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정스님이 입적하셨다. 어둔 방에 들어가 자신의 진리만을 찾고자 하셨던 분이 아니라, 세상에 나와 어둠 속에 환한 빛을 비추려고 하셨다. 불교라는 틀에 소속되어 있으면서도 불교의 타락상에 먼저 마음 아파하셨고 ‘은둔의 종교인’으로 남기보다 세상에 나와 중생의 안녕을 위해 뛰어다니셨다. 그를 생각할 때 떠오르는‘무소유’라는 말은 단순한 설법이 아니었고 그의 삶을 통해 드러나는 향기 그 자체였다. 스님은 입적하시기 직전에 “사리도 찾으려 하지 말고 탑도 세우지 말라”라고 말씀하셨다고 한다. 그건 자신의 죽음이 죽음 이상의 의미를 가지며 사람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악용되지 않도록 하기 위한 조치였으리라. 언제나 죽음 후대 사람들의 입맛에 따라 왜곡되고 날조되기 일쑤였다. 불교에선 스님이 입적하고 나면 사리가 얼마나 나왔냐 하는 것을 경쟁적으로 알렸고 그 사리의 양에 따라 그의 불심이 어쨌느니 하는 말을 하곤 했다. 한 스님의 생애를 돌아보고 그 죽음의 의미를 생각하려 하기보다 그 죽음을 어떻게든 자신에게 유리하게 써먹으려 한 것이다. 그런 모습이 어디 불교에서 뿐이겠으랴~ 기독교도 거기서 벗어날 수 없는 것임을. 예수님이 돌아가신 후 사람들은 왜 그의 죽음을 ‘그 죽음 자체로’ 가만히 두지 못했던 것일까? 왜 그를 꼭 다시 살아나게 만들어야 했던 것일까? 그것이야말로 자신들의 세를 과시하고 종교적 허무주의에 빠지지 않기 위해 ‘사리도 찾고 탑도 세우는’ 것이었던 거다. 죽음을 죽음 그 자체로 느끼기보다 초자연적인 부활과 연결시켜야만 하는 그 ‘인간적인, 너무도 인간적인 생각’에 법정스님의 유언이 더욱 무게감 있게 들린다.



스님의 무소유 정신은 “그동안 풀어 논 말빚을 다음 생으로 가져가지 않으려 하니 부디 내 이름으로 출판한 모든 출판물을 더 이상 출간하지 말아 주십시오.”라는 유언으로 드러났다. 이런 생각을 해본 적이 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언젠가 죽어야 한다는 사실을 힘들어 한다. 하지만 더 힘든 건 자신이 죽으면 이 세상에 자신이 존재했다는 사실조차 지워진다는 것이다. 누구든지 잊혀 진 사람이 되는 것 자체가 가장 큰 두려움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보편적인 방법으로 자식을 낳으려 하는 것이다. 자신의 유전자를 타고 난 자식을 보며 그런 두려움에서 벗어나고 그들에 의해 제사 지내질 때마다 기억나게 될 것임을 위안 삼는 것이다. 그 방법 외에 자신의 저서를 남기는 일도 같은 의미를 가진다. 더욱이 그게 자서전이라면 더 말이 필요 없다. 그건 자신의 삶을 정리한다는 의미 외에 언제까지 기억되기를 원하는 마음이 담겨 있을 테니까.’ 사람이 무언가를 기록하는 행위는 지식의 전달이라는 것도 있겠으나 자신을 남기고자 하는 욕구가 더 크다고 생각했다. 그건 언젠가 없어져 그 존재의 의미마저 묻혀버릴 자신을 지키기 위한 방법인 것이다. 법정스님의 수필집도 그와 같은 의미에서 벗어날 순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스님은 당당히 그 죽음 이후의 무한 소유의 유혹까지도 말끔히 털어내셨다. 자신을 드러내는 모든 출판물이 나오지 않기를 바라셨던 것이다. 이 유언을 듣고 얼마나 가슴이 쿵쾅거리며 떨렸는지 모른다. 이렇게 ‘담백하고 맛난 죽음’이 또 있을까 싶다.

죽음에 어떤 멋드러진 의미를 부여하고 사리의 양을 따져 훌륭한 분이라고 치켜세우기보다 그 죽음 자체를 느낄 수 있었던 ‘법정스님’의 입적은 그래서 의미가 있었다. 불교의 윤회관에 따라 그는 어딘가에서 다시 태어날 것이다. 그곳에서 무엇으로 태어나든 지금 우리에게 이렇게 향기를 한아름 남기고 돌아가셨듯이 끊임없이 향내를 내셨으면 좋겠다.



그런데 여기서 꼭 한번 되짚어보고 싶은 것은, 유명인과 일반인의 죽음이 어떻게 다른가 하는 점이다. 밑에 있는 글은 고려 시대 학자인 이규보의 <이와 개에 대한 글 蝨犬說>이라는 문장이다.

손님이 나에게 말했다. “어제 저녁에 한 불량한 사람이 큰 몽둥이로 놀던 개를 내리쳐 죽이는 것을 보니 그 광경이 너무 슬퍼서 가슴이 아팠습니다. 그래서 그 때부터 다시는 개나 돼지고기를 먹지 않을 거라 다짐했어요.”
나는 그 말에 대꾸하며 말했다. “어제 어떤 사람이 난로를 끼고 이를 잡아 태워 죽이는 것을 보니 가슴이 너무나 아프더군요. 그래서 그 때부터 다시는 이를 잡지 않겠다고 다짐했습니다.”
손님이 어이없어 하면서 말했다. “이는 아주 작은 생물이예요. 나는 큰 생물의 죽음을 보았으니 슬퍼할만하였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이지요. 그런데 자네는 작은 미물로 대조하였으니 어찌 나를 놀리는 것이 아니겠어요.”
내가 말했다. “모든 혈기가 있는 생물은 사람들로부터 소, 말, 돼지, 양, 곤충, 개미에 이르기까지 살기를 좋아하고 죽기를 싫어하는 마음이 다를 수 없습니다. 어찌 큰 생물이라 하여 죽기를 싫어하고 작은 생물이라 하여 그렇지 않는단 말입니까? 그렇다면 개와 이가 죽는 것은 다 똑같은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를 비유적으로 들어 대조를 한 것이니 어찌 놀린 것이겠습니까. 당신이 그런 사실을 믿지 못한다면, 어찌하여 당신의 손가락들을 깨물어보지는 않는 것입니까? 유독 엄지손가락만 아프고, 나머지 손가락이라고 해서 아프지 않다는 말입니까? 몸에 있는 것 중에는 크고 작음이 따로 없습니다. 고르게 피가 돌기 때문에 고통은 똑같은 것이죠. 하물며 각각 기운을 받은 것이라면 어찌하여 저것이라 하여 죽기를 싫어하며 이것이라 하여 죽기를 즐길 수 있겠습니까? 당신은 집에 돌아가시면 맑은 마음을 고요하게 하십시오. 그래서 달팽이 더듬이 보기를 소 뿔 같이 하고 메추라기를 큰 붕새와 같이 볼 수 있게 된 후에 나는 당신과 함께 올바른 도를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客有謂予曰 “昨晚見一不逞男子以大棒子椎遊犬而殺者, 勢甚可哀, 不能無痛心, 自是誓不食犬豕之肉矣” 予應之曰 “昨見有人擁熾爐捫蝨而烘者, 予不能無痛心, 自誓不復捫蝨矣” 客憮然曰 “蝨微物也. 吾見庬然大物之死, 有可哀者故言之, 子以此爲對, 豈欺我耶” 予曰 “凡有血氣者, 自黔首至于牛馬猪羊昆蟲螻蟻, 其貪生惡死之心, 未始不同, 豈大者獨惡死, 而小則不爾耶? 然則犬與蝨之死一也. 故擧以爲的對, 豈故相欺耶. 子不信之, 盍齕爾之十指乎? 獨拇指痛, 而餘則否乎? 在一體之中, 無大小支節, 均有血肉. 故其痛則同. 況各受氣息者, 安有彼之惡死而此之樂乎? 子退焉, 冥心靜慮, 視蝸角如牛角; 齊斥鷃爲大鵬. 然後吾方與之語道矣.”

법정스님 한 분의 죽음은 대한민국을 흔들 정도의 관심과 파급력이 있었다. 연일 매스컴 첫 머리에 보도 되었고 그의 생애를 쭉 돌아보기도 했다. 하지만 이 땅의 수많은 민초들의 억울한 죽음에 대해서는 다들 쉬쉬하며 별관심이 없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용산 사례’가 아닐까 한다. 그곳에선 한 명이 아닌 여섯 명(경찰 1명 포함)이 억울한 죽음을 당했고 그것으로 모자라 온갖 악성루머가 그들을 물들였다. 그래서 일년 가까이 장례식을 치루지 못했던 것이다. 이규보의 말대로 사람 목숨이 다 똑같다고 한다면, ‘법정 스님의 죽음이 갖는 의미〈 용산 참사 희생자의 죽음이 갖는 의미’가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실상은 그렇지 못했다. 그건 물론 나도 크게 다르지 않았으니까. 이규보는 위의 글을 통해 바로 우리의 이와 같은 마음을 비판하고 있다. 권력의 높고 낮음, 명성의 있고 없음, 돈의 많고 적음에 따라 사람을 다르게 대하고 다르게 생각하는 우리들의 속물근성을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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