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신상담 1 (반양장)
리선샹 지음, 양성희 옮김 / 휘닉스드림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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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중국 역사소설하면 대표적으로 <삼국지연의>와 <초한지>가 널리 알려져 있고 지금도 많은 독자층을 가지고 있다. 이 두 작품은 난세에 영웅들의 활약상으로 결국 갈라져 있는 진리를 하나로 합쳐 대 통일이라는 대업을 이루는 장구한 드라마를 연출하고 그 과정에서 불세출의 영웅들의 활약상과 인간적인 이야기로 독자을 사로잡는 매력을 가지고 있는 작품들이다. 아마도 역사는 흩어지면 다시 뭉치게 마련이고 통일된 과정이 길어지면 자연히 분열되게 되는 것이 역사의 일정한 순리였을 것이다.  

<와신상담>은 지금으로 대략 2500여년전의 춘추시대 정확히 춘추 말기 시대의 월나라와 오나라의 패권다툼을 그리는 역사소설이다. 우리가 잘알고 있듯이 주나라의 세력권이 약화되면서 중국대륙은 그야말로 혼세의 시대로 접어들게 된다. 지금도 그 이름을 다 외울수 없을 정도로 많은 공국들이 일어났다가 사라지게 되는 춘추전국시대라는 대혼란을 겪게 된다. 결국 진시황에 의한 최초의 중국통일왕조가 탄생하게 되지만 수백년동안 난세를 겪게 된다. 그동안 춘추 전국 시대에 대한 집중적인 조명은 이들 공국들의 활약상보다는 공자,맹자,순자,한비자,장자,묵자등을 비롯한 일명 제자백가들에게 더 초점이 맞추어졌다고 할 수 있다. 단지 사마천의 <사기>를 통해 고사성어로 일반인들에 다가왔을 뿐 그다지 주목받지 못했던 것이 사실이다. 

그 이유야 여러가지 있을 수 있지만 아마도 삼국지나 초한지 처럼 통일이라는 거대한 모티브가 없었기 때문이지 않나 싶다. 통일이라는 대명제를 전제에 두고 벌어지는 각종 암투와 전술 그리고 사랑담에 비하면 특별한 자극제가 없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필자는 월나라 구천의 와신상담에서 기발한 모티를 끌어냈다. 그동안의 역사소설의 관행처럼 여겨졌던 권선징악이나 패권쟁탈이 아닌 출발점에서 패배를 전제로 그야말로 좌절에서 새롭게 역전의 드라마를 연출해내는 대반전을 제시하고 있다. 그러면에서 이번 소설은 또다른 재미를 선사하고 있다. 물론 역사소설이다보니 작가의 상상력이 가미되었음을 인지해야 할 것임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흔히 춘추시대를 대표하는 실권자을 춘추오패라고 한다. 제나라 환공, 진나라 문공과 목공, 초나라 장왕, 오나라 합려 또는 월나라 구천으로 대표되는 춘추오패는 주나라 왕실을 대외적으로 인정하면서 사실상 전권은 자신들이 행사했던 이들이다. 이중 와신상담이라는 고사의 주인공격인 월나라 구천이 바로 본 소설의 주인공인 것이다. 춘추시대와 전국시대의 과도기적인 이 시기를 오월춘추시대라 명할 만큼 월나라와 오나라 양국이 사실상의 패권을 다툼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이 소설은 특히 드라마로 방영되어 상당한 인기를 거둔것으로 알려져 있을 만큼 그 내용의 전개가 마치 드리마의 대본을 보듯이 간결한 독특한 맛을 보여주고 있다. 대게 역사소설의 경우 시대적, 인물적인 장황한 부연설명으로 인해 다소 지루한 느낌을 주지만 이 소설은 그런면에서는 상당히 현대적인 문체로 깔끔한 맛을 보여주고 있다. 마치 드라마의 한컷 한컷을 보는 듯한 뉘양스를 풍기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춘추오패중의 하나였던 초나라 장왕의 화려한 시대가 가고 어리버리한 군주가 들어서게 되면 충신은 그 설땅이 없어지게 마련이다. 그중 하나가 바로 사마천의 자객열전 어복장검의 주인공인 오자서의 등장과 그를 등용한 오나라 합려의 등장으로 오나라가 사실상의 패권을 쥐게 된다. 이러한 틈바구니에서 월나라는 그야말로 숨을 죽인채 오나라의 속국으로 그 명맥을 유지하나 역사는 그런 월나라의 운명을 바꾸게 된다. 구천이라는 이의 등장은 새로운 시대를 열게 만드는 것이다. 소설 초반부는 구천의 강력한 국가상과 훈구대신들의 현실직시론이 부딛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결국 구천의 태자패위라는 극단적인 결과를 초래하지만 구천은 이를 극복하고 왕위를 찾게 된다.

작가는 초반부의 설정을 통해서 소설의 모티브인 좌절, 패배의 가장 시발점을 보여주고 있다. 아버지인 윤상을 대리청정하는 자리에서 쫒겨남으로서 구천에게 일차적인 패배, 좌절의 교훈을 주지만 아직 그 좌절은 좌절이 아님을 암시하고 있다.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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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뇌의 원근법>을 리뷰해주세요
고뇌의 원근법 - 서경식의 서양근대미술 기행
서경식 지음, 박소현 옮김 / 돌베개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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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일학자 서경식의 서양근대미술 기행 세번째 이야기 <고뇌의 원근법>은 예술작품 특히 미술작품에 대한 시각에 대하여 많은 생각을 하게하는 책이다. 특히 우리가 미술 작품을 보고 감상하면서 그 미술 작품에 대한 최우선의 가치를 어디에다 두어야 하는지에 대해서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가슴에 작은 돌맹이 하나를 던져준다. 모든 예술 작품의 본연적인 가치이자 추구하는 이상은 다름아닌 미학일 것이다. 예술은 인간이 미학을 표현해 낼 수 있는 최상의 그리고 마지막 도구일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런 미학이 잘 구현된 작품을 보게 되면 대리만족을 느끼는 것이고 예술작품에 빠져드는 것일지도 모른다. 인간 본성중의 하나인 미에 대한 추구는 고대에는 신화를 창조하였고 문명시대로 접어들면서는 예술작품이라는 시각적인 보조물을 탄생시킨 것이다. 

그러면 이런 미술작품은 미학이외 다른 가치는 없는 것일까? 미학만인 미술 작품이 추구하는 절대적인 가치일까? 이에 대해 필자는 에밀놀데, 에른스트 루트비히 키르히너, 오토 딕스, 펠릭스 누스바움, 카라바조등의 독일화가들을 통해서 미술작품이 표현하고자 하는 또 다른 가치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또한 인상파의 거두인 고흐의 원근법을 통해서 고흐의 작품속에 들어있는 살아있는 고흐의 정신을 말하고 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들 화가들은 흔한 잣대인 미학으로 제단 한다면 잘 그린 그림이라고 할 수 도 없고 더구나 예쁘다라는 표현과는 상당한 거리감이 있는 작품들이다. 오토 딕스를 비롯한 독일작가들의 작품은 세계양차대전의 한복판에서 느낀 폭력, 잔혹, 그리고 인간으로서의 인간성상실에 대한 상처와 좌절로 표현되는 작품들이다. 나치즘이라는 거대한 파도속에서 좌절할 수 밖에 없는 한 인간의 심성을 고스란히 작품에 표현했다. 이들 보다 앞선시대를 살아갔던 고흐 역시 자신의 작품에서 자신과의 삶에 대한 투쟁과 극복 그리고 화해를 담은 메세지를 전달하고 있다. 우리가 고흐의 작품을 보면서 원근의 묘사나 색채의 선택, 터치의 질감등이 후대 미술사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고 그래서 그의 작품이 후대에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고 있지만 고흐는 살아생전 자신의 작품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를 받지 못하고 이승을 떠났다. 그 이유는 아마도 미학과는 거리가 멀게만 느껴졌던 그자신의 표현때문이었을 것이다. 고흐는 그림을 잘그릴려고 했던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과 생각을 그렸을 뿐이다.  

이처럼 미술작품은 미학을 전제로서만 존재의 가치가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퓰리처상을 받은 한장의 사진에서 우리는 많은 것을 느낄 수 있듯이 이들의 작품속에서 우리는 역사의 숨겨진 이면을 볼 수 있는 것이다. 굳이 역사라는 거대한 담론은 아닐지라도 작가가 살아갔던 그 시대의 삶을 투영해 볼 수 있는 것 또한 미학 못지 않게 중요한 가치일 것이다. 예술 또한 시대적 담론에 거역할 수 없지만 그런 담론을 온몸으로 거부했던 작가들의 작품이 남아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시대를 새롭게 볼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면에서 우리의 예술계는 아쉬운점이 많은것 역시 사실이다. 잘 그리고 예쁜그림만이 대접받는 풍조가 못내 아쉽다. 필자는 이들 화가들을 통해서 진정한 미학의 의미를 새롭게 부여하고 있다.

이번 필자의 서양근대미술 기행을 통해서 기존의 미술작품을 바라보는 시각에 대해서 많은 생각을 하게한다. 미학이 고려되지 않는 작품은 우리들의 시각적인 감각을 불편하게 하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미학만이 최고의 가치로 형성된 작품은 우리의 가슴속에 오래 기억되지 못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물론 예술작품을 평가할때 어느 부분이 상위의 가치인지 대해서 정확한 판단을 내릴수는 없는 것이지만 작가의 시대적인 담론과 삶에 대한 투영이 없는 작품은 단지 그림으로서의 가치만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눈으로 보는 그림이 아닌 마음으로 보는 그림이 진정한 예술작품이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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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지 않는 사람들>을 리뷰해주세요
보이지 않는 사람들 - 21세기 노예제, 그 현장을 가다
E. 벤저민 스키너 지음, 유강은 옮김 / 난장이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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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예(奴隸)의 사전적인 의미는 인격으로서의 권리와 자유 없이 주인의 지배하에 강제·무상으로 노동하며 또 상품으로 매매·양도의 대상이 되는 인간이다. 지구라는 행성에 존재했거나 현재까지 존재하고 있는 다양한 생명체들중 유일하게 같은 종을 노예라는 개념으로 활용하는 종은 인간이라는 종이외에는 없을 것이다. 즉 이 말은 인간 만큼 잔인하고 비정한 종도 없다는 말고 일맥상통 한다고 할 수 있다. 사실상 노예제도에 대한 역사적인 기원은 선사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농경의 개발과 청동무기의 발전으로 인해 인간들은 평등 수렵경제에서 불평등 정복경제 시스템으로 일대 변혁을 가져왔다. 다른 씨족 부족을 정복 하면서 전재노예라는 관행으로 시작된 노예제도는 그 이후 인류의 역사와 더불어 하나의 축으로 존재해 왔다. 이런 노예제도는 인류가 문명화되지 못했던 시기의 일이고 인류 역사에 극히 적은 부분을 차지 할 뿐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만. 사랑과 평화, 자비를 주 모티브로 하는 기독교사회, 이슬람사회, 불교사회를 거치고 인본주의를 내세운 르네상스시대등 화려한 시대를 거치면서도 유독 인간 자신에 대한 족쇄에 대해서는 그 어떠한 변화를 가져오지 못했다면 분명 문제가 있는 것이다.
결국 산업혁명 이후 자본주의 시스템으로 접어 들면서 공식적으로 노예제도에 대한 진지한 인류의 고민이 이루어졌다. 너무나 잘 알다시피 링컨에 의해 공식적인 노예제도는 사라졌다. 흔히들 링컨이 노예해방의 아버지로 추앙 받고 있지만 사실 링컨은 노예제도를 남북전쟁에 이용했다는 견해도 상당하다. 그 만큼 마음속 깊은곳에서 논의된 문제가 아닐 것이다. 

하여튼 21세기를 살아가는 현 시점에서 노예라는 단어는 거의 모든이에게 잊혀진 과거의 한 부분이다. 그리고 노예제도는 박물관에나 가야지 볼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럼 지금 이 지구상에 노예는 살아진 것인가? E.벤저민 스키너의 <보이지 않는 사람들>은 바로 우리가 잊고 있는 노예에 대한 현장 보고서이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이들 노예들은 우리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 확대 재생산된 자본주의 시스템속에서 이러한 노예제도는 눈에 보이지 않는 비밀스러운
곳에서 활기차게 운영되고 있다. 그래서 이들은 우리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것이다.
과거의 노예는 주로 강제, 무상노동에 촛점이 맟춰 있다면 현대의 노예는 이러한 노동이외에 성적인 강압까지 더 받고 있다. 또한 과거에는 주력이 성인 노예였지만 지금은 자신의 의사결정을 제대로 할 수 없는 아동들이 주 타킷으로 변해있다. 그리고 삐툴어진 성욕의 충족대상으로 수많은 아동들이 죽음의 문턱을 넘어서고 있다.   
 

결국 자본이라는 거대한 괴물앞에서 오늘 지금 이시간에도 세계의 곳곳에서 노예 사슬에 얽혀가는 이들이 속출하고 있는 것이다. 250여년전에 노예해방 당시에는 그래도 인간적인 연민의 정과 불의를 참지못하는 정의로움이 그마나 존재했다면 지금은 그런 감정은 아예 찾아볼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아이티의 아동 노예 매매가 공공연히 자행되고 아동을 공급하는 인간이나 소비하는 인간이나 그 어떠한 자책감을 가지지 못하고 그저 상품으로 취급한다는 것이 문제인 것이다. 고도로 발달된 자본주의 시스템이 만들어 낸 인간성 상실 자체를 보여주고 있다. 더욱 충격적인 것은 이런 아동들이 미국 본토로 공수되어 가정도우미라는 미명하에 각종 노동에서 부터 성적인 확대까지 당하고 있다는 것은 차마 두 눈 뜨고 볼 수 없는 상황이다.  


공식적으로 한쪽에서는 이런 아동 노예제도를 근절시키기 위해 엄청난 자금을 쏟아 붓고 있지만 이러한 자금은 정권 유지로 흘러 들어가고 아동의 매매는 오히려 더 늘어나고 있는 추세이다. 어디서부터 손을 대하할지도 모를 정도로 점조직으로 마치 암세포가 번져가듯이 사회곳곳에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노예라는 개념을 조금만 확대하면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현실은 그동안 인류의 역사를 통틀어 수적으로만 따지면 가장 많은 노예가 존재한다고 할 수 있다. 자본이라는 어마어마한 힘 앞에서 굴복하여 준노예와 같은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존재하는가? 이처럼 지금의 우리는 오히려 과거의 노예해방 시절보다 더 악화된 상태를 맞이하고 있다.
그 당시에는 대외명분이라는 개념이 존재했다면 지금은 이러한 명분조차 필요없는 오로지 자본이외에는 어느 누구도 노예해방을 할 수 없다는 점이 가장 큰 문제인 것이다. 다들 살아가기 바쁘고 힘들다 라는 핑계하에 이제는 외면해 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이들은 우리에게 보이지 않는 사람들이 아니라 우리가 보지 않을려고 하는 사람들인 것이다. 물질만능주의 시대에 상생의 길을 걷자고 하면 억지 논리로 보일 수 있겠만 최소한의 상대를 핍박이라도 하지 않는 세상이 왔으면 한다. 이런 상태가 지속되면 언제가는 보이지 않는 사람들로 가득한 세상이 오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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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을 위한 동양철학사 청소년을 위한 역사 교양 22
임선영 지음 / 두리미디어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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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레스, 피타고라스, 플라톤, 아리스토델레스, 데카르트, 스피노자, 흄, 칸트, 헤겔, 하이데거등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서양철학를 대표하는 이들로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하고 그동안 많은 자료나 책들을 통해서 읽혀져 왔던 이들이다. 철학을 입에 담을려면 이들의 이론을 모르고는 말을 할 수 없을 정도로 우리의 사상계에 많은 영향을 미친 이들이다. 철학이나 사상을 논할 때 이들의 이름이 거론되지 않으면 왠지 그 진지성이나 신빙성에서 흠집을 받게 마련일 정도로 지대한 영향을 주는 이들이다.


그러면 공자, 맹자, 장자, 한비자 정도는 들어봤을 것이다. 여기까지는 그래도 교양수준에서 대충을 알고 있는 이들이다. 하지만 왕충, 이지, 암베르카르, 혜강, 완적등을 거론하면 도통 이들이 무슨일을 했던 사람인가 하고 의야해 한다. 그리고 몰라도 되는것으로 치부하고 그게 정상이다고 생각한다.

근대화라는 물결이 동양세계에 밀어 닥치면서 동양은 많은 변화를 경험 했다. 근대화==과학화==기독화라는 논리에 의거하여 기존 동양의 유수한 사상들은 낡고 부패하고 비합리적인 사유로 낙인 찍히게 되고 너도 나도 할것없이 근대화의 정신적인 논리인 서양철학사상을 익히지 않으면 살아남지 못하는 세상으로 만들었던 것이다. 이러한 동양의 근대화는 긍정적인 요인을 준점 또한 부인할 수 없다. 당시 동양에서(지금도 진행중이다) 가장 절실한 점은 경제적인 문제였다. 서양열강의 동양침략은 바로 이런 논리에 의거하여 정당화 되었던 것이다. 동양의 입장에서도 서양보다 못한 시스템적인 문제로 인해 침탈 받았다고 생각할 정도로 근대화는 동양세계를 180도 바꿔 버린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근대화의 이면에는 오리엔탈리즘이라는 편견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이러한 오리엔탈리즘은 당초 서양이 동양을 지배하기 위한 논거로 시작 되었지만 오히려 동양내에서 확대 재생산되어 식자층들에서 부터 일반인들에까지 당연시 받아졌던 것이다. 서양은 우수한 것이고 동양은 미개한 것이라는 오리엔탈리즘은 제도,법류,경제등 과 심지어 사상에 까지 미치게 된 것이다. 그래서 동양사상이나 철학을 연구는 제대로 이루지지 못하였고 그 평가 또한 절하되었던 것이다. 

이번< 청소년을 위한 동양철학>는 이러한 오리엔탈리즘에 젖어있는 우리에게 좋은 본보기를 준다. 물론 이 책은 고대 종교와 신화에서 그 사상의 기원을 잡고 출발하여 동양사상 가장 화려한 꽃을 피운 공자시대인 제자백가시대와 인도의 불교철학,주자학과 양명학등을 다루고 있다. 또한 서양사상이 전래되면서 동양사상에 일대 변화를 주는 근대의 철학자들을 다루고 있는 책이다.
물론 동양철학은 그 깊이나 내용면에서 서양철학과 비교도 될 수 없을 정도로 그 양이 방대하기 때문에 이 책의 근본적인 취지에
맞추어 핵심적인 내용들만 수록하고 있다. 물론 이 책 한권을 통해서 동양철학을 다 이해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지만 이러한 리뷰를 통해 청소년들에게 동양사상의 근간을 심어주기에는 안성맞춤인 책이다.

서양철학의 기반 역시 신화에서 시작하듯이 동양철학 역시 신화에서 그 뿌리를 두고 있다. 다만 동양은 서양에 비해 일찍이 사유의 무게 중심을 신에서 인간으로 자리매김했다는 점이 특이하다. 이는 모든 사유의 중심을 인간에 초점을 두고 인간사에서 그 해답을 찾았다는 점에서 오리엔탈리즘의 공격 목표가 된것 역시 사실이다. 그러나 철학이나 사상이 존재하는 이유는 바로 우리 인간에게 있다는 점에서 그 우수성은 대단한 것이다. 이 책을 통해서 동양철학이 서양철학보다 우수 하다는 것을 인지 하라는 것은 아니지만 동서양철학의 균형있는 사고를 가지는데는 바람직해 보이는 책이다.

자라나는 청소년들의 편협되지 않는 사고를 위해서 동서양철학을 비교해 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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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사군의 실제 위치 연구 - 한반도를 식민지배해 온 것으로 왜곡되어 온, 김종서의 한국사 복원서 5
김종서 지음 / 한국학연구원 / 200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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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사학의 아버지라 추앙받은 독일의 랑케에 의해 주창된 실증사학은 기존의 철학이나 신학에 의거한 역사 인식에 일대 변혁을 일으키고 근대화라는 크나큰 패러다임속에 새로운 역사 인식의 툴로 자리 매김하게 되었다. 랑케가 주장하는 실증사학 표현 그대로 역사 서술은 원사료(原史料)에 충실하면서 사실(史實)의 개성을 객관적으로 기술하는 데 그 특징이 있다.
그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기술할 것을 강조하고, 역사란 많은 사상(事象)이 상호 관련되어 발전된 그대로를 기술해야 하며, 또 각 시대에 존재하는 독자적인 개성가치를 간파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실증사학의 사조가 조선의 한반도에 유입되기 시작한 것은 우리 민족에 지극히 불행했던 시기인 일제 강점기 일본 식민사학자들을 통해서 전파되었다. 한국 사학의 거두로 알려진 이병도를 비롯한 몇몇 학자들이 일본유학을 통해 처음으로 실증사학을 접하게 되었고, 귀국해서는 조선총독부산하에서 한국사연구를 시작했다는 점이 두고두고 우리에게 뼈아픈 과제를 남겨주고 있다. 

현재 대한민국의 국립박물관에는 고조선에 대한 역사가 없다. 일반인들은 의아해할 수 있지만 강단 학계에서는 고조선에 역사를 부인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왜? 실증사학에 의해 원사료에 대한 사실의 신빙성이 부족하고 기존 몇몇 청동기유물에 대한 방사성 연대 측정등을 이유를 들어 부정적 견해가 통설로 자리 매김하고 있다. 이들은 삼국사기의 초기기록자체 또한 부정하고 있다.
이러한 학계의 통설에 의해 고조선을 비롯한 상고사에 대한 우리의 역사는 없다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이들의 시조라고 하는 이병도는 일본식민학자들과 손잡고 연구한 한국 고대사에서 일본의 식민주의정책에 적극 찬동한 인물이다. 일본은 식민지 정책의 정당화를 위해 조선의 역사를 왜곡하고 고대 한반도내에 임나일본부가 존재했다는 사실을 끼어 넣으므로서 한반도의 식민지화를 정당화하였던 것이고 이에 맞장구 친 이가 바로 지금 강단 학계에서 추앙받고 있는 이병도이다.    


해방이후 이러한 상고사에 대한 재정립이 필수적이었으나 이승만 정권의 반공 이데올로기 지상주의로 인해 친일청산이 이루어지못하였고 단재 신채호선생을 비롯한 민족사관 사학자들의 주장이 위험스러운 사상으로 치부 받는 바람에 왜곡된 역사관이 그대로 굳어지게 되었던 것이다. 일본의 독도영유권 주장과 중국의 동북공정 프로젝트가 알려지면서 이제서야 우리의 상고사에 대한 재인식문제가 대두되었고, 재야사학자들 사이에서 설득력 있는 주장들이 나오고 있는 것이다. 

<한사군의 실재 위치 연구>는 그동안 줄기차게 왜곡된 우리 상고사를 바로 잡고자 노력한 재야 사학자 김종서 박사의 의미 있는 연구서이다. 아마 기억을 학창시절로 되돌려 보면 고조선이 BC 108년에 한나라의 침공으로 멸망하고 나서 한나라는 다시는 고조선의 재기를 막는다는 이유로 낙랑군, 현도군, 임둔군, 진번군의 4군을 설치 하였고 그 위치가 한반도내에 있는 것으로 학교에서 배웠다. 학생들에게 그렇게 가르켰던 선생이나 그런 사실을 배웠던 학생이나 그게 사실인 줄 알았던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대표적인 역사왜곡의 일부분이었던 것이다. 단재 신채호의 <조선상고사>를 보게 되면 한반도내에 이러한 한사군은 존재하지 않은 거로 주장하고 있다. 이병도는 평양일대에서 발굴된 한나라 유적과 중국역사서에 명기된 패수를 대동강으로 비정함으로서 한사군의 위치가 한반도내로 자리잡게 된 것이다. 이병도는 랑케의 실증사학에 입각하여 원사료와 발굴된 역사적유물을 근거로 부끄럽지만 역사적 사실이라고 주장했고 이러한 설은 이후 한국 사학계의 통설로 받아 들여졌다.

하지만 근래에 들어서 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중국역사서가 대게 춘추필법의 방식으로 기술 되었다는 점과 당시 지명과 후대의 지명이 일치하지 않는다는 점 그리고 평양에서 발굴되었다는 유물의 조작성이 대두 되면서 이러한 통설에 의문을 던져주고 있다. 특히 김종서의 박사의 논거는 그동안 재약 사학자들의 막연하고 자기중심적인 학설에 비해서 상당히 과학적 근거를 가진 학설로 주목받고 있다. 굴곡지수라는 새로운 기법을 창안해서 새로운 강역연구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 당시의 거리는 지금의 지도상의 거리개념인 수평직선 거리가 아니였다 당시에는 어떤 지점에서 오르막 내리막등의 있는 구불구불한 거리를 실제 거리로 기록해 전하는 방법을 채택했기 때문에 사실상 현대의 거리 개념과는 상당한 차이를 보이고 있는 것이다.

특히 고조선의 강역에 절대적인 영향을 끼쳤던 연나라의 강역을 확정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착안에서 만든 것이 굴곡지수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연나라 장수 진개가 고조선을 격파하여 2천리밖으로 밀어 냈다는 기록이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연나라의 강역확정에 의해 요동이냐 아니면 한반도내냐로 고조선의 강역이 고무줄처럼 늘고 줄어들기 때문이다. 이런 굴곡지수등을 통한 필자의 연구는 한마디로 한사군은 한반도내에 존재할 수 도 없는 것임을 보여준다. 또한 그동안 평양 지역에서 나온 고고학적인 유물에 대한 설명도 쉬워진다. 결론적으로 그동안 우리는 원사료에 대한 해석을 잘못하였고 고고학적 유물에 대한 판단을 잘못하였던 것이다. 이는 일본식민학자들의 유물조작사건도 있었지만 근시안적인 우리 학자들의 판단이 한 몫을 한 셈이다. 그러나 지금도 학계에서는 이러한 사실을 받아들이기 망설이고 있다. 기득권의 영유와 그동안 자신들이 설파한 통설에 대한 전면부정이 쉽지는 않겠지만 자신들 입으로 마르고 닳도록 주장한 실증사학에 크나큰 흠집을 내기 때문일 것이다.  

세계사를 상고해 보면 자국의 역사는 자국이 지키지 않으면 그 어느 누구도 지켜주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현재도 독도문제만 하더라도 객관적으로 독도를 대한민국의 영토라고 손들어 주는 국가는 세계 어디에도 없는 실정이다. 그만큼 자국이 나서서 지키지 않는 역사는 그나라의 역사가 아니라는 것을 말해주는 사례이다. 하물며 그나라의 대표적인 사학자들이 나서서 자기 역사가 아니라고 하는데 더 말할 나위가 있겠는가?

중국의 동북공정은 그야말로 무서운 것이다. 고조선, 고구려, 부여등의 역사를 자국의 지역역사로 편입시키는 이유가 장래에 있을 한반도 통일에 대한 사전포석이라는 음모론까지 나오고 있는 것을 보면 단순한 역사왜곡의 차원을 넘어선 한반도의 정략적 우위를 점하고자 하는 고도의 전략인 셈이다. 이러한 사실을 직시하고 이제라도 제대로된 우리 상고사를 찾아야 하는 시점이다. 기존 강단 학계의 각성이 필요한 시점이고 일반인들의 역사인식도 새롭게 정립 시켜야 할 때이다. 이러한 시점에서 김종서박사의 한사군 실제 위치 연구는 좋은 본보기가 되는 역사서이다. 물론 우리도 중국과 일본에 맞서 역사왜곡을 하자는 것은 아니다. 단지 주체적인 역사관을 가지고 정말 실증사학에 입각한 역사를 바로 잡자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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