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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를 보라 - 인문학과 영화, 그 어울림과 맞섬
고미숙 지음 / 그린비 / 2008년 6월
평점 :
절판
지난 10일, 촛불 100만 대행진이 열리던 날, 서울 한 복판엔 기이한 형상의 모형이 등장했다. 전혀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이 모형을 보며 일반 시민들은 불만을 토로했었다. 이떻게 이런 기발하면서도 끔찍한 생각을 할 수 있었을까. 하지만 그런 끔찍한 현실을 보면서도 사람들은 그 특유의 유머를 잃지 않았다. '明博山城', '국보0호'라 이름을 붙여가며 한바탕 신명나게 현실을 풍자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신랄한 풍자 속에 웃음이 나왔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곧 서늘한 서글픔이 느껴졌다. 이것이야말로 '어불성설', '이율배반'이지 않을까? 왜 이런 말도 안 되는 현실에 웃고 있어야 하는가? 이게 바로 현실의 아이러니이다. 이와 같은 현실을 겪어본 사람에겐 요즘들어 현실의 모습이 좀더 남다르게 느껴질터.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꿈꿀 수 있고, 슬픔 속에서도 기쁨을 느낄 수 있는 그 현실이 바로 우리가 사는 삶이라는 사실.

결국 우리가 이런 현실 속에 볼 수 있는 모습은, 단지 겉으로 드러난 모습 이면에 숨겨진 진실을 파헤쳐 그것을 비꼬는 것이었다. 어떤가? 막상 이런 씁쓸한 현실을 당할 땐 기분 더럽고 짜증났지만, 이렇게 그 본질을 파헤쳐 비꼬고 나니, 유쾌! 상쾌! 통쾌! 하지 않은가. 바로 이것이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면서 정말 유쾌하게 살아갈 수 있다면, 그 가능성은 바로 내가 처한 지반을 얼마나 객관적으로 잘 파악하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그럴 때에 그걸 넘어서서 자유롭게 누빌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리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호모 루덴스(놀이하는 인간)'이다. 우린 이 가능성을, 진중권씨의 '네 무덤에 침을 뱉으마!'라는 유쾌한 비평문학으로 이미 대해 볼 수 있었다. 2008년 6월 대중지성의 날카로운 풍자를 통해 맘껏 즐기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정말 달갑고도 맛있는 책이었다. 이미 '수유+너머'의 책들을 재밌게 보아왔으며, 고미숙 선생님의 책들을 거의 맛있게 읽어온 터라 과연 최신작은 무엇일까 궁금했었다. 하지만 이번엔 영화 비평서이지 않은가~ 사실 난 고전비평서나 연암의 다른 글들에 대한 책이 나올거라 은근히 기대했었다. 그래서 좀 실망하긴 했지만, 그 알 수 없는 도전정신이 오히려 반갑기도 했다. 이를 계기로 영화를 좀더 색다르게 볼 수 있는 혜안을 갖추게 될지도 모르니깐(ㅡㅡ;;). '이것은 애니메이션이 아니다'라는 책을 통해 대중문화를 비평하는 그들만의 실력을 알고 있던터라 이번에도 절대적인 신뢰로 별 고민없이 이 책을 집어 들었다. 역시나 그린비에서 나온 책답게 편집도 깔끔하고 아주 맛깔스럽게 잘 정돈되어 있다. 이런 걸 보고 '좋은 재료에, 좋은 양념이 잘 어우러진 환상적인 음식'이라 할 수 있을 터.
여기에 소개된 영화들은 나도 4~5번은 보았던 작품들이다. 그만큼 인기도 있었으며 의미있게 보아왔던 작품들이니까. 하지만 막상 이런 식으로까지 해석하며 보려하진 않았다. 영화를 본다는 건 잠시 머리를 쉬는 '휴식시간'정도로 생각했기 때문인데, 그러면서도 막상 보고 나선 뭔가 걸리는 게 있는 듯한 답답함을 느끼곤 했었더랬다. 그렇다 바로 그것이 문제였던 거다. 바로 그 답답함의 정체를 이 책에서 하나 하나 파헤쳐 주고 있다. 여기에 사용된 논거들이 이미 고미숙 선생님의 전작 '나비와 전사', '호모 쿵푸스', '아무도 기획하지 않은 자유'에서 나왔었다. 그럼에도 난 그런 지식(위생과 근대, 고향의 허구성, 사랑에 관한 신화 등)으로 영화를 보려 하지 않았다. 이를 테면 지식 따로 현실 따로이다. 이런 걸 우린 '非知行合一'이라 한다. 그럴 바에야 아예 모르는 게 나으려나... 이 책을 보는 내내 내가 헛 책을 읽었으며, 헛 영화를 보아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설마 지금까지의 삶도 '헛' 산 것이었으려나 ㅡㅡ;;
일례로 밀양을 보면서도 단순히 '기독교의 상업성'만을 비판하는데 그쳤다. 하지만 이 책을 보며 나의 분석이 얼마나 단순한 것인지 새삼 느끼게 되었다. 그 곳엔 더욱 많은 의미가 담겨 있다. 남의 욕망을 욕망하는 인간의 모습, 그리고 부당함에 맞서지 못하고 자포자기 하는 나약성, 거대한 권력에 항거하지 못하고, 사소한 것에만 분노하는 소극성까지.. 이 모든 것들을 찾아내 하나 하나 일깨워 준다. 이 책을 읽고난 지금 다시 한번 여기에 소개된 영화를 보고 싶다. 분명히 이전에 봤던 것과는 완전히 다른 영화일 것이다. '아는 만큼만 보인다'라는 진리는 텍스트 뿐 아니라 영화에서도 똑같이 적용된다.
이 책은 모처럼 나온 책임에도 내 기대에 제대로 부응하는 책이다. 우선 깔끔한 디자인이 맘에 들고 거기에 발랄하고 유쾌한 고미숙 선생님의 글쓰기가 읽는 맛을 더하며, 그의 깊이 있는 분석력이 대미를 장식한다. 우리 시대의 글이란 이런 역할을 자임해야 하는 게 아닐까 생각한다. 겉다리 훑다가 끝나는, 그래서 금방 먹기엔 '곶감이 달다'고 대중의 눈높이만을 생각한 글이 아니라, 그 속까지 훤히 보여줌으로 눈을 뜨이게 해주는 글이 되어야 하는 거다. 바로 그 인식의 기반이 바탕이 될 때 우리 자신도 제대로 평가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좀 비약이긴 해도 그럴 때 비로소 우린 이 세상에서 진정 자기 자신을 찾아가는 '주체'로 삶을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누군가를 위한 '수단'이 아닌 '주체'로 우뚝서게 되지 않을까.
10일 서울 한복판에 이상한 물체가 등장하던 그 날, 사람들은 모두가 시인이었으며, 모두가 풍류가였다. 그들은 사건의 본질을 볼 수 있는 혜안이 있던 사람들이었다. 그렇기에 그 화나는 일 가운데서 맘껏 웃으며 즐길 수 있었던 것이리라. 이 책 또한 그런 '영화의 본질(물론 여기서 말하는 본질은 절대적인 진리, 중심을 이야기하진 않는다.)'을 이야기 해줌으로 영화를 어떻게 봤으면 하는지 알려주는 안내서 역할을 한다. 덩달아 자기 자신을 성찰하게 역할까지. 이 책을 통해 영화 속에 숨은 메시지를 찾고, 그걸 통해 자신이 더욱 발전할 수 있는 가능성을 모색해보는 건 어떨까? 인연(書緣)은 늘상 주어지지 않는다. 하지만 '인연'을 만들려는 사람에겐 늘상 인연이 주어진다. 그렇다면 이 책은 인연(書緣)일까,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