 밤'은 이러한 '소설 속의 소설'을 읽는 현재의 서원의 이야기가 병렬되는 구조입니다. 현재와 과거, 현실과 허구의 경계를 끊임없이 넘나들며 차츰 차츰 진실을 향해 접근해가는 복합적이고 다층적인 소설인 것이지요. 

이렇다보니 소설 '7년의 밤'을 영화로 옮기는 것은 성가시다 못해 난해한 작업이 될 공산이 큽니다.

소설의 액자구성을 그대로 차용할 것인지, 차용한다면 영화 전체의 화자는 서원과 승환 중 누구로 할 것인지, 소설 속의 소설의 다양한 시점을 어떻게 효과적으로 하나의 시점으로 모아내서 7년 전 그 밤을 보여줄 것인지, 현재의 서원의 스토리는 어떤 식으로 솎아내서 알맹이만 매끈하게 관객들에게 설명해낼 것인지...고민거리 투성입니다.

정답은 없다

물론 정답은 없습니다. 원작을 해체하고 발려내서 하나씩 하나씩 나열한 다음에 섬세하게 다시 재조립하는 과정이 우선 필요합니다. 그 과정을 통해 감독과 시나리오 작가는 무수한 경우의 수가 존재한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필요에 따라 뭐든지 선택 가능합니다. 소설에 얽매일 필요없이 기본적인 이야기 재료만 남긴 채 완전히 다른 구조로 만드는 것도 좋고, 원작에 충실하게 다층적인 구조를 고스란히 살리려 노력해보는 것도 의미있는 작업이 될 것입니다. 당연한 말이지만 이 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소설에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을 놓치지 않는 것입니다. 구조가 아무리 중요하다 해도 결국 스토리를 전하는 형식일 뿐입니다. 작가의 의도를 온전히 살려내서 효과적으로 관객들에게 보여주는 것, 그것이 바로 좋은 구조이고 좋은 각색인 것입니다.   

제가 생각했을 때 이 '7년의 밤'이라는 소설은 결국 현수라는 인간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절대 해서는 안될 실수를 저지른 한 인간이 차츰 파멸해가는 모습. 그러면서도 더 이상의 잘못을 저지르지 않기 위해...그리고 자신의 가장 소중한 것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고 투쟁하는 모습을 통해 작가는 인간이라는 종이 가진 나약함과 위대함을 동시에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요? 현수를 사랑할 것인가 아니면 증오할 것인가. 작가는 어쩔 수 없는 인간인 현수를 역시 어쩔 수 없는 인간에 불과한 우리가 판단하고 심판하는 것이 과연 온당한가 라고 묻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할 수 없지만 증오할수도 없는 인물, 현수. 이 선과 악이 기묘하게 혼재되어 있는, 비주얼부터 캐릭터까지 너무나도 완벽하게 영화적인 이 인물을 어떻게 하면 성공적으로 묘사해낼 것인가. 그것이 바로 영화 '7년의 밤'이 성공하기 위한 최초이자 최대의 관건일 것입니다. 

모든 고민과 선택은 바로 이러한 '현수의 현현'에 맞춰져야 하며, 현수를 실물처럼 살아 움직이게만 할 수 있다면 화자도 구조도 나머지 캐릭터들도 전혀 새롭게 바뀐다해도 상관 없을 것입니다. 아예 화자가 현수 자신이어도 좋고 심지어는 서원과 승환의 현재를 날리고 '7년전 그 밤'만을 리얼타임으로 보여줘도 좋겠습니다. 자식을 살리기 위한 현수의 광기어린 폭주를 보는 것만으로도 관객들은 충분히 압도당할 것이며 시각적으로든 심리적으로든 굉장한 충격을 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영화 '7년의 밤'에 대해 상상한다 해놓고 결국 원론적인, 당연한 이야기만 늘어놓고 말았습니다. 섣불리 상상하기에는 소설의 구조가 너무나 촘촘하고 탄탄합니다. 잘못 건드렸다가 공들여 쌓아올린 탑이 한순간에 무너지겠다 싶어질 만큼, 그냥 영화같은 건 만들지 말고 소설로만 놔두는게 더 좋지 않을까 싶어질 만큼, 그렇게 말입니다.
그럼에도 방금 말씀드렸듯이 현수를 생각하면 아직 막연하기는 하지만 분명 확연하게 떠오르는 그림들이 참 많습니다. 영제가 설치한 덫에 걸려 짐승처럼 괴성을 지르며 울부짖는 현수의 모습. 손에 든 서원의 하얀 농구화를 차마 던지지 못한 채 통곡하는 현수의 모습. 피투성이가 된 거구의 몸으로 아들 서원을 구하기 위해 안개 가득한 세령댐을 가로지르는 현수의 모습까지. 이쯤되면 어쩔 수 없이 다시 욕심이 나기 시작합니다. 섬뜩하면서도 안쓰러운 현수의 모습을 직접 스크린에서 보고 싶은 욕심 말입니다.

이렇게 저조차도 이 욕심을 버리지 못하는 걸 보니 결국 영화화가 되긴 될 모양이네요. 기왕 그렇게 될 것이라면, 그것이 이 '7년의 밤'이라는 소설의 어쩔 수 없는 운명이라면...부디 좋은 감독 좋은 작가, 그리고 좋은 배우의 손을 빌려 자신의 참혹한 운명과 맞서 싸우는 현수의 모습을 제대로 볼 수 있으면 참 좋겠습니다. 

소설 '7년의 밤'과는 또 다른, 우리가 상상했던 것 그 이상인...영화 '7년의 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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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과 게 - 제144회 나오키상 수상작
미치오 슈스케 지음, 김은모 옮김 / 북폴리오 / 2011년 3월
평점 :
절판


달과 게 / 소설 / 미치오 슈스케 / 북폴리오 (2011)

미치오 슈스케. 잘 모르는 작가입니다. 일본에서 가장 권위있는 상 중 하나인 나오키상을 받았다고 하는데 그 역시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알지 못합니다. 그저 저의 눈길을 끈 것은 장르문학의 대가였던 작가가 자꾸만 순수문학 쪽으로 관심의 외연을 넓히고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소설, '달과 게'가 바로 그러한 순수문학을 향한 작가의 열망의 결실이라니 한번쯤 읽어봐도 좋겠다는 생각이 든 것이지요.

신이치. 하루야, 나루미, 쇼조, 스미에.

이 소설에 등장하는 주요 인물들의 이름입니다. 초등학생인 신이치가 주인공이며, 하루야와 나루미는 신이치의 친구입니다. 쇼조는 신이치의 할아버지, 스미에는 신이치의 엄마입니다. 당연한 말이지만 소설은 철저히 주인공인 신이치의 시점에서 진행됩니다. 작가는 집요할 정도로 신이치의 내면을 파고 들고, 순전히 신이치의 의식의 변화에 따라 소설은 앞으로 나아갑니다. 3인칭을 사용하고 있지만 '신이치는'이라는 주어를 '나는'으로 바꾸어도 무방하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1인칭에 가깝습니다.

병든 아빠 때문에 도시에서 살다가 시골로 전학 온 신이치는 학교에서 적응하지 못하고 왕따를 당합니다. 결국 아빠는 병을 이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고, 엄마인 스미에는 생계를 위해 일을 시작합니다. 할아버지 쇼조가 신이치를 챙기려 노력하지만, 신이치는 점점 학교는 물론이고 집에서도 외톨이가 되어갑니다. 이런 신이치가 유일하게 소통하는 대상은 비슷한 처지의 전학생 하루야 뿐입니다. 매일매일 학교가 끝나면 바닷가로 달려가 소라게를 잡아 불로 태우며 소원을 비는 것이 이 두 친구의 유일한 낙입니다. 그렇게 여느날처럼 하루야와 바닷가에서 노닐던 신이치는 낯선 남자의 자동차에 탄, 엄마로 보이는 여자를 보게 됩니다. 처음에는 긴가민가했지만 시간이 갈수록 신이치는 그 여자가 바로 엄마임을 확신하게 되고, 낯선 남자가 다름아닌 나루미의 아빠라는 사실까지 알게 되는데...

이처럼 이야기는 별게 없습니다. 초반부에 이 정도의 설정을 소화한 소설은 더 이상 플롯이랄게 없을 정도로 심심하게 흘러갑니다. 작가는 소설의 많은 부분을 신이치와 하루야, 그리고 나루미가 소라게를 잡아 키우는 과정을 묘사하는데 할애합니다. 묘사는 집요할 정도로 자세하고 치밀해서 읽는 이들이 마치 세 아이들의 옆에서 지켜보는 느낌이 들 정도이고, 그 사이사이 주인공 신이치가 하루야와 나루미를 상대로 느끼는 유치하고 치사한 감정들 또한 신이치의 내면을 도려내서 내보인 것처럼 적나라합니다.
 
이 소설의 묘미이자 미덕은 바로 이러한 신이치의 내면을 훔쳐보는데서 발생합니다. 너무나 치사하고 유치하지만 초등학생만이 느끼는 감정이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신이치의 초조와 불안, 시기와 질투, 증오와 분노, 망설임과 비겁함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내면 깊숙이 간직하고 있는 보편적인 감정들입니다. 특히 자신보다 어른스럽고 의젓한 동성친구인 하루야에게 느끼는 열등감과 풋사랑의 상대인 나루미가 하루야를 바라보는 눈길에 질투심을 불태우는 부분에서 자신의 유년시절을 떠올리며 공감하지 않을 독자들이 과연 몇이나 될까 싶을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이 정도의 감정은 다른 성장소설들에서도 익히 볼 수 있고 느낄 수 있는 것들입니다. 이 소설이 가진 진정한 강점은 신이치가 느끼는 감정들이 단순히 유년시절 누구나 겪는 성장통의 수준을 넘어섰기 때문입니다. 신이치의 내면은 아이의 것이라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황폐하며 시간이 갈수록 그 정도는 심해져만 갑니다. 급기야 저 정도로 무너진 영혼으로 어떻게 삶을 계속 영위할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신이치는 위태로워 보입니다. 이러한 신이치의 불안과 피폐는 물론 아빠의 죽음으로 인한 충격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를 둘러싼 인물들과의 비정상적인 관계 속에서 그 상태가 더욱 악화되고 만 것이지요.

아이는 아이대로, 그리고 어른은 또 어른대로 이 소설의 등장인물들은 모두 상처를 안고 있고 그 내상을 어떻게든 견디려 애쓰지만 생각처럼 쉽지 않습니다. 신이치는 아빠의 죽음과 엄마의 (외도라고 할 수 없는) 외도 때문에, 하루야는 아빠의 폭력 때문에, 나루미는 엄마를 죽음으로 몰고 간 쇼조를 향한 증오와 아빠의 (역시 외도라고 할 수 없는) 외도 때문에 불안해하고 힘들어 합니다. 또한 어른인 쇼조는 자신 때문에 나루미의 엄마가 죽었다고 자책하고 괴로워하며, 신이치의 엄마인 스미에는 이 소설에서 가장 멀쩡해 보이고 꿋꿋해 보이지만 실상은 남편의 죽음의 여파에서 가장 자유롭지 못하며 도덕적으로 사실 그렇게 부끄러워 할 일이 아님에도 새로운 인연과의 만남에 조심스러워하며 괴로워 합니다.

신이치는 이렇게 상처투성이 인물들에 둘러싸여 정상적인 사랑과 관심을 받지 못한 채 고립되어 갑니다. 유일한 소통의 대상이었던 쇼조마저 상처받은 나약한 인간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나서는 아예 마음을 닫아버립니다. 소통을 위해 노력할수록 서로를 할키고 미워하며 되려 상처는 더욱 커지고 덧나기만 하니 신이치가 할 수 있는 일은 입을 다물고 철저히 홀로 견디는 것 뿐입니다.

이 순간, 작가는 신이치의 내면에 깃들어 있는 불안과 걱정들을 토로하고 잠재적으로는 소통할 수 있는 매개체로 소라게를 적극적으로 활용합니다. 소라게를 태우며 소원을 빌면 그것이 이루어진다는 설정과 일견 아이같은 순진함으로 그걸 진지하게 믿으며 진짜로 소원을 비는 신이치와 하루야. 두 사람은 자신의 소원을 소리내어 말하지 않지만 각자의 소원이 무엇이었는지 충분히 짐작하며 서로의 처지와 상황을 연민하고 동정합니다. 그렇게 닫혀있던 세상이 열리자 신이치는 하루야와의 진심어린 소통을 통해 서로가 서로를 구원할 수 있다는 망상을 갖기에 이릅니다. 그리고 드디어 자신의 소원을 하루야가 대신 이루어주리라 믿어의심치 않으며 마지막 소원을 소리내어 빌게 됩니다. 12살짜리 어린아이이기에 생각할 수 있지만 그래서 더욱 더 끔찍한, 소원을 말입니다.

한 편의 이야기란 결국 그 이야기를 지은이가 만들어낸 세계의 총체입니다. 소설은 특히 그러한 세계의 '완성도'가 다른 어떤 매체보다 더 공고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공고한 세계를 건설한 소설가의 작품을 읽다보면, 이 사람의 세계에서는 내가 걱정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겠구나, 하며 안심되는 순간이 있습니다. 이를테면 '달과 게'는 그러한 안도의 마음이 언제 깨어질까 점차 조마조마해지는 소설입니다. 분명히 걱정했던 일들이 일어나지 않는 안온한 세계라고 확신했었음에도 뒤로 갈수록 그러한 믿음이 부서지며 마음을 졸이게 되는 것입니다. 안온하고 평화로운 세계에서 더없이 위험하고 무서운 세계로의 돌변. 작가는 신이치라는 12살 어린아이의 내면에 도사리고 있는 지옥도를 보여줌으로써 우리가 절대 알고 싶어하지도 않고 인정하고 싶지도 않는 나약한 인간의 본성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불안은 영혼을 잠식하고, 지옥은 마음으로부터 옵니다. 세상은 비정하고 인간은 나약합니다. 그렇다면 희망은...

희망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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