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 - 증보판 리라이팅 클래식 1
고미숙 지음 / 그린비 / 2003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연암, 그를 보고 있으면 웃음이 절로 난다. 그는 태양인이란다. 이 초상을 보는 것만으로도 이미 그 사실을 알 수 있을 것이다. 풍채도 좋을 뿐더러 왠지 모르게 어떤 것에도 구애 받지 않을 것만 같은 넉넉함이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의 초상은 처음 볼 때와 그의 글을 읽고나서 볼 때와 느낌은 전혀 다르다. 처음엔 그저 통큰 사람이어서 재미도 없고 고리타분할 것만 같은 느낌이 들지만, 전혀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그의 유머가 가득한 글들을 보고 나서 이 초상화를 보게 되면 한번 크게 웃고 싶어진다. 개그맨들은 억지 상황을 만들어 웃음을 유발하기에 한참 웃고나서도 뒷맛이 깔끔하지 않다. 하지만 연암의 유머는 그의 내면 깊숙한 곳에서 나오는 유머이기에 처음엔 어리둥절하다가도 이내 웃음이 터지고 한참 웃고나면 기분이 상쾌해지기까지 하다.

  "그가 웃음을 만들어내는 원리는 지극히 간단하다. 보다시피 웃음이란 단조로운 리듬을 상큼하게 비트는 불협화음이요, 고정된 박자의 흐름에 끼여드는 엇박이다. 판소리로 치면, 적재적소에 끼여드는 '추임새' 같은 것이라고나 할까? 그런 점에서 연암은 말의 리듬, 삶의 호흡을 기막히게 터득한, 일종의 '藝人'이다. (252p)"
 

  웃음, 그건 사람을 무장해체 시키게 만든다. 그렇기 때문에 우린 삶이 유쾌한 사람을 만나고 싶어하는 걸테지. 바로 연암이 웃음을 구사하는 방법은 바로 적재적소의 상황 사이에서 엇박자를 구사하는 것이다. 전혀 예측치 못한 곳에서 전혀 엉뚱한 말이 나올 경우 누구나 크게 웃을 수밖에 없으니까. 바로 이런 유쾌한 유머의 향연이 펼쳐지는 책이 바로 열하일기이다. 그의 여행기가 유목의 여정이 될 수 있는 첫째 이유는 바로 그의 유머에 달려 있다. 여행을 떠난 이가 그 여행에 만족하지 못하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된다. 온갖 불평을 쏟아붙는다. 화장실이 더럽다는 둥, 음식이 이상하다는 둥, 사람들이 불친절하다는 둥. 그런 이야기를 하며 떠나오기 전 환경을 그리워하는 거다. 그것이야 말로 떠났으되 정착한 것이리라. 그럴려면 차라리 자기가 있던 자리에 있지 여행을 뭐하러 하는가? 여행을 떠났으면 그 모든 것들을 아무 편견없이 받아들여야하며 그 모든 것을 긍정하며 여유를 찾아야 할 것이다. 그럴 때에야 비로서 유머를 구사할 수 있으니까.

  "여행을 싫어하는 자의 편력이란? 여행이 주로 지리적 이동을 통해 낯선 세계를 체험하는 것이라면, 편력은 삶의 여정 속에서 예기치 않은 일들에 부딪히는 것을 말한다. 고대 희랍의 철학자 에피쿠로스식으로 말하면, 직선 운동 속에서 일어나는 편위, 이른바 '클리나멘'이 그것인셈. 돌연 발생하는 방향 선회, 그것이 일으키는 수많은 분자적 마주침들, 편위란 이런 식으로 정의될 수 있을터. (20p)"

  유목이 가능한 여행이 되려면 우선 유머를 구사할 수 있는 여유를 찾아야함은 지금까지 이야기 했다. 그 다음은 수많은 편위 속 회피하려 하기 보다 나를 맡기는 것이다. 우린 흔히 다른 환경, 다른 조건에 놓이면 기존의 방식을 고집하며 변하지 않으려 한다. 우리나라 사람이 타국에 가면 도리어 '애국자'로 변한다고 하니, 그것이야말로 떠났으되 정착하는 것에 다름 아니리라. 떠난 곳에서 수많은 편위들이 작용한다. 새로운 만남도 있을 것이고, 예기치 않은 상황도 닥쳐오리라. 그럴 때 맘을 열고 능동적으로 받아들이고 반응하자. 바로 열하일기가 대단한 이유도 그런 편위들에 능동적으로 받아들인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연암은 그저 동행자 수준으로 여행에 참가했기에 일에 치이는 것 없이 수많은 청나라 사람들과 만날 수 있었다. 그는 밤에 몰래 빠져나가 역관에 가서 말을 나누기도 했다. 기존의 연행록들이 단지 사건의 과정들만을 담고 있다면, 연암의 연행록인 열하일기는 사건의 과정 속에 인간들의 삶을 포착해내고 자연의 흐름을 절단,채취하여 담아내고 있다. 그런 수용능력을 통해 우린 청나라의 본래 모습을 볼 수 있는 것이다.

  유목이란 결코 몸이 떠나는 것을 전제로 하지 않는다. 우리의 생각이 자유를 확보하지 않는 이상, 능동적인 반응을 하지 않는 이상 유목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여행을 하며 그 안에서 맘껏 정신의 자유를 느껴보자. 수많은 편위들이 나의 삶과 정신을 어떻게 바꿔놓는지 살펴보도록 하자. 우리가 해야할 일은 마음을 편안히 하고 맘껏 유쾌하게 웃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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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고미숙, 몸과 우주의 유쾌한 시공간 '동의보감'을 만나다
    from 그린비출판사 2011-10-20 16:54 
    리라이팅 클래식 15 『동의보감, 몸과 우주 그리고 삶의 비전을 찾아서』출간!!! 병처럼 낯설고 병처럼 친숙한 존재가 있을까. 병이 없는 일상은 생각하기 어렵다. 누구나 그러하듯이, 나 역시 살아오면서 수많은 병들을 앓았다. 봄가을로 찾아오는 심한 몸살, 알레르기 비염, 복숭아 알러지로 인한 토사곽란, 임파선 결핵 등등. 하지만 한번도 병에 대해 궁금한 적이 없었다. 다만 얼른 떠나보내기에만 급급해했을 뿐. 마치 어느 먼 곳에서 실수로 들이닥친 불...
 
 
프레이야 2007-09-08 15: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자님 글 잘 읽고갑니다. 이 책 아직 못 읽어봤네요.

leeza 2007-09-08 21: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벌써 이 책만 세 번째 읽어요. 왠지 읽을 때마다 새로운 책을 읽는 듯한 착각에 빠지곤 하죠~ 시간 나거든 꼭 읽어보세요^^

비로그인 2007-09-08 22: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아직 읽지 못하고, 리스트에만 담겨져있는데 언젠가~ 도전해 봐야겄어요.

leeza 2007-09-09 09: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라이팅 시리즈는 어떤 책이든 다 좋은 거 같아요. 어려운 책들도 재밌게 읽게 해주니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